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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자-시간이 만든 드로잉

박영택

박인자-시간이 만든 드로잉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박인자는 오랜 시간의 힘에 의해 부식된 철의 피부를 수집했다. 이 수집행위는 사진에 의해이루어졌다. 사진에 의해 찍혀지는 대상이란 이미 ‘레디메이드’이기에 촬영이란 애초에 수집적 행위에 해당한다. 작가는 특별히 부식이 된 철의 피부를 간직한 대상을 찾았다. 바닷가에 버려진 폐선, 재활용 하치장, 공사장, 혹은 허름하고 낯선 변두리 어느 곳에 놓인 금속으로 이루어진 것들인데 이는 자연의 변화 속에서 조금씩 부식되어 무너져 내리고 있는 것들이다. 그 변화과정을 치러내는 대상이 굳이 철뿐만은 아닐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사물의 피부는 시간의 지배를 받으면서 격렬하게 소멸하는 과정을 겪어내고 있다. 작가는 그중에서 유독 변화과정이 두드러지고 시간의 흔적이 선명하게 새겨진다고 여겨지는, 철에 깃든 녹/녹물을 수집했다. 시간 속에서 불가피하게 겪은 무수한 상처를 그대로 드러내는 철의 표면은 그 위에 머물렀던 시간의 양과 강도에 따라 저마다 다른 표정을 짓고 있다. 작가는 이를 ‘자연이 만든 드로잉’ 혹은 ‘시간의 드로잉’이라 말한다. 그것은 인간의 개념에 의한, 손으로 그려진 의도된 드로잉이 아니라 우연의 지배를 받은 그림이자 시간과 자연법칙에 따른 우발적인 드로잉이다. 인위성과 작위성을 지운 자리에 계절의 변화와 기후, 온도와 습도 그리고 시간의 추이가 불가피하게 철의 피부에 맺혀져서 만든 특정한 상처, 얼룩이 모종의 풍경 내지는 이미지를 연상시켜주었던 것이다. 인간의 손길이 아니라 자연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자 시간의 입김 아래 형성된 회화로서 신비스럽고 흥미로우며 예기치 못한 우연성의 미학에 의해 길어 올려진 기이한 드로잉이다. 그리고 이는 주어진 사물의 피부에서 무엇인가를 발견한 이의 눈에 의해 재탄생한 이미지다.   

 시간의 흐름과 자연의 기후변화가 아득히 내려앉았고 이로 인해 서서히 녹이 슬고 색이 변하고 종내는 삭아서 사라지는 일련의 과정을 목도 하게 하는 철의 표면은 생성과 소멸의 과정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그것 또한 생명체와 같은 생명의 순환 과정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작가는 부식되어 녹이 슨 철에도 나름 생명이 있다고 본다. 그러니 이 사물도 나이를 먹는다. 닳아 없어지는 것이 결국 사물의 죽음이다. 사라짐은 존재가 겪는 독특한 사건으로 이는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의 불가피한 운명이다. 페인트칠이 벗겨져서 문득 맨살을 보여주는 피부와 독하게 녹이 슬고 녹물이 줄줄 흐르고 있는 표면의 모습을 풍경처럼 보고 있노라면 문득 사물들의 끝과 소멸에 대해 잠시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현재의 삶 속으로 설핏 죽음의 그림자가 들이닥치고 현실계를 이루는 완강한 사물의 배후가 유령처럼 다가오기도 하는 것이다. 그에 따라 비로소 사물의 현상적 측면이 아니라 그 이면, 즉 사물의 본질을 보는 시선에 은연중 접근하게 된다. 모든 실재의 확고한 본질은 결국 공허다. 존재했던 것들은 사라진다. 인간은 그 사라짐을 응시하고 그에 대해 사유하는 거의 유일한 존재다. 작가는 녹이 슨 철의 피부를 보여주지만 궁극적으로는 그 이면에 대해 생각하게 해준다. 녹이 잔뜩 슨 철의 피부는 소멸과 죽음을 그리고 자연의 완강한 법칙과 그 아래에 자리한 존재의 불가피한 운명을 떠올려주는 매개로 작동한다. 

