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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주 / 사라지는 것들, 사리지지 못하는 것들

박영택

회화란 주어진 사각형의 평면에 색을 입히고 형을 얹히는 일이다. 색채와 형상이란 불가피한 개입이다. 그것 없이는 그림은 이루어지기 어렵다. 색이 칠해지지 않은, 형상/붓질이 부재하는 빈 캔버스 자체도 즉물적인 오브제로서 자리할 수 있겠지만 그러나 그것은 회화가 아닌 사물, 조각이 되어버린다. 그러니 회화가 회화이기 위해서는 최소한 색과 물리적인 흔적이 올려져야 한다. 이 개입을 어떻게 할 것인가는 현대미술에서 무척 중요한 문제다. 물감을 고르게 펴 발라서 평평한 화면을 만들거나 캔버스 천 사이로 묽은 물감을 삼투시켜 균질한 화면을 만든다거나 들거나 색을 지닌 물감의 질료성, 물성을 극대화한다거나 하는 여러 시도는 20세기 초 이래로 추상미술가들이 시도한 여러 궤적이었다. 외부세계를 지시하는 구체적인 대상을 지우고 깊이를 배제하고 오로지 납작한 화면과 물감을 통해 회화를 이루려는 그 같은 시도는 이후 즉물적인 사물로 귀결되는 미니멀리즘에 와서 숨을 멈췄다. 그러나 추상이 무의미하거나 더 이상의 가능성이 없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지나치게 평면성의 논리로만 회화를 제한시킨 데서 벗어나 추상의 여러 가능성을 좀 더 심도 있게 다루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한다. 

김현주는 직사각형의 캔버스 표면에 여러 겹의 색을 올린다. 부드럽고 연한 액체성의 물감/색은 평평한 표면을 애무하듯이 흐르고 스며들다 응고되었다. 화면에 특정 색이 어떤 상태로 올라가고 나면 그 위로 다시 또 다른 물감/색이 올라간다. 어두운 색에서 점차 밝은 색으로 조금씩, 느리게 이동하면서 막을 형상하고 두께를 이룬다, 그림은 이처럼 물질적이다. 회화는 물질의 상태를 얼려놓아 보여준다. 끈적거리는 점성의 물감이 기름과 뒤섞여 찰진 물성으로 납작한 표면을 새로운 피부로 성형하는 일이 회화다. 작가는 주어진 사각형의 캔버스 피부에 파스텔 톤의 연한 색채들을 반복해서 칠하고 덮었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표현하는 동시에 그 표현성 자체를 무화시키는 이중적인, 모순적인 행위이다. 그리기와 칠하기는 동의어다. 무로 돌아가고 죄다 사라져버린다는 것은 이른바 죽음, 상실의 은유로 다가온다. 작가의 화면은 순간 모든 것이 사라지는 듯한 형국을 안긴다. 갑자기 눈이 머는 듯한 느낌이다. 그것은 무엇인가를 보여주기 보다는 차라리 사리지고 없어져 버리는 안타까운 순간을 목도케 한다. 사라진다는 것은 모든 존재의 숙명이다. 우리는 사라지기 직전까지의 위태롭고 알 수 없는 모호한 목숨을 지니고 살아간다. 지상의 모든 생명체나 존재들은 결국 먼지나 가루가 되어 저렇게 소멸할 것이다. 회화 역시 내 눈에 비추는 이 순간 살아있지만 언젠가 저 회화도 무로 돌아갈 것이다. 목에 잠긴 목소리로 “사라지지마”라고 외치고 싶지만, 우리는 안다. 사라지지 않는 것은 없다는 사실을...

