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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식 / 물과 얼음의 메타포

김영호


현덕식 / 물과 얼음의 메타포 

김영호 미술사가 중앙대 명예교수

물은 동서고금의 예술가들에게 창조적 영감을 불러일으키는 소재였다. 나르시스 신화의 샘에서, 백조가 노니는 은빛 호수, 천 개의 달이 비친 강, 그리고 폭우가 몰아치는 바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자연의 모습으로 소개되어 왔다. 어디 예술가들 뿐인가. 과학자들에게도 물(H₂O)은 생태와 생명의 비밀을 밝히는 연구의 대상이었다. 생물학에서 물은 생명현상의 근간이자 물리학에서 물은 미립자인 원소들이 결합된 집합체이고 보니 물은 만물의 근원이라 아니할 수 없다. 고대 그리스의 철학자 탈레스가 만물을 이루는 아르케(arche)가 물이라고 주장한 이래 물은 인문학의 영역에서 다루어져 왔다. 무색 투명하고 무취 무미한 물에 대한 해석은 이렇게 시대에 따라 관점을 달리하면서 사유의 폭을 확장시켜온 것이다.



현덕식 <유시도流漸島> 130×194cm, 한지에 먹, 2023


화가 현덕식의 경우 물은 빙산 모양의 얼음 이미지로 다루어진다. 고체 상태의 얼음을 소재로 삼아 그것을 바다에 떠 있는 섬의 형상으로 은유해 나타낸 것이다. 작가는 자신의 얼음 그림 시리즈에 유시도(流澌島)라는 제명을 붙였다. ‘녹아서 흐르는 섬’이라는 의미로 항상 변하는 속성을 지닌 가변적 세계의 속성을 담아낸 것이라 한다. 시간 속에서 생멸하는 자연의 본성을 보다 적극적으로 드러내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가가 만들어 낸 신조어일 것이다. 시간을 거듭하면서 그의 유시도는 섬의 이미지를 넘어 다양한 꼴을 지닌 존재물이거나, 알 수 없는 형태의 추상 이미지로 확대되고 있다. 풍경에서 인물이나 동물이나 정물 그리고 사이보그를 연상케하는 존재의 이미지들로 확대되면서 흥미로운 해석의 가능성을 열고 있다.



현덕식 <유시도流漸島> 130×162cm, 한지에 먹, 2022


현덕식의 유시도는 한지와 먹이라는 재료의 속성으로 인해 독특한 감흥을 불러일으킨다. 한지를 겹으로 합해 만든 장지에 먹을 올려 강렬한 흑백의 대비효과를 만들어 내면서도, 대립되는 두 개의 토운을 부드럽게 융합시켜 견고한 얼음의 형상을 유기적 기운으로 변주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이때 작가가 시도하는 얼음 형상의 부드러움이란 고체화된 얼음의 표면을 액체의 상태인 물의 유기적 속성으로 표상해 내기 위한 시도의 결과라 할 수 있다. 현덕식의 유시도는 견고함과 부드러움의 역설적인 관계를 구현하기 위한 시도이며 이러한 목표를 한지와 먹의 질료적 속성을 통해 구현해 내고 있다 할까. 한편 작가의 작품에서 발견되는 기묘한 융합의 서정성은 그가 사용하는 조형 방식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물감을 분사하는 스프레이 기법으로 형상의 볼륨을 나타내거나 솜방망이를 사용해 빛의 반사면을 부드럽게 강조하는 방식이 그것이다. 얼음 섬의 아래로 드리워진 대칭형의 그림자는 시각적 투명성을 더해주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현덕식의 유시도는 보는 이들에게 물과 얼음의 메타포를 흥미롭게 전해준다. 무색 투명하고 무취 무미한 액체가 모여 만들어 낸 형상이 샘과 호수와 강 그리고 바다라는 이름의 풍경으로 불리는 것과 같이 그가 그려낸 얼음의 형상은 빙산 혹은 섬이라는 일차적인 메타포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가 그리고 있는 섬은 섬으로 불리지만 섬이 아닌 어떤 세계를 상징하며 이차적인 메타포로 해석되기를 요구하고 있다. 다양한 형태의 얼음 덩어리들이 섬이라는 제명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관객들은 작가가 표상해 낸 섬의 모습에서 인물이나 동물이나 정물 그리고 사이보그에 이르는 다양한 존재의 이미지를 발견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작가의 얼음 그림이 드러내는 다중적 해석의 전략에 공감하게 될 것이다. 좀 더 정리하면 이렇다. 현덕식의 유시도는 섬의 이름을 빌어 존재하는 것들의 실체에 대해 성찰하도록 유도한다. 존재하는 것들의 실체란 만물은 각각 저마다의 형태를 지니지만 결국 시간의 흐름 속에 사라지고 세상의 원형적 물질인 원자로 환원된 후 공유결합을 거쳐 새로운 존재물로 다시 태어난다는 사실이다. 