 작가는 녹이 슨 철의 피부를 근접해서 촬영한 후 이를 바탕화면 삼아 다시 그 위에 회화적인 개입을 시도했다. 시간이 만든 드로잉 위에 작가의 인위적인 손길로 만든 또 다른 드로잉을 얹혀놓았다. 매혹적인 레디메이드 오브제를 사진으로 봉인한 후 그 위에 부분적으로 페인팅, 물성적인 연출을 시도한 것이다. 그러니까 캔버스 천에 이미지를 프린트한 후 그 위에 철가루와 물감, 오브제와 바인더 등을 동원해 녹슨 부위를 더욱 강조하고 있다. 사진에 의해 촬영된 녹이 슨 부분을 실제 녹으로 다시 강조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니까 철가루와 소금, 물을 혼합하고 이를 바인더와 섞어 화면에 부착시키면서 녹이 슬고 부식된 어두운 부분에 부착시키면서 납작하고 매끄러운 피부 위에 두툼한 질감과 촉각적인 물성을 개입시킨 것이다. 시각성과 함께 기이한 촉각성을 불러일으키는 이 작업은 사진 이미지를 보다 실제성에 가깝게 연출하는 효과이자 사진과 회화가 지닌 평면성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시도인 동시에 자연이 만든 녹을 인위성에 위해 증폭시켜놓은 환영적인 녹, 시간의 흐름을 의도적으로 모방해놓은 흔적에 해당한다. 

 작가는 시간의 입김에 의해 조금씩 허물어져 가는 철판으로 만든 특정 사물의 외관을 응시하고 그 안에서 존재의 본질인 공허를 보고 죽음과 폐허의 미를 발견한 것 같다. 녹이 잔뜩 슬은 철의 피부는 스스로 자기 삶을 고백한다. 자신이 겪었던 지난 시간의 흔적에 대해, 온갖 상처와 생의 이력에 대해 발설한다. 이처럼 모든 피부는 대책 없는 토로가 드러나 버린 자리다. 이처럼 모든 존재의 표면은 시간에 의해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는 순간을 방증하고 있다. 시간은 그렇게 존재의 피부 위에 다소 잔인하게 서식한다. 
박인자가 다시 보여주는 녹슨 철의 피부는 삶의 주변에서 이미 우연적으로 만들어진 것들을 미적으로, 혹은 자신의 내면을 투사하거나 현실에 대한 반응의 침전물로 받아들여 다루고 있는 오브제가 된다. 무엇보다 시간이 지나면서 녹이 스는 것을 허용하고 그것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는 철의 피부, 그 피부가 자아내는 형언하기 어려운 색채를 지닌 존재가 색다르게 다가온다. 그 존재는 불가사의한 모종의 미적 감각을 견인해 내는 대상이기도 하다. 또한 페인트 칠이 벗겨지고 떨어져 나간 흔적, 녹이 슬고 삭아버리고 희미해진 자취로 가득한 철의 피부는 시간이 만든 ‘추상적’ 흔적으로 자욱하다. 시간에 의해 마모되고 스러져버린 사물, 피부들은 이제 흥미로운 회화, 이른바 비대상적 회화가 되었다. 

 작가는 대상을 왜곡하거나 변형하지 않았다. 주어진 대상을 충실하게 재현했다. 다만 사진에 머물지 않고 그 표면을 조금 더 밀고 나갔다. 사진이란 기계적 이미지에 손작업이란 아날로그 방식이 개입하고 그 둘이 한 표면에서 동거하고 하나로 들러붙어 있다. 따라서 그 피부는 여러 층위의 재현, 가공의 두께를 두르고 있다. 이 사진은 분명 특정 사물, 대상의 기록적 사진이지만 동시에 그로부터 달아난다. 그것은 또한 혼성적 시간으로 가득 차 있다. 맨 처음 촬영한 시간, 그리고 회화적, 입체적 보정을 거친 이후의 것이 같은 표면에 공존하고 있다. 사진만도 아니고 전적으로 회화도 아니다. 기술적 코드로 이루어진 기술적 형상(사진)과 회화적 형상의 결합은 실재를 허구화 하는 일종의 전략에 속한다. 이처럼 그는 사진적 지각과 회화적 지각을 두루 섞는다. 그러니까 작가는 그 둘이 만나 이루는 효과를 적극 시도하고자 한다. 문제는 사진과 그 위에 얹혀지는 회화적 처리, 또는 물질적 연출이 얼마만큼 유의미하게 이루어지며 불가피한 결합이 되느냐 하는 것이다. 회화와 사진 모두를 한 단계 끌어올리는 선에서 어떻게 감각적으로, 완성도 높은 선에서 조율되느냐가 향후 과제가 될 것이라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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