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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가 되고 문맥이 된 레디메이드 / 이희상

박영택

언어가 되고 문맥이 된 레디메이드



미술인들은 본래 수집가들이다. 수렵시대의 DNA가 여전히 강력한 영향을 미치는 이들이다. 당시 겨울이 되면 식량조달이 어려워서 수컷은 다가오는 겨울을 대비하여 되도록 많은 식량을 미리 포획하고 가능한 많은 음식을 저장하고자 했는데 이러한 수컷의 역할이 혈관 깊숙이 흘러 지금도 남자들은 물건을 모으고 저장한다는 학설이다. 작가들은 자신이 살고 있는 현실계에서 의미 있는 것들을 응시하고 사유하는 이들이다. 눈으로 보는 세계에서 문득 다가와 박힌 것들, 가슴을 찌르고 알 수 없는 매혹으로 덮친 것들, 자신의 삶에서 유의미한 의미망으로 절여진 것들을 공들여 다루고자 하는 이들이다. 그렇게 의미 있는 물건, 아름다운 것들을 수집하고 그로부터 작업의 영감을 얻기도 한다. 결국 작업이란 그렇게 수집한 것들을 재현하거나 차용, 번안하는 것이기도 하다. 작가들의 작업실을 가보면 그들이 수집하고 있는 다양한 사물들을 자주 접한다. 그것은 단지 수집의 대상이기 이전에 작품의 소재이고 주제가 된다. 나아가 작품을 가능하게 하는 물적 존재들이다. 이러한 경향은 특히 20세기 들어와 오브제미학을 통해 그리고 산업사회의 물적 풍요로움과 소비사회로 접어들면서 더욱 두드러졌다. 팝아트가 이를 잘 반영하고 있다. 그것은 사물을 사랑하는 데서 파생된다. 자연 대신에 사물과 상품, 레디메이드오브제가 오늘날 미술의 주된 경향이 된 것도 새삼스럽지 않다. 그리고 이는 소비사회의 진행속도와 과거와의 급속한 단절의 강도에 비례하고 있다.


이희상의 작업실에는 작가가 오랫동안 수집해 온 빈티지한 벽시계가 여럿 자리하고 있었다. 복고풍디자인이나 골동품 소품 등을 지칭하는 빈티지란 용어는 원래 포도주가 만들어진 연도를 의미하다 이후 오래되어 좋은 것이라는 의미로 확장되어 쓰이고 있다. 꽤 오랜 시간이 지난 유럽의 벽시계들인데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것들이다. 오래된 골동품이지만 지금 봐도 매력적인 디자인과 정교한 기술, 탄탄한 내구성이 감탄을 자아낸다. 작가는 그러한 시계에 매료되어 이를 수집해오고 있다고 한다. 이 빈티지한 벽시계는 작가에게 뛰어난 디자인을 간직한 매력적인 미술품, 미적 대상 그리고 자체 에너지로 작동되는 그 생명력으로 인해 흡사 살아있는 존재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기계를 자신과 동등한 하나의 생명체로 바라보고 이를 새로운 존재로 제시하고자 한다. 그렇게 시계는 단지 시간을 지시하는 도구나 물리적인 기계에 머물지 않고 그것 자체로 매혹적인 미술품이자 생명체가 되었다. 그는 오랜 시간이 지난 작동을 멈춘 벽시계를 손 보고 가다듬어 환생시켰다. 시게의 내부와 그 안을 채운 정밀한 부품들을 통해, 작동원리를 통해 작은 우주를 접했다. 특히 태엽을 감아서 자체 동력으로 살아가며 시간을 알리는, 이른바 '흔들이 운동'으로 이루어진 벽시계의 메커니즘이 작가에게는 더없이 신비하고 흥미로웠던 것 같다. 그는 이 복고풍이 시계로 부터 작업의 아이디어를 얻었다. 결국 작가가 수집한 이 빈티지한 유럽의 벽시계가 작업의 동인이 되었다. 그 사물이 유의미한 존재가 되었던 것이다. 


