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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속 길과 연인들

박영택

인생은 흔히 길에 비유되는데 그 길을 홀로 걸어가기도 하지만 실은 사랑하는 이와 함께 간다. 혼자 가는 길은 그만큼 외롭기 때문이겠지만 그보다도 사람으로 태어나 또 다른 생을 만들고 이어준다는 철리 속에서 반려자는 요구된다. 그러니 생은 혼자서 이루기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래서 남녀는 항상 짝을 찾아 헤매다 드디어 부부의 연을 맺고 그 후로 둘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길을 만들어나간다. 그 길이 어떤 길일지 아는 이는 누구도 없다. 그들조차도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주어진 길을 남녀는 고군분투해가며 갈 것이다. 서로가 사랑하고 때로는 상처를 주고 더러 헤어지거나 죽음이 닥칠 때까지 갈 것이다. 그 길이 너무 아득하고 난감하고 더러 행복할 수도 있겠지만 누구도 그 길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결코 없다. 남녀가 함께 만들어나가는 그 길은 과연 무엇일까?    

풍속화가로 유명한 조선시대 김홍도의 <신행>(종이에 담채, 27×22.7cm)이란 그림이다. 남녀가 부부의 인연을 맺으러 가는 첫길이다. 이른바 혼례를 치르러 가는 역사적인 순간이자 그 여정인 것이다. 단원 김홍도는 영조 21년(1745)에 김해 김씨 중인 집안에서 출생했다. 10대 때 안산에서 유명한 문인화가 강세황과 문학가 이용휴의 가르침을 받음으로써 문예 전반의 교양을 쌓았고 이를 바탕으로 21세 때 도화서 화원이 되었다. 이후 정조(1752-1800,재위1777-1800) 재위 이십사 년간을 거쳐 순조 6년 1806년까지 이 땅에 살았다. 그가 살았던 세상은 대체로 태평했고 나라 살림도 넉넉했으며 흔히 조선후기의 문예부흥기라고 일컬어진다. 그가 살았던 세월이 좋았으므로 그림에 낙천적인 분위기가 떠돌고 무엇보다도 조선 문화에 대한 자긍심이 보인다. 특히 정조는 그를 총애해서 숱한 그림을 남기게 했다. 당시의 조선은 조선의 정체성을 다지기 위한 문화논리 등 전반적인 평화가 유지되는 가운데 문화 각 방면에서 조선의 고유색이 더욱 두드러진 시기였다. 그 시대를 살았던 단원의 (풍)속화는 당시 조선 사회의 생생한 증거다. 단원은 산수며 꽃, 새, 동물, 풍속화, 고사인물, 신선, 초상화는 물론 불화에서 삽화까지 온갖 종류의 그림을 다 잘 그린 화성이었다. 나라에서 으뜸가는 화가요 글씨도 대단히 잘 썼으며 문학면에서도 뛰어났고 더욱이 대금이며 거문고를 잘하여 음악가로도 이름이 났으니 이른바 시. 글씨. 그림. 음악 등 여러 방면에서 교양이 풍부한 화원이었다. 이 <신행>은 그가 그린 속화집의 한 장면이다. 신랑이 초행을 간다. 혼사가 치러질 신부 집을 향하는 것이다. 대례청이 차려지고 상견례를 올리게 될 처가를 향한다. 혼사에서 신랑이 가는 초행길은 그 의미가 남다르다. 한 사람이 살아갈 인생 가운데서도 가장 중요한 첫걸음, 첫 길이기에 그렇다. 그 길로 해서 비로소 그 나머지 길들이 열리게 때문이다. 그러니 얼마나 중요한 길인가? 신랑은 신부 집으로 향하기 전에 관례를 올린다. 일종이 성인식이다. 상투를 튼 것은 비로소 성인이 되었음을 알리는 상징이다. 상투는 남자 성기의 은유적 형상이다. 축복을 받으며 집을 나서는 신랑은 나귀 등에 몸을 올린다. 인도꾼이 앞장을 서고 함께 길을 떠나는 몇몇이 동반한다. 모퉁이를 돌아 신부 집에 가까이 온 것 같다. 그림 속 인물들이 너무도 생생해서 수 백년 전 조선 사람들이 내 앞에 환생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단원의 이 풍속화는 단지 신행장면을 기록하는 차원에서 벗어나 인간으로 태어나 피할 수없는 혼례의 길의 의미를 새삼 생각하게 해준다. 

