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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현 / 점과 선이 이룬 회화

박영택

독일의 대문호 괴테는 문학 장르뿐만이 아니라 색채에 대한 연구로도 유명하다. 그가 1810년에 출간한 <색채론>은 이전의 시각문화에 관해 상당히 도발적인 논의를 내포하고 있다. 괴테는 강한 빛을 보고 난 후 남는 망막의 잔상과 그 색채변화에 주목하면서 이는 ‘시각현상이란 것이 정신의 영역이 아니라 신체의 영역과 관련’ 있음을 은연중 드러낸다. 이는 결국 미술에서 눈이란 신체의 일부로 독립되어 존재한다고 믿었던 데서 벗어나 결국 몸이 보고 반응한다는 자명한 사실을 깨우쳐주었다. 그로인해 20세기 현대미술은 이제 몸에 속하고 정신에 지배받지 않는 자율적인 시각을 제시하는 쪽으로 풀려나가게 된다. 그러니 세계를 재현한다는 것은 내 눈이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라는 개별적이며 유일한 몸의 신체작용에 의한 것이 된다. 이제 미술은 ‘자율적 시각’을 문제시하는 한편 그림을 이루는 존재론적 조건들을 실험하는 차원으로 이동한다. 추상미술이란 실은 시각이 받아들이는 조형적 요소로서만 그림을 감상하는 것을 지칭한다. 그것을 흔히 ‘순수한 시각’(그린버그)이라고 부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회화는 주제나 묘사 등이 아니라 색과 선, 면들로 이루어진 조형적 요소가 판단과 감상의 기준이 되었다. 

남정현의 그림은 추상인 셈이다. 선과 선, 색과 색, 붓질과 붓질의 순간적이고 즉각적인 만남, 조응이 우선되는 그림이다. 특별한 대상이나 이야기는 사실 부재하고 오로지 회화적인 시각경험만이 자리한 그림이다. 특정한 색채를 화면 전체에 균질하게 도포한 후 그 위에 유사한 색상의 물감이 묻은 납작한 붓 터치를 남긴 흔적만이 가득하다. 비교적 얇게 아크릴물감을 붓 끝에 묻힌 후 화면에 갖다 대고 떼어낸 자취들이다. 점dots들의 행렬이자 시간과 속도의 추이를 반영하는 한편 화면(피부)에 밀착된 작가의 신체적 몸짓을 기록하고 있다. 정처 없이 화면 가득 산포되고 투명하게 겹쳐지면서 얇은 막을 형성하기도 한다. 이 단순한 행위는 미술/그림이 사각형의 평면 안에서 물감과 붓질로 이루어지는 조형의 체계임을 새삼 확인시켜준다. 동시에 색채와 물감의 질료, 그리고 작가의 순수한 행위만을 인식시켜준다. 반면 그것은 시간의 흐름과 신체의 떨림, 반응 또한 암시한다. 사각형의 화면 안에서 작업을 하는 동안 무엇보다도 작가는 그림의 표면을 애무하고 쓰다듬는다. 그 밖을 나갈 수 없으니 갇힌 사각형의 공간 안에서 이루어지는 일이 그림의 일이다. 그것은 또한 깊이가 부재한 오로지 표면뿐이고 안으로 들어갈 수없는 절박한 피부인데 다만 그 피부는 색채와 그 색채와의 관계 아래 표면을 난반사시키는 이른바 네가티브화 하는 시각적 놀이에 관여한다. 해서 묘한 일루젼을 동반한다. 아울러 몽실거리면서 흩어지는 붓질은 숲이나 수면, 별이나 생명체 등을 연상시킨다. 농도의 차이에 따라 그것들을 풍부한 표정을 짓고 있다. 작은 붓질의 단위들, 점에 유사한 것들은 그 자체로 자족적인 세계이자 동시에 무한히 확장되고 연쇄되어 나가는 복수화 된 존재들이기도 하다. 개별적인 붓질, 점이 모여 무한한 공간을 창출하거나 우주풍경. 또는 미시적인 존재를 암시한다. 어떤 이야기들을 만드는 매개로 작동하는 것이다.    

또 다른 작품은 순간적으로 붓질을 감행한 선 작업이다. 수평으로 자리한 캔버스 표면위에  마치 실타래나 꽈배기형상을 한 붓질이 올려져있다. 즉흥적이고 직관적인 이 자취는 숨가뿐 일획의 속도감과 묽은 물감의 농도에 따른 번짐과 겹침, 응고의 효과를 산뜻하게 안겨준다. 무척이나 회화적인 맛이 감각적으로 올려져있다. 물론 그 선은 구체적인 외부대상을 재현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보는 이들에게 자유로운 연상이나 미적 경험을 야기한다. 이 점이 주관에 의해 지배받지 않는 순수한 시각적 경험을 주장했던 모더니즘과는 조금 다른 지점이다. 이 자발적인 드로잉, 붓질은 여전히 화면구성이나 무게중심. 여백과의 관계 등을 면밀히 조율하는 다소 ‘까다로운 즉흥성’에서 나온다. 모필의 탄성과 물의 농담, 중력 등이 얽혀 만든 매력적인 풍경이다. 나로서는 이 선 작업이 흥미로웠다. 캔버스의 표면을 순식간에 쓸고 지나가면서 그 피부위에 물감/붓의 궤적을 올려놓았는데 시간의 경과에 따라 응고된 그 자취가 우연성과 자연법칙의 작용을 받아 마무리되는 과정이 다분히 ‘자연스러운’ 그림을 생성시켰다. 이 자연성은 한국 전통미술의 한 성격이기도 하고 그 전통을 환생시켜 서구 현대미술과의 접목을 통해 독자적인 한국 현대미술을 만들어 내려했던 깊은 역사와 조우시키는 편이다. 생각해보니 작가는 캔버스를 세우거나 눕히고 붓을 찍거나 그어가면서 ‘점과 선’을 만들고 있다. 순수한 붓질, 붓의 놀림, 표정이 그림의 주제가 되었다. 회화의 기본적인 요소들을 이용해 순수한 시각적 경험을 야기하면서도 착시적인 효과를 동반하고 나아가 작은 붓질/점의 단위들로 인해 모종의 내용을 연상시키는 동시에 거의 자동기술적인 붓놀림으로 인한 모필의 맛과 그 수묵에 유사한 농담변화로 인해 이루어진 자연스러운 그림의 매력을 동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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