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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동삼 / 사물의 이해, 사물의 상상

박영택

서구의 근대는 타자들과의 만남을 촉진시켰고 이국적인 풍경에 대한 동경과 낯선 문화에 대한 호기심과 두려움을 심어주었다. 이른바 오리엔탈리즘이란 것 역시 그 양가적 감정을 지닌 개념이다. 근대에 들어와 이른바 여행과 모험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당연히 발달한 과학기술과 교통수단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였다. 그때부터 ‘여행’이란 문화가 본격적으로 촉진되었고 일상 속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근대적 도시생활과 임금노동자들의 삶은 주말과 여가, 휴가와 여행이란 것이 필수적인 것이 되었다. 일요일이면 가까운 야외에서 피크닉을 즐기거나 휴가철에는 비교적 먼 거리로 여행을 떠나는 일이 일상이 되었고 그것이 근대인으로서의 덕목에 가까운 것이 되었다. 여행을 가기위해서는 가방이란 것이 필요하다. 이전부터 물건을 담는 도구들은 있었지만 근대의 여행문화는 여행용 가방의 발명을 촉진시켰다. 우리가 잘 아는 루이뷔똥 역시 당시 여행용 가방으로부터 출발했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집을 나서면 늘 가방 하나를 들거나 매고 다닌다. 학생부터 직장인, 일반인들이 모두 가방을 필요로 한다.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물건들을 담는 그릇인 동시에 잠시 어디론가 방랑과 유랑을 가능하게 해주는 도구가 가방이다. 비교적 장기간의 여행을 떠날 경우 커다란 가방에 앞으로 닥칠 여정과 그곳에서 반드시 필요하다고 여겨지는 품목들을 예상해서 담는다. 여행은 가방으로부터 시작되고 가방에 의존해 흥분되고 불안하기도 한 여정을 꾸리는 것이다. 

박동삼은 오랜 외국생활과 잦은 공항출입으로 인한 경험을 떠올리면서 여행자들과 그들이 가방에 주목했다. 공항터미널의 출발 Depature이라 쓰인 문 쪽으로 한 손에는 여권과 다른 손으로는 가방을 끌며 들어가는 여행객들의 모습을 떠올려 가방을 이미지화했다. 아니 가방과 수하물로 부치는 종이박스(사과박스 등) 등을 재현했다. 그가 가방과 종이박스를 빌어 말하고 싶은 것은 가방에 담긴 무수한 사연과 그 가방과 짐을 부치는 이들의 여행과 연루된 각각의 감정들에 대한 궁금증이었다. 사실 누군가의 가방은 늘 궁금하기 이를 데 없는 공간이고 그 공간은 한 개인의 내밀하고 사적인 삶을 간직하고 있다. 공항터미널이란 공간과 수많은 여행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방과 짐은 이별과 만남, 낯선 곳으로의 이주 등 저마다 다양한 내용을 간직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는 그 헤아릴 수 없는 개별적인 사연과 감정을 가방과 종이박스를 통해 암시하고 있다. 보는 이로 하여금 유추하게 한다. 그런데 작가가 가방과 종이박스를 재현하는 방법론이 특이하다. 그는 실제 가방과 종이박스에 ‘scotch 313’ 투명 테이프를 여러 겹 부착해서 떠낸다. 이른바 캐스팅 기법으로 실제 사물의 피부를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는 것이다. 원본의 피부에 달라붙어 마치 사물의 허물인양 투명한 스카치테이프, 이른바 유리테이프만으로 이루어진 가방과 종이박스를 제시한다.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이 연약하고 가볍고 낯선 가방과 박스는 내부를 차단시키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가방과 박스의 기능 자체를 갑자기 무화시켜버렸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가방, 가방으로서의 가능성을 상실한 의사가방이다. 간혹 여름철에 사람들이 들고 다니는 비닐로 만들어진 투명한 가방을 연상시지만 이 가방은 사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이해하고 있는 가방이란 사물과는 무척 다른 존재다. 