한가한 고궁에서 데이트를 즐기는 남녀의 모습이다. 연인인지 혹은 부부인지 알 수는 없다. 낙엽이 스산하게 떨어지는 고궁의 길을 남녀가 걸어오고 있다. 저 뒤편으로 몇몇의 사내들이 지나가고 이들은 그들을 뒤로하고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앞으로 걸어오고 있다. 태양빛이 이들이 걷는 길을 환하게 밝힌다. 발아래로는 낙엽들이 뒹군다. 도상봉의 <비원풍경>(캔버스에 유채, 1973)이란 그림이다. 도상봉은 그만의 독특한 화풍으로 흐릿하고 희박하지만 묘한 분위기로 자욱한 풍경을 선사한다. 그는 한국 구상화의 대표 작가다. 캔버스 천의 고운 결을 살려가면서, 그 천의 결속으로 스며들 듯 고르게 물감을 퍼져나가게 하는 기법을 구사하는데 그러자 이제 막 흰 캔버스 천위에 붓이 지나간 듯한 가벼운 진동이 일어난다. 도상봉 특유의 붓질이고 기법이다. 잔잔하게 피워가는 터치로 인해 일어나는 색채의 광휘는 마치 빛에 의해 파득거리는 것처럼 전 화면을 뒤덮고 있다. 이 같은 터치의 분할적인 묘법과 거기서 일어나는  색조의 효과음은 도상봉만의 스타일이고 매너다. 잔잔하게 다독거린 터치와 그윽하면서 감미로운 색채 효과가 어우러져 사랑하는 남녀의 행복한 동행을 무척이나 서정적으로 감싸고 있다. 이들은 오랜 역사를 지닌 고궁에서 데이트를 하며 앞으로 함께 할 길을 떠올릴 것이다. 그 길을 동반하고자 간절히 기원할지도 모르겠다. 아득한 옛왕조의 흔적이 서린 곳에서 영원을 기약하며 유한한 생애를 지우고자 한다. 덧없는 사랑의 서약을 아득한 시간의 자취 앞에서 불멸로 삼고 싶은 것이다.  

휴일이 되면 연인이나 가족들은 공원을 찾는다. 그곳에서 즐거운 한때를 보내며 추억을 만들고 자신들의 현재의 행복한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고자 한다. 아니 그러기위해 연기를 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인효진의 이 사진은 휴일날 일산호수공원을 찾은 연인들이 보내는 여유로운 모습을 촬영한 것이다. 작가는 휴일이면 어김없이 몰려드는 연인들과 그들이 그 공원의 풀밭이나 산책길에서 만들어내는 다양한 포즈에 주목했다. 흥미롭게 관찰했다. (<파라다이스 섬>, 디지털프린트, 120×80cm, 2001) 작가는 일산호수공원을 찾은 사람들의 행동을 멀찍이 떨어져 흥미롭게 관찰하면서 이를 사진에 담았다. 사진은 호수공원에 모여든 사람들의 행동양식을 관찰, 기록한 일종의 보고서 같은 사진이 되었다. 사람들은 왜, 무엇 때문에 공원을 찾을까? 그곳에 나 있는 산책길을 걷고 벤치에 앉고 풀밭에 누워 무슨 생각을 할까? 그들은 진정으로 행복할까? 그곳에서 왜 저런 행동을 하며 무엇을 보상받고 싶어 할까, 어떤 기대와 환상에 잠기는 것일까? 그곳에 모인 이들은 가족, 연인들이다. 서로 낯선 이들처럼 그들은 둘씩, 혹은 서너 명씩 모여서 자신들만의 시간에 몰입하고 있다. 호수 쪽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거나 어깨를 감싸고 앉아 있거나 풀밭에 누워 있고 더러는 입맞춤을 하고 더러는 사진을 찍는데 하염없다. 이 사진 속에는 두 연인이 서로의 육체에 탐닉되어 몰입된 체 둘 만의 시간을 보내고 있다. 다른 이들에게는 철저히 무심하다. 지나는 아이가 의아한 표정으로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서로의 몸을 밀착시키고 영원히 떨어질 수 없다는 듯이 붙어있는 것이다. 대낮, 수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공원에서 벌어지는 이 행태(?)는 민망하지만 한편으로는 너무 간절해 보인다. 주중의 바쁜 시간에 자주 만나지 못했던 이들이 휴일을 맞아 이렇게 ‘꼬옥’ 붙어서 친밀한 시간, 사랑의 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이 사진은 공원 안에서 실시간으로 벌어지는 보편적인 일들, 그 만화경을 담은 사진이다. 그들에게 이곳은 일종의 낙원이자 현실의 끝이며 일상의 경계인냥 자리한다. 그래서 그곳에서 연인들은 그에 걸 맞는 행동을 연출하고 있어 보인다. 어쩌면 낙원에 와서 산다면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는 듯 하다. 지상에서의 유한한 생애 속에서 덧없이 영원한 사랑을 맹세하며 아름다운 인공의 풍경을 배경으로 저렇게 몸을 밀착시킨 체 휴일의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어딘지 쓸쓸한 풍경이다. 