구체적인 형태를 갖춘 꼴을 만들지 않더라도 물감/색채를 화면에 바르는 일은 그 자체로 충분히 회화적 행위다. 작가가 화면 위에 반복해서 특정한 물감을 얹히는 일은 이른바 모종의 ‘상태’를 지향하는 일이다. 그것은 언어와 문자가 결코 서지 못하는 자리에서 다만 감각적으로만 체득되는 것이다. 문자화될 수 없고 또렷하게 형상화할 수 없는 것들이라 대신 색채와 물감의 질료로서만 얼추 가능한, 아니 그에 근접한 상황을 풍경처럼 보여줄 수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작가는 미묘한 감정의 층, 모종의 분위기, 혹은 어떤 상황을 그리고자, 표현하고자 한다. 그것은 이른바 ‘아우라’라고 말해도 무방하다. 그 막연한 것을 시각화하기 위해 작가는 칠하고 덮고 지우고 그린다. 한 번으로 그치지 못하고 무수히 반복해서 자신의 몸과 신경들이 집중해서 평면 위를 감각적으로 횡단한다. 김현주에게 있어 회화는 평면의 화면위에서 물감의 상태로 지향되는, 정신적이고 감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내는 일련의 시도가 된다. 

작가는 캔버스를 수평과 동일하게 위치시킨 후 그 위로 물감을 칠한다. 수평으로 위치시킨 화면은 그만큼 평면성을 의식하게 하는 한편 중력의 법칙을 실감나게 받는다. 물감의 흐름과 상태는 그로부터 연유한다. 그러니까 수평의 상태에서 칠하고 올리면 물감들은 캔버스 측면, 네 면의 모서리쪽으로 몰려서 흐른다. 그것은 정면을 칠하고 덮어나가는 과정에서 우연히 생겨난 자취다. 정면이 필연적인 과정에서 연유한다면 나머지 면들은 우발적이고 자연적으로 만들어진 회화다. 정면이 계획적으로 조율된 편이라면 측면은 카오스적이고 비자발적인 상황에서 만들어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다른 두 개의 세계가 회면에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하나이다. 작가는 더러 기울기를 동원해 물감의 흐름과 유출, 응고를 조율한다. 그 경사각에 따라 물감의 속도가 규정되면서 하단에 가늘고 미묘한 선들이 만들어진다. 기울기를 주면 물감은 아래를 향해 비처럼 흘러내리고 흐르다 멈추고 응고된 자취가 섬세한 요철효과와 선, 물줄기 같은 흔적을 안기는 것이다. 그것은 물감이 화면 하단으로 흐르다 멈춰선 순간이고 중력이 개입하고 있음을 몸으로 증거 하는 상처이자 이미지가 된다. 마치 흐르는 눈물 같고 빗물 같고 어른거리는 지난 추억의 잔상과도 같다. 그 사이로 밑 색들이 얼핏 드러나면서 화면은 마치 깊이 있는 공간으로 다가온다. 지나간 시간의 여정을 고스란히 반추시키고 회상시키는 영역이다. 마치 발이 처진 사이로 내부를 들여다보듯이 물감 층으로 덮힌 안쪽을 응시하게 한다. 그런데 작가는 캔버스를 나무에 받치고 물감을 흘리다보니 그림이 진행되는 과정 중에 그 나무에 물감들이 쌓이고 얼룩져있음을 발견했다. 공사장이나 주변에서 사용되는 각목을 주어다 받침으로 활용하다가 문득 그 나무에 쌓인 물감의 얼룩, 작업의 시간과 과정이 고스란히 묻어있음에 주목했다. 더구나 캔버스에 석고를 사용해 두드러진 물성을 강조하는 작업을 하다보면 석고물이 흐르고 굳은 자취가 물감과 뒤섞여 무척이나 매혹적인 질료로 가득 차게 되는 모습에 매료된 작가는 그 나무를 화면 상단에 부착했다. 화면은 작가의 행위의 결과로 가득하고 상단에 얹혀진 나무는 그 그림이 진행되던 과정, 시간을 고스란히 저장하고 있는 오브제가 되어 함께 하고 있는 것이다. 생각해보니 김현주의 회화는 시간과 밀접한 연관이 있어 보인다. 주어진 화면에 반복해서 물감의 층을 올리면서 시간의 궤적을 물질화하고 동시에 그 시간의 결과로 생겨난 여러 흔적을 동시에 껴안고 가는 것이다. 지난 시간은 어느덧 불명료해지고 모호하고 사라지지지만 한편으로는 그 시간이 남긴 상처는 어딘가에 상처처럼 불현듯 자리하고 있다. 모든 게 죄다 사라지고 결국 무로 돌아가지만 한때 간절히 존재했었던 것들의 강렬한 존재감은 흔적 속에서 불멸의 꿈을 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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