유리테이프를 여러 겹 발라서 두께를 만들고 조심스럽게 그 피부에 붙어 부풀어 오르면서 독립되어 떨어져 나온 자취다. 그것이 가방과 종이박스의 형태를, 외양을 고스란히 재현하고 있다. 흥미로운 판화/조각적 기법이다. 캐스팅기법의 확장된 차원이자 가장 원초적인 대상의 재현술에 가깝다. 테이프로 드로잉을 하거나 주어진 화면을 덮어나가면서 회화를 만들거나 벽면에 부착되어나가면서 벽화처럼 보여주는 작업, 혹은 실제 공간의 갈라진 벽면이나 깨진 창 등을 봉합해나가면서 치유적 의미를 선보이는 여러 작업을 접했지만 테이프 자체로 이렇게 실제 사물을 캐스팅하는 작업은 새롭고 낯설다. 그리고 재미있다. 투명한 유리테이프는 일정한 면적을 지닌 직사각형 꼴이다. 긴 띠와 같은 그 테이프의 길이를 조절해 실제 사물의 피부를 감아나가면서 물리적인 두께를 만드는 과정은 시간의 경과, 노동의 흔적과 함께 내·외부 모두한 눈에 보여준다. 여행용 가방과 종이박스의 내부를 훤히 들여다보면서 그 가방과 짐에 담긴 여러 사연들의 속내를 마음껏 들어다보는 듯한 감정에 사로잡힌다. 그것은 은연중 관음증의 유혹을 자극한다. 볼 수 없었던 것을 보게 해준다는 마술 같은 일이다. 동시에 가죽이나 천, 종이로 이루어진 가방과 박스가 갑자기 투명한 테이프로 돌변 하는 순간 우리는 기존에 사물에 대해 알고 있던, 갖고 있던 지식과 감정이 붕괴되는 체험을 갖는다. 이미 오래 전에 초현실주의자들은 사물에 달라붙는 익숙하고 기계적인 감각과 피상적인 이해를 무력화시키는 일련의 작업을 통해 사물을 그 자체로 다시 인식하게 해주었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단지 그 사물에 이름을 지어준 명명성의 체계 또는 제한된 감각이나 고정관념, 혹은 그 사물의 기능성에 따른 이해의 정도일 것이다. 그것은 매우 인간중심적인 사유의 결과다. 그러나 사물은 인간에 의해 만들어지고 주어진 기능을 실행하면서도 이미 그것 자체로 낯선 존재가 되어 현존하다. 더불어 사물을 스스로 발화하는 존재다. 우리가 사물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별로 없어 보인다. 

박동삼의 작업은 익숙한 사물의 재질을 낯설게 만들어 보이고 인간에 의해 규정된 모든 명명성과 기능성의 체계를 또한 지워버린다. 기본적으로 '사물에 부여된 물질적 특성과 기능적 속성, 완성된 고유의 기호'를 망실시킨다. 그로인해 사물 자체를 자유롭게 상상하게 하며 그 사물의 존재를 새삼스럽게 인식하게 해준다. 그것은 익숙함과 상투적으로 길들여진 세계에 구멍을 해는 일이다. 그런데 그것이 바로 미술의 일이기도 하다. 생각해보면 그의 작업은 항상 그러한 맥락에서 이루어졌다. 자신의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에서 연유한 문제를 주제로 끌어올리고 아울러 이를 흥미로운 판화적 공정 내지는 확장된 캐스팅 기법에 의해 공간에 설치화 되거나 이미지 재현과 관련된 흥미 있는 질문을 던지면서 전개되었다. 개별적인 작품 하나하나에 머물지 않고 그것이 복수로 연결되어 확산된다거나 사물, 존재의 피부에 붙어서 떠내는 이른바 프로타쥬적인 기법의 색다른 시도, 현실에 저장 잡힌 인간존재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나 환상이란 메시지를 반복해서 유지하면서도 매번 소재와 재료를 달리해서 색다른 시각적 오브제, 이미지로 제시하고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세계와 사물들의 존재를 질문하고 그것을 자유롭게 상상하고자 한다. 그 사물에 들러붙은 모든 상투적이고 기계적인 기의를 떼어내고 그것 자체와 대면하고자 한다. 날것으로서의 사물이자 명명서의 그물에 사로잡히지 않은 사물의 민낯을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것은 결국 진정한 주체의 시선으로 세계를 만나고자 하는 열망에 다름아니다. 바로 예술가의 시선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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