지극히 무심해 보이는 이 풍경은 평범한 서울의 모습이다. (김상우, <귀로>, 캔버스에 유채, 112× 162.2cm,2011) 높게 솟은 건물들과 늘어선 전봇대, 어지러운 전선줄, 밀집된 건물에 매달린 간판과 이제 막 불을 밝힌 네온들이 반짝이고 있다. 하단에는 어둑해진 어둠 속에서 나무와 주차된 차, 지나는 남녀 두 명이 눈에 띈다. 역광을 받아 아스라이 번지는 빛 속에서 이 공간에 있는 모든 사물들은 어딘지 적막하고 느리게 가라앉는 듯하다. 낮에는 서로 엉켜서 잘 가늠되지 않는 간판들이 이제 조금씩 사위어가는 어둠 속에서 빛을 내면서 환하게 달려든다. 나는 바로 이 시간대의 풍경을 기억한다. 아직 완전히 어두워지기 직전, 태양이 사라지면서 마지막으로 뿜어내는 그 빛에 의해 적셔진 세계의 풍경은 황홀하다. 오로지 그 시간의 풍경만이 아름답다. 그 짧은 순간에 세상이 자아내는 색채는 모든 언어와 문자, 이미지를 무력하게 만든다. 동시에 그 시간은 사람들에게 드디어 오늘 하루가 지워지고 있음을 초조하게 알린다. 이제 어둠이 들이닥치기 직전의 이상한 고요를 안겨주는 일몰의 순간을 작가는 표현하고 있다. 언덕을 내려오는 이 남녀는 연인으로 보인다. 그들은 하루의 일과를 끝내고 함께 퇴근을 하는 길인지도 모르겠다. 혹은 자신들만의 오붓한 밤시간을 보내기 위해 어디론가 길을 떠난다. 그런데 그 모습이 얼핏 저 뒤편 경사진 언덕 아래에 자리한 삶의 격전지에서 지친 하루를 보내고 무사히 귀환하는 생존자들 혹은 마지막으로 살아남은 인간의 모습을 암시해주는 듯하다. 이들이 살고 잇는 도시는 아름답다기보다는 인공의 구조물이 폭력적으로 들어찬 곳이며 인간이 자신의 삶의 욕망과 편리에 의해 가설한 비정한 자본의 무대임을 보여준다. 쭉쭉 치솟은 전봇대와 건물들 바로 아래에 잘린 두 인물은 그들이 매일같이 겪어내야 하는 도시에서의 일상이 만만치 않은 무게임을 보여준다. 이들 위로 펼쳐진 풍경이 너무 어둡고 무겁다. 그림 중심의 하단에 바짝 붙어서 걸어가고 있는 두 남녀는 아름다울 것도 없고 결코 낭만적이지도 않은 그러나 매일의 일상이 전개되는 이 공간을 반복적으로 오갈 것이다. 저 언덕을 넘어서 일터로 나갈 것이고 다시 언덕을 넘어 집으로 귀가할 것이다. 그런 매일매일의 발걸음 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도 같다. 이들 연인의 구두 뒷굽이 아스팔트 위를 문지르며 누르고 있는 압력이 느껴질 것도 같다. 너무 평범하고 익숙한 장소가 홀연 그림으로 다시 환생하는 순간 우리는 이 공간, 장소와 시간을 다시 생각해본다. 잠시 상념의 시간을 갖고 자신의 삶과 그 삶이 전개되는 공간을 곰곰이 반추해 본다. 그리고 이 도시공간에서 살아가는 남녀의 삶이 무엇인지를 곰곰이 생각해본다. 그들이 걸어가는 저 길의 의미를 새삼 떠올려 보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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