'수집을 통해 수집된 물건으로부터 자신이 지금 무엇을 원하는지 깨닫고 생각의 방향성을 얻는 일이 종종 있다. 사람은 스스로 목적을 알 수 없는 단순한 호기심에서 물건을 수집하기 시작하지만, 수집한 물건은 언젠가 언어가 되고 문맥이 되어 사람을 지혜로운 길로 이끈다. 자신도 분명히 알 수 없는 어떤 호기심이 지혜의 결정체가 되어 간다.' (나가야마 야스오)


이희상의 작업은 전적으로 수집된 물건들로 이루어졌다. 벽시계와 열쇠, 사진과 헤라로 이루어졌다. 그것들의 반복적인 배열과 관계망이 공간에 가설되었다. 그것이 모종의 문맥을 형성하고 시각적 효과를 발산하고 있다. 


우선 얼굴이 시계이고 몸체는 나무토막으로 구성된 조각이 서 있다. 일정한 단위의 나무토막들을 집적시켜 이룬 조각은 흡사 기계부품이나 픽셀이미지에 유사하다. 앞을 향해 질주하는 동작을 연출하고 있는 이 나무인형은 일상생활에 쫓기는 현대인의 초상이자 목표만을 보고 달려가는 동시대인들의 은유에 해당한다. 동시에 시계와 나무로 생명체를 모방하고 있기도 하다. 그 앞에는 역시 똑같은 나무로 제작된 말의 형상이 놓여있다. 이것 역시 나무로 이루어진 생명체다. 이른바 물활론적 상상력이랄까, 범신론적 관점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와 함께 벽시계를 작동시키는 데 쓰이는 키를 복제해서 여러 개 배열했다. 간결하면서도 매력적인 디자인을 지닌 이 키는 흥미로운 오브제가 되어 벽에 걸렸는데 그것은 열고 닫는 수단, 나아가 소통, 작동(생존과 생명)을 가능하게 하는 의미를 부여 받는다. 이 키들은 모택동이나 오드리 헵번의 초상사진 사이에 배치되기도 한다. 복제가 되어 반복적으로 늘어선 스타이자 우상의 이미지와 키의 연결고리는 여러 상상력을 자극한다. 


그 다음으로 작가는 건설 현장이나 인테리어시공사장에서 주로 쓰이는 헤라(주걱)를 수집했다. 이 도구는 공공미술에 종사해 왔던 작가가 수시로 쓰던 도구, 연장이었다. 페인트 뚜껑을 열거나 물감을 배합하는데 주로 쓰이는 도구는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다양한 물감의 색, 질료의 더께, 침잠 속에서 흡사 추상회화와 같은 표면을 자연스럽게 만들어주었다. 그 이미지는 의도적으로 만들거나 계획된 것이 아니라 일의 과정 속에서 우연히 만들어진 흔적이다. 오랜 시간의 자취가 얹혀지면서 생성된 매혹적인 자취가 되었다. 그것은 발견된 회화이자 오브제회화이기도 하다. 작가는 그 헤라를 벽면에 나란히 배열하고 그 사이에 포맥스 위에 부착시킨 오드리 헵번의 사진을 놓았다. 사랑스럽고 아름다운 대상과 추상회화가 되어버린 헤라(미술작품)는 동일한 맥락에서 작가에게 아름다운 이미지다. 하나는 사진이미지이자 또 다른 하나는 사물이다. 회화/사진이자 오브제가 충돌하고 한 공간에 나란히 연결구조와 맥락을 가지면서 연루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이들 작업은 한결같이 벽화적 성격이 강하다. 디자인과 인테리어적 감수성도 묻어있다. 공공미술에 종사해온 작가의 성향이 자신의 수집품과 삶에서 건져 올린 의미 있는 물건의 발견 속에서 새로운 차원으로 전개되는 징후가 엿보이고 있는 것이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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