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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지 / 검은 조약돌에 피어난 씨앗에 대한 기억

박영택

검은 조약돌에 피어난 씨앗에 대한 기억


돌은 산이 쪼개진 것이고 나무는 흙의 결정이다. 모든 풀들은 흙으로부터 발아한다. 그것은 흙이자 식물이다. 그렇게 보면 자연의 모든 것들은 순환과 교호 속에서 몸을 섞고 있다. 무릇 자연계의 모든 것들은 이러한 동일성의 체계 아래 엮여 있다. 이 거대한 순환 구조 속에서 하나의 존재는 무수한 존재를 잉태하고 간직한다. 


기억은 사라지고 부재한 것이지만 작은 실마리를 통해 선명하게 되살아난다. 그러니 기억은 있음과 없음 사이에서 기이하게 서식한다. 불현듯 떠오른 유년의 기억, 식물과 씨앗을 보고 만졌던 시각과 촉각, 혹은 후각 등의 경험이 일사불란하게 지금의 시간위로 덮치면서 무엇인가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스치는 바람과 냄새, 혹은 우연히 조우한 사물을 통해 아득한 지난 시간이 현재의 시간 위로 성큼 올라선다. 이처럼 시간은 여러 차원이 공존하면서 미끄러진다. 또한 먼 여행지에서 접했던 풍경이 느닷없이 지난 시간의 풍경과 겹쳐진다. 그렇게 무수히 조각난 작은 기억들이 퍼즐처럼 모였다 해체되기를 거듭한다. 작가는 그렇게 형성된 상을 하나씩 간직하고 이를 매개로 작업을 했다. 



Seed, 점토에 혼합재료, 33×22×7.5cm, 2014


작가는 씨앗을 부드러운 흙으로, 하나의 단단한 조약돌로 보았다. 그리고 그것으로부터 발아할 식물의 존재를 상상해보았다. 하나의 씨앗에는 무궁한 존재들이 잠복하고 있어서 그것을 보고 만 이들에게 몸을 내민다. 그래서 작가는 흙과 돌, 식물의 이미지를 한데 응고시켰다. 수묵과 돌, 흙이 지닌 어두운 색조가 순지의 표면에서 화석 같은 존재로 응결되었다. 그 안에서 풀들이, 꽃들이 피어난다.


작가의 작업은 돌을 흉내 낸 의사돌을 제작하는 한편 원형의 덩어리를 만들고 이를 탁본하듯 떠낸 흔적위에 이미지를 입히는 작업이다. 돌을 닮은 입체물과 프로타쥬식으로 떠낸 원형의 형상 안에 들어가는 이미지는 풀과 씨앗, 혹은 산수화 등이다. 그 그림들은 실제 돌에서 자연스레 피어난 이미지 같다. 꽃문양이 깃든 화석을 접하는 느낌이다. 도예용 흙과 순지, 먹을 혼합해서 오븐에 구워내 만든 둥글고 넓적한 덩어리는 그대로 깊고 맑은 검정 색을 지닌 검은 돌이 되었다. 납작한 돌이 지닌 평면위로 먹물로 그려진 이미지가 얹혀 진다. 흙에 심겨진 식물과 돌 꽃에 피어난 화석이 되었다. 그것은 착시를 동반하고 물성을 희롱한다. 단단한 검은 돌이 아니라 종이와 흙, 먹으로 만든 가짜 돌이고 아득한 시간이 만든 화석이 아니라 그려진 그림이다. 그러나 이 작업은 최대한 자연에 근접해서 자연의 속성 그대로 이미지를 피워내는 작업으로 다가온다. 둥글고 납작한 작은 돌을 닮은 것들은 다양한 형태를 지닌 채 벽면을 바탕으로 지지대에 의해 서 있다. 그것들은 흡사 수석들처럼 나란히 놓여있다. 돌이자 씨앗이고 흙일 것이다. 또는 지난 시간의 기억의 흔적을 압축해놓은 공간일 것이다. 표면에는 먹으로 그려진 자연이미지가 가득하다. 일정한 거리에서 보면 돌의 피부에 난 자연스런 흔적처럼 보이지만 근접해서 보면 산수가 있고 식물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다. 돌은 흙이자 식물이고 빛나는 씨앗이기도 하다. 씨앗에 대한 기억이 검은 조약돌과 겹쳐져 이룬 작업이다. 

또 다른 작업은 흙을 넓고 둥글게 펴서 밀어냈다. 일정한 원과 두께를 지닌 덩어리가 만들어지면 그 위에 순지를 덮어서 떠낸다. 그 덩어리는 커다란 씨앗을 연상시킨다. 일종의 탁본과유사한 행위로 건져낸 이미지, 흔적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어둡고 둥근 형상 안에 작가는 조심스레 식물이미지를 그려 넣는다. 보잘 것 없는 잡초나 이름 없는 풀들이다. 흙을 밀고 올라오는 가련한 것들이자 싱싱한 생명력을 지닌 것들이다. 다양한 재료를 섞어서 모든 것을 포용하고 받아들이는 태도를 은유하고 가둘 수 없는 비정형의 자유로운 틀에서 나온 ‘묵직한 존재감’을 만들고 있으며 수묵의 검은 색조로 침잠 된 형태 안에 식물을 그려 넣으면서 자연의 생태와 순환 구조를 반복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회화적 연출, 그리기에서 감각적 힘이 요구된다. 

차현지의 작업은 조각과 회화, 판화적 기법이 공존하고 다양한 물질을 구사하고 있다. 지난 한 시간과 노동이 깃들며 모든 과정이 고스란히 작업 안에서 숨을 쉬며 보여 진다. 나로서는 이 재료체험이 흥미로웠다. 여전히 동양화의 전통적 재료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지만 독특한 색감과 질감, 물성의 활용과 그것을 적극적인 회화의 장으로 변이시키는 지점이 그렇다. 이질적이고 불완전한 것들을 혼합해서 씨앗, 원형의 결정을 만들고 그 안에 자연을 삽입하면서 새로운 지각을 발생시키는 물성의 연출과 미시적인 존재에 대한 경외감을 엿보게 하는 이미지 연출도 그러하다. 무엇보다도 다양한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모종의 의미 있는, 충만한 존재를 만드는 한편 돌에서 자연풍경을 발견하고 흙에서 무수한 씨앗을 엿보는 시선과 마음이 의미 있어 보인다. 

■ 박영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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