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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상건 / 스테인드글래스, 유리와 빛의 세계

박영택

애초에 이미지는 단단한 벽면에서, 그 견고한 바탕위에 시간을 축적시키면서 이루어졌다. 특정한 공간에 저당 잡히고 누적된 시간의 층위에 반복해서 겹쳐졌던 것이다. 어두컴컴한 동굴의 내부 벽에 서식했던 이미지들은 분명 인공의 불빛에 의존해 서서히 살아났을 것이고 그것은 더 이상 환영, 그림이 아니었다. 그 장면은 보는 이들에게 생명체가 하나씩 탄생하는 체험을 안겨주었고 자신에게 실감나게 다가오는 환영 또한 강렬하게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분명 선사시대인들은 불빛에 의해 드러나는 이미지와 실제를 동일시했을 것이다. 더구나 흔들리는 불빛에 의해 벽의 주름에 그려졌던 이미지들은 마구 일렁이면서, 흔들리고 질주하고 사라지기를 반복하면서 놀라운 눈속임, 엄청난 환영감을 자극했으리라. 빛, 조명에 의해 이미지는 비로소 이미지가 되고 환영이 되고 보는 이에게 상상력과 영감을 준다. 
그래서 이미지는 무엇보다도 빛과 관련되어 있다. 이미지가 이미지로 자존하기 위해 빛은 불가피하다. 아니 인간의 시지각이란 결국 빛으로 인해 가능한 일이기에 본다는 것, 망막의 가능성은 빛으로 서는 일이다. 빛을 모아두는 일, 빛을 신성시하는 것, 빛의 우상화, 그리고 빛으로 충만한 세계를 구현하는 일은 모든 문화와 예술의 중요한 영역이기도 하다. 특히 빛을 절대적인 존재로 숭배하는 것이 종교의 일이었다. 그러니까 신은 빛으로 주재하시고 비시각적 존재로 망막 앞에서 번지고 퍼져나간다. 무엇보다도 태양빛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근원이고 그 빛은 시간의 추이에 따른 다양한 색상, 빛의 양을 던져주어 색채를 수시로 변화시켜왔다. 우리가 아름다움이나 미적인 지각을 체험하는 것은 결국 빛의 작용 때문이기도 하다. 이처럼 빛, 태양은 형과 색을 비로소 판독가능하게 해주는 결정적인 그 무엇이다. 그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끌어들이고 받아들이는 장르가 바로 스테인드글래스, 유리미술이다. 이 오래된 연원을 지닌 미술은 오늘날에도 새로운 몸으로 거듭 환생한다. 

투명하고 견고한 유리의 표면에 환상적인 색채를 얹혀 빛으로 투과시키는 이 장르는 숭고한 종교건축물 내부를 빛으로 물들이는 데 있어 핵심적인 수단이었다. 빛으로 채우는 일은 성령을 충만하게 하는 일이자 보이지 않는 신을 내 가까이에서 느끼기 위한 의도이다. 한정된 내부를 온통 적시고 충만하게 채워나가는 비물질적인 빛, 색채를 제공하는 스테인드글래스는 대부분 성당 등에서만 접할 수 있지만 더러 갤러리 공간으로 들어오기도 한다. 주어진 건축물 내부에 기생하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회화, 평면으로 자리하기도 하고 실용적인 접시, 기물로 등장하기도 하는 것이다. 국내 스테인드글래스 작업의 대표적 작가인 장상건은 소규모의 스테인드글래스를 전시공간으로 끌어들이고 그 활용성과 감상성을 일상적 삶의 공간에 편재시키는 작업을 시도한다. 그는 유리의 표면에 색을 삽입시키고 그 투명한 화면, 무한한 깊이를 지닌 평면을 색채의 조각으로 결합하고 분절시키면서 균형과 조화의 세계를 보여주는가 하면 빛을 받아 그 색의 황홀한 파장들이 공간 전체로 퍼져나가면서 만들어내는 얼룩, 번짐의 흔적들을 아름답게 안겨준다. 그것은 단지 주어진 화면의 피부에서 이루어지는 회화가 아니라 바라보는 이의 몸 전체를 감싸고 영향을 끼치고 빛으로 적시면서 관여한다. 망막에만 호소하는 게 아니라 감각 전체를 건드리는 작업이고 주어진 공간과 몸의 관계성을 고려하는 작업이다. 

사람의 호흡에 의해 만들어진 이 '인간적인' 유리에 색을 입히고, 그 색채끼리의 관계와 장력, 힘과 강도를 계산해서 이루어진 유리조각들은 굵고 촉각적인 납 선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 선이 사각형의 화면을 기이하게 분절하고 색과 색을 구분해준다. 색의 영역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그려진다. 이 납 선은 마치 유리의 표면에 드로잉을 하듯 미끄러진다. 납 선은 작은 색 조각들을 모자이크화해서 흡사 색 보자기처럼 제시한다. 따라서 납 선은 그림을 그려 보이는가 하면 색과 색을 구획하고 동시에 그 색채들끼리의 힘과 관계를 적절히 배분하고 모아주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명도와 채도가 정밀하게 고려되고 계산된 결과이기도 하다. 화려하고 신비스러운 빛을 발산하는 색채유리 사이로 무채색의, 중성적인 납 색의 줄, 선이 섬세하게 고려되어 유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우리가 보는 것은 투명한 유리의 표면을 투과해 벽으로 가 닿은 얼룩들, 환한 그림자들이다. 그것은 어둡고 무의미한 공간이 아니라 밝고 아름답고 신비스러운 기운으로 환하게 번져나가, 유의미한 장이다. 시선을 관통시킨 색채의 막은 종국에 막다른 벽에 자신의 실체를 장엄하게 드리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빛으로 그려진 벽화이자 물리적인 실체를 지니지 않은 비물질적 존재이고 그래서 실은 부재하는 것이다. 결국 부재하는 것이 실제하는 것을 넘어서는 힘을 발휘하고 있음을 우리는 깨닫게 된다. 그래서 스테인드글래스는 다분히 영성적이고 종교적이며 신비한 체험과 연관된다. 성당의 각 방위에 설치된 창/스테인드글래스는 각기 그 방향으로 들어와 시간의 추이에 따라 변하며 기울어가는 태양의 빛을 끝까지 받아내면서 그 빛/색을 깊고 길게 드리우기 위한 장치다. 그것이 축소되어 전시장 공간으로 들어와 벽면을 물들이고 있는 것이 장상건의 스테인드글래스 작업이다. 작가는 그것을 더욱 잘게 나눠 실용적인 접시로도 만들었다. 매혹적인 유리라는 물질, 그리고 그 유리에 스미는 황홀한 색채(유약), 아울러 그것이 빛을 받아 자신의 물리적인 한계를 훌쩍 벗어나 비상하는 추이를 감동적으로 안겨주는 이 작업은 스테인드글래스가 단지 종교 건축물의 내부를 장식하거나 유리 공예라는 차원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기존 회화를 넘어서는 새로운 비전으로 충만하다는 점을 새삼 상기시켜주고 있다. 그것은 망막중심주의나 물리적인 대상의 연출로 제한되는 미술을 확장시켜 비물질적이고 정신적인 차원으로 또는 빛과 그림자와 공간 전체를 진동시키는 기이한 힘으로 가득한 그런 미술을 매혹적으로 안겨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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