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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지영 / 차이를 발생시키는 회화

박영택

차이를 발생시키는 회화



고지영의 회화는 안개에 갇혀있다. 안개는 대상을 지우고 덮어나가다가 조금씩 출몰시킨다. 그것은 완전한 무(부재)도 아니며 그렇다고 온전한 것도 아니다. 지시성과 은폐 사이에 머뭇거리는 회화, 가시성과 비가시성 사이를 오가는 회화다. 그린 듯 그리지 않은 그림이자 구상과 기하학적 추상회화 사이에 머뭇거리며 형상과 색 면 추상의 틈에 마지못해 서식하는 그림이다. 모종의 경계를 넘나들고 흔드는 회화, 질료와 형상, 붓질과 색채 사이에서 진동하는 그런 그림이다. 화면 안에는 분명 시각에 호소하는 '형상'이 있다. 그것은 외부세계에 실재하는 대상이나 사물이 아니라 그림을 그리기 위해 끌어들인, 그림을 충족시켜나가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생긴 흔적이자 이른바 기호에 해당한다. 집이나 건축물, 혹은 정물이라 부를 만한 것을 상기시켜주는 저 기호는 적막함과 고독감 속에 펼쳐져 있다. 최소한의 단서처럼, 희미한 기미처럼 놓여 있거나 혹은 미완과 혼돈, 비결정의 상태에 머문다. 흡사 산수화의 점경인물이나 초옥 같은 도상에 유사해 보인다. 그것은 실재의 재현이 아니라 정신적 활력을 자극하기 위한 매개에 해당한다. 그 기호들이 머리와 가슴 안에서 기억, 상상력, 감정을 유발한다. 모종의 서사적 문맥을 기술한다. 바르트는 어떤 개념에 의해서도 매개되지 않음으로써 그것의 정체를 탐색하도록 마음을 자극하는 것, 나를 끌어당기거나 상처를 주는 어떤 세부를 '풍툼(punctum)이라 부른다. 그것은 일종의 감각적 기호에 해당한다. 감각적 기호는 우리의 기억력을 동원하고 영혼을 움직이게 한다. 들뢰즈 식으로 말하면 '감성에 대한 고문'을 해댄다. 명명성의 체계를 거부하고 현실계를 지시하는 동일성의 그물에서 빠져나가는 고지영의 그림 속의 기호들도 보는 이의 감성을 미묘하게 자극한다. 헐벗고 무의미해보이고 희박한 이 감각적 기호는 개념 없는, 미지의 형상이다. 저 무명의 이미지가 우리의 기억을 자극하고 상상력을 압박한다.



캔버스에 유채_90.5×116.8cm_2014


고지영은 조각, 파편들로 그림을 그린다. 사각형(화면)에서 파생한 형태들이자 사물을 순수 기하학으로 환원해 놓은 몇 가지 구조들이 배열을 이루어 그림을 만들어간다. 마치 퍼즐놀이를 하듯, 우연의 개입과 순간적인 사건의 발생을 통해 그림그리기는 연장된다. 작가의 개입을 최소화하면서 작품이 '스스로' 말하게 하며 따라서 납작한 평면과 물감, 붓질이 스스로 발화하게 한다. 따라서 이 그림은 작가라는 주체를 뒤로 물러서게 한다. 그로인해 유기적 만족감은 거부되며 주제나 완성이란 개념도 실은 무의미해 보인다. 그림은 미리 선행하는 전체성에 귀속되지도 않고, 잃어버린 어떤 동일성 자체에 근원을 두고 있지 않는 조각들과 관련되어 있다. 작품은 이 '조각난 부스러기들을 가지고 움직이는 것'이다. 그 파편들이 서로 모여 모종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집을 떠올려주는 희박한 사각형의 형상은 다시 박스, 책, 벽, 색 면으로 순환한다. 매우 적은 가짓수의 색, 미묘한 색상과 음영의 차이들은 가까스로 형태감을 인지시킨다. 사실 이 그림은 전적으로 색채와 구성의 율동감, 빛에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인 그림이다. 어쩌면 그림은 그저 그리는 것, 그것 자체일 수 있다. 납작한 평면 위에 물감과 붓질, 색채를 가지고 무목적 적으로 유희하고 다만 붓질, 색채, 선과 면의 미세한 차이를 연쇄적으로 벌려나가는 것, 그 차이의 놀이를 반복하고 지연시키는 것이 그림이 된다.


잿빛에 유사한 색상으로 칠해진 화면, 침묵과 먼지를 뒤집어쓴 듯한 이 풍경은 시간을 가늠할 수 없고 계절의 변화나 특정 풍경을 연상시키는 구체적 단서는 모조리 사상되어 있다. 그것을 구체적으로 무엇이라 부르기는 곤란하다. 애매하고 불명료한 형상 앞에서 시선들은 무너진다. 이 그림은 그 무엇 같으면서도 결코 그것과 동일시되지 않는 전략에서 나온다. 부득이 형상을 빌어 드러나지만 그것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집과 길, 하늘이 연상되지만 사실 그것은 색을 칠하고 붓질을 하기 위해 끌어들인 매개에 불과하다. 이 막막한 기호들, 파편들이모여 그림을 형성한다. 희박한 색채를 칠하고 불명료한 형상을 보여주면서 그림 자체를 다시 보게 한다. 우리가 보는 것은 전적으로 시각적이고 이름을 지을 수 없는, 우리의 개념 밖으로 달아나는 색채와 형상을 드러내는 '이상한' 그리기이다. 사실 그것이 그림이다.


사각형 조각들은 하나, 혹은 두 개, 세 개 씩 조화를 이룬다. 마치 책을 옆으로 세워놓은 것도 같고 종이박스를 놓아둔 것도 같다. 그 내부를 채운 붓질들은 조심스레 떨고 있다. 작가 신체의 지각, 감각의 예민한 결들을 보여주며 진동한다. 탈색되어 사라진, 망실되고 소멸된 기억의 잔해들처럼 그림은 희뿌옇다. 기억은 부재하면서도 현재의 시간으로 살아 돌아오는 유령 같은 존재다. 기억의 이미지는 현실계의 형상들을 부정하거나 흔든다. 지금 이곳의 풍경, 사물의 존재를 무의미하게 만들고 환영으로 만든다. 죽은 시간의 이미지들처럼 저 탈색되고 납작한 흔적들은 먼 거리에서 조망되어 흔들린다. 원경에 자리한 구조물들은 집처럼, 풍경처럼 늘어서 있을 뿐이다. 수평의 화면 하단과 일치하면서 바닥/거리는 펼쳐지고 상대적으로 넓게 자리한 하늘은 땅과 대비를 이루며 칠해져있다. 땅이 밝으면 하늘은 어둡게, 하늘이 밝으면 땅은 어둡게 칠하는 식이다. 그 사이에 끼여 있는 집, 건물을 연상시키는 사각형 구조물들 역시 약간씩 다른 방향, 다른 색채, 다른 톤으로 지탱되어 있다. 결국 이 그림은 그 미세한 차이를 통해서 서로가 서로에게 관계를 맺고 있다. 저 차이가 없다면 존재는 부재하다. 그러니 고지영의 그림은 미묘한 차이를 가까스로 만들어가면서 존재들 간의 절박한 관계에 대해 말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심미적 감성에 이끌리는 순간만을 세계로 받아들이고 그 그림 그리는 순간순간에 우연으로 획득한 배열, 차이를 통해 그림을 이어간다. 결코 동일할 수 없는 반복을, 닮을 수 없는 차이를, 다름 때문에 같음이 흥미로움을 보여준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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