현덕식 <유시도流漸島> 130×162cm, 한지에 먹, 2022


현덕식의 유시도는 물과 얼음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을 목표의 하나로 삼고 있다. 녹아 흐르는 섬의 이미지를 얼음 조각이라는 형태로 나타내면서 존재하는 것들의 본성에 대해 성찰을 권하는 것이다. 하지만 유시도 시리즈를 통한 작가의 제안은 유물론적 사고에 그치지 않는다. 그는 유기적인 자연의 현상을 빌어 세 번째 단계의 메타포를 만들어 내고 있다. 욕망의 메타포가 그것이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얼음덩어리는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욕망을 상징한다고 한다. 주변의 조건에 따라 고체로 변해 버린 물이 다시 변화하는 주변의 조건에 의해 액체로 바뀌는 현상이 마치 인간의 내면에 자리한 욕망의 속성과 그 작동 원리를 닮아있다는 것이다. 작가는 얼음이 녹으며 순수한 물로 돌아가는 이치를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과정을 통해 자신의 내면에 고착된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다고 말한다. 예술 행위를 마음 수양의 도구로 삼고 있는 작가의 작업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얼음 덩어리를 섬의 메타포로 이끌어내고 그것을 유기적 존재의 본성을 지닌 물의 속성을 통해 증명해 보이려는 노력의 결실이 현덕식의 유시도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을 통해 내면에 자리잡고 있는 욕망의 본성에 대해 성찰을 시도하려는 것이 작가의 창작 의도로 정리된다. 이 대목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것은 적지 않다. 작가의 작품이 이론적 틀을 만들어 내고 하나의 문화현상으로 자리 잡기 위해서 작가가 걸어온 예술 노정의 얼개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현덕식은 2009년 대학원을 졸업한 이후 물과 얼음의 조형을 섬 이미지로 나타내면서 동시에 인간의 모습을 주제로 그림을 그려왔다. 2018년에서 2022년까지 매년 개최했던 다섯 차례(8회-12회)의 개인전에 붙인 주제인 ‘뚜벅이’에서 볼 수 있듯이 그의 오랜 관심사는 인간의 모습이었다. 시기적으로 이른 2012년에서 2017년까지 여섯 차례의 개인전이 ‘유시도’라는 제명의 그림을 고집해 왔던 점을 고려하면 인간과 풍경이라는 두 주제는 작가가 10년 이상 천착해 온 연구 과제였음을 알 수 있다. 뚜벅이 시리즈는 유시도 시리즈와 소재와 조형 방식에서 큰 차이를 보여준다. 뚜벅이는 작가가 만든 캐릭터로서 자신의 소신대로 자신의 길을 꿋꿋이 걸어가는 인물이다. 작가는 고대의 석상이나 목조 장승을 연상케 하는 단순한 형태의 인물로 신뢰와 연대의 공동체를 꿈꾸는 오늘을 기록해 놓았다고 작품 제작의 소신을 밝히고 있다. 

이상에서 보듯 유시도 시리즈와 뚜벅이 시리즈는 현덕식의 예술세계에 일관되게 흐르는 자연과 인간의 본성에 대한 관심의 결실이라는 점에서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자연과 인간의 본성이란 한시도 머물지 않고 항상 변화하는 존재들의 속성을 말한다. 또한 자연과 인간 모두는 110여 개의 원소로 짜여진 집합체이며 이 원소들이 시간 속에 모이고 흩어지며 우주를 이루는 이치라 할 수도 있다. 물이 액체와 고체와 기체의 모습으로 태를 달리하지만 본성은 두 개의 수소와 하나의 산소 원소가 결합된 구조물이라는 점을 물리학자들은 오래전 밝혀 내었다. 놀라운 것은 탄소(C), 수소(H), 산소(O), 질소(N)라는 4개의 원소가 우주 만물의 약 95%를 이루는 원소라는 것이다. 현대 양자물리학자들의 이러한 분석은 선불교의 구도자들이 말하는 나는 책이고 책은 나무이며 나무는 구름이라는 철학적 언어를 과학적 사실로 증명하고 있다. 우주 혹은 대자연은 4개의 원소를 기본으로 짜여진 유기적 세계이며 주어진 조건과 시간에 의해 모습을 달리할 뿐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치는 내가 닭이나 시금치를 먹으면 내가 닭이 되고 시금치가 되는 사연과 다르지 않다. 

현덕식의 유시도는 ‘녹아서 흐르는 섬’의 메시지를 품고 있지만 메타포의 과정을 거치며 시간 속에 변화하는 유기적인 자연과 생명의 원리를 나타내며, 궁극적으로 인간의 생각에 자리잡고 있는 본능으로서 욕망의 세계에 대한 성찰과 자성을 요구하고 있다. 앞으로 그의 예술 행보가 동시대의 이슈들인 생명 생태 환경 그리고 자연의 개념을 어떻게 과학과 철학의 맥락에서 수용하고 그에 부합하는 조형 방식과 재료로 실험을 계속해 나갈지 사뭇 기대가 크다.

2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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