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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선 / 정지된 순간들

박영택

그림은 주어진 화면에 붓질을 통해 물감을 도포하는일이다. 그로부터 형태와 색채, 질감이 가시화된다. 아니 새로운 피부가 환생한다. 그러니 회화란 결국 새로운 피부, 껍질의 대체에 다름아니다. 그러나 익숙하고 관습적인 붓질을 외면할수도 있다. 워홀이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영감과 에너지, 자의식에찬 붓질을 대신해 기계적이고 무표정한 표면을 선호한 이유를 생각해보라. 그것은 주체나 개성, 차이를 통한 붓질의 향연을 뒤로 하고 그것에 기반 한 미술을 냉소하며 차라리 기계와 같은, 무표정한 자신의 얼굴과도 같은 표면을 추구하려는 의도였을 것이다. 그는인쇄된 이미지나 영상, 사진과 유사한 표면을 추구했다. 한개인의 몸짓을 반영하고 있는 붓질의 언어를 납작하게 문질러버리고 매끈한 피부로 도포된 화면을 제시하였다. 그리고새로운 감수성과 강력하고도 색다른 이미지체험을 안겨주었다. 사실 동시대 삶을 지배하고 있는 대부분의이미지들은 차갑고 냉정한 표면, 피부를 지니고 있다. 건축과사물, 인간의 피부 역시 그런 인조의 내음이 가득하다. 그리고우리들은 그에 길들여져 있다. 단순하고 미끌거리는 표면과 차가운 질감,세련되고 심플한 물성은 소비사회가 요구하는 감각이다. 상품미학적 감각!



서지선의 화면은 탈색된 듯한 중성적 색채, 무광의 피부, 단호하고 미끈한 표면으로 대체되어 있다. 부드러우면서도 초점을 상실하게하는, 표면에 붙어서 사라질 것만 같은 색채들은 인공의 피부를 보여준다. 밀폐된 장소, 정지된 듯한 시간과 적당한 소음, 그리고 바깥과 격리되어 있는 카페나 바, 패스트푸드점이 그려져 있다. 젊은이들이 즐겨 찾는 장소이자 대부분의 시간을 보내는 곳이다. 집을나와 카페에서 누군가를 만나거나 혹은 홀로 앉아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거나 컴퓨터를 다루는 이들로 가득하다. 커피잔과 술병, 테이블, 인공의 조명과 유리창이 있고 혼자 혹은여럿의 사람들이 자리한 풍경이다. 작가는 바로 그곳에서 본 순간의 장면을 영원히 정지시켜 놓았다. 분절된 색 면과 온화한 파스텔 톤의 색채와 파편화된 물감의 면들이 콜라주 되어 응고된 것이다. 그것은 기존의 붓질로 이루어진 일반적인 그림과 무척 다르다. 분명붓질을 통해 만든 그림이지만 흡사 실크스크린처럼 기계적이고 매끈하다. 형상의 내부를 인위적으로 분절시켜색 면으로 마감한 것이고 그것으로 형태와 그림자, 원근을 모두 해결하고 있다. 색을 지닌 물질들을 조합해서-마치 퍼즐놀이처럼-이룬 그림이다. 그리기보다는 다분히 조각적이고 오랜 수공의 시간이스며들어있어서 손의 흔적은 지워졌지만 역설적으로 더 많은 손을 요구하는 그림이다.

 

작가는 카페에서 보낸 어느 한 때를 기억한다. 관찰자가 되어 지인들/익명의 존재들의 몸짓과 행동을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생각에 잠겼다. 비근한일상의 한 순간을 영원히 고정시키고자 했다. 작은 카메라를 꺼내 저장하고 이를 활용해 그림을 그렸다. 사진은 지난 시간을 떠올려주는 매개이미지다. 그 사진 속의 장면을환기하면서 다시 그림으로 재구성했다. 의도적으로 흑백사진을 활용한 작가는 색채가 사라진 그 이미지를통해 당시의 상황을 상상하고 자의적으로 색채를 삽입한다. 분명 구체적인 장소의 재현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벗어나 상상과 추상이 작동한다. 실재의 재현이지만 실은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 첨삭, 재구성, 추상이동시에 공존한다. 회화와 그래픽, 디자인이 또한 함께 숨쉰다. 그를 통해 작가는 다시 한 때의 일상을 더듬어 유희한다. 지난시간, 죽은 상황을 재구성해 자신의 내면과 의식 속에 고정시킨다. 어쩌면우리가 세계를, 타자를 내 안으로 불러들이는 일은 그것밖에는 가능하지 않아 보인다. 덧없는 일상의 시간은 죄다 사라져버리고 결국 남는 것은 희미해진 잔상, 희박한색감들, 아련하고 쓸쓸한 마음과 고독하고 슬픈 감정들뿐이다. 우리는매순간 죽는다. 그 단호한 죽음과 사라짐에 맞서는 절박한 행위는 기억/추억이나이미지다. 작가는 일상의 한 순간을 밀착된 물감의 살과 견고하면서도 차가운 질감, 이내 휘발될 듯한 색상으로 감싼다. 바탕색이 결정되면 그 색감에맞추어 모든 색채들은 조율된다. 동일한 톤과 분위기를 유지하면서 화면은 전체적으로 고독하고 쓸쓸한 느낌을자아낸다. 아마도 이는 작가의 성향과 기질에 잇대어있다는 인상이지만 한편으로는 이 현대소비사회가 심어준불가피한 정서이기도 하다.



도시에서의 삶은 익명의 대중들과의 빈번한 표피적 마주침, 그러나 이내의미 없는 흩어짐으로, 서로가 서로에게 보여 지고 미끄러지기를 반복하게 한다. 도시에서 산다는 것은 그런 무수한 익명의 존재들과의 찰나적인 만남과 그로 인한 여러 체험과 상념을 마냥 부풀려준다. 도시인들은 다들 저마다 고독한 산책자가 되어 도시공간을 부유한다. 작가는그곳에서 자신을 찌르는 이미지를 찾는다. 기억한다. 그것은늘 보던 익숙한 장면이지만 동시에 우리 삶의 어떤 느낌이 강렬하게 응축된 장면이다. 바로 그 장면을찾아 화면에 옮겼다. 순간적으로 스쳐 지나가는, 명멸하는그 유동하는 이미지의 파편들을 잠시 정지(pause)시킨 상태로, 그단면을 들여다보고 있다. 이 정지된 이미지는 마치 정신분석학자가 인간의 무의식을 드러내듯이 '시간적 무의식'을 포착하고 있다.작가는 이렇게 비근한 일상의 한 장면을 순간 부동의 것으로 세워 버림으로써 그저 속절없이 사라지고 흩어지고 무료하게 지나쳐버리는 일상을기념비적으로 만들었다. 그로인해 우리는 무심히 흘려보내버렸을 일상의 한 장면을 비로소 오랫동안 응시하게되었다. 저 공간에 놓인 인간들의 생애와 그들의 꿈과 희망과 슬픔에 대해 상념에 잠겨본다. 소멸될 수밖에 없는 이 허망한 인생, 시시각각 사라지는 하루치의일상에 대한 생각은 분명 서글픈 것이다. 작가는 이 유한한 생애와 한정된 공간에서 생을 소모하는 지인들의육체를 통해, 그들의 불가능해 보이는 꿈을 상기해보면서 그림을 만들고 있다. 여전히 '회화적인 그림'이지만동시에 무척이나 낯설고도 차가운 그림으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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