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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광익- 제주 자연에 대한 정서적 체험의 형상화

박영택

백광익- 제주 자연에 대한 정서적 체험의 형상화

박영택(경기대학교 교수, 미술평론가)


 
 대부분의 작가는 자신의 삶의 공간, 환경에서 자유롭지 못한 편이다. 특히나 매혹적이고 경이적인 자연 공간을 삶의 거점으로 삼은 이들의 경우는 더욱 그렇다. 백광익은 제주 토박이 작가다. 당연히 그에게 제주도란 자연환경은 그의 미의식, 심미관, 혹은 그림의 정체성 등을 형성하는 자양분으로 작동했던 것 같다. 이는 분명히 타지역보다는 좀더 의식적인 부분일 것이다. 그런데 이 제주도라는 곳 또한 자연적 환경이자 역사적, 문화적 장소성을 지닌 곳이고 여러 삶의 문맥이 얽힌 곳이기에 작가가 떠올리는 장소에 대한 기억과 그에 대한 체험, 기억은 상당히 복합적일 것이라고 여겨진다. 
백광익의 근작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고 본다. 하나는 광활하게 펼쳐진 하늘 혹은 허공을 배경으로 하고 하단에 작게 위치한 산(오름)이 있는 이른바 풍경 그림이다. 이 풍경은 구체적인 제주도의 자연환경에서 채집했고 선택된 것이겠지만 다분히 관념적인 도상으로, 기호로 번안된 것이다. 거의 색채로만 번안한 추상에 가까운 그림이지만 부분적으로 단순화한 형상들이 잠복해있고 서술에 대한 욕구를 거느리고 있기에 반구상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다른 하나는 화면을 분할 해서 서로 다른 이미지를 그려 넣었는데 한쪽은 간략하게 추려진 도상들과 추상화된 배경이 있고 다른 한 켠에는 개념적으로 그려진 꽃 이미지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다. 아울러 바람에 뒤척이며 우측으로 쏠려있는 큰 나무들, 오름의 형상을 한 지붕을 진 낮은 초가집, 붉은색의 초승달, 좌선을 하고 있는 듯한 인간의 실루엣, 나무에 앉아 있는 새들, 붉은색을 띤 좁고 긴 길의 이미지 등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도상들이다. 이 도상들을 동원해 그가 꿈꾸는 이상적인 세계상이나 마음속에서 가다듬고 가다듬어 이룬 결정 같은 세계의 모형을 가설하고 있다. 작가는 이 도상들을 통해 자신만의 그림을 ‘셋팅’하고 있다. 그것이 주제가 되고 작품의 서사가 되고 또한 자신의 정체성을 이러한 그림을 통해 형성하고자 한다. 여기에는 제주도 작가로서의 소명, 그리고 전통과 현대성의 접목, 추상과 구상 등등 여러 이질적 요소들의 융합도 시도되고 있다.      

 작가의 그림은 자신의 삶의 환경인 제주라는 공간의 이미지이자 그 공간에 대한 인상적인 개념화 작업이자 동시에 그곳에서 자신의 이상적인 생의 자리를 설정하고자 하는 작업인 셈이다. 따라서 이 두 가지 욕망이 작업을 두 개의 길로 갈래 치고 있다. 하나는 제주도의 자연환경에 대한 정서적 체험의 형상화다. 그것은 납작하게 화면 하단에 자리한 대지/오름과 상대적으로 광활하게 자리한 하늘의 대비로 설정된 공간 배치를 시작으로 구성된다. 이 풍경화는 실제 풍경의 단순화 과정을 거치고 여기에 좀더 정서적인 느낌을 배가하고 숭고한 감정을 고양시키는 장치를 통해 이루어진다. 몇 개의 선으로 겹쳐진 산/오름과 그 사이로 난 붉은 길이 단순하게 그려졌다면 상대적으로 광활하게 자리한 하늘은 자잘한 색면으로 쪼개지고 그 작은 면들마다 저마다 다른 색, 붓질 등이 얹혀져서 매우 풍부하고 다채로운 표정을 만들어 내고 있다. 그러니까 캔버스 표면 전체를 격자 무늬로 새겨 놓고 그 사각 면의 내부를 칠해나간 작업이다. 아울러 표면 전체를 작은 삼각형으로 칼 집을 낸 후 물감을 밀어 넣는 작업, 이른바 상감기법에 유사한 작업이며 표면에 물감을 두텁게 입힌 후 그것이 마르기 전에 빗살을 이용하여 건조 시키고 사포와 조각도를 이용하여 정리하기도 한 것이라고 한다. 이를 통해 평면의 화면은 풍성한 질감을 거느리면서 다분히 부조적인 표면을 안겨준다. 이는 비교적 단순하게 기호화한 도상들을 보완하는 의미에서도 동원되고 있다는 인상이다. 피부가 거느린 흥미로운 물성과 그만큼 촉각적인 표면은 섬세한 장식성과 함께 작업의 여러 공정, 그 시간과 노동의 과정이 그대로 작업으로 축적되어 응고되어 밀고 올라온다. 
한편 그 같은 작업은 결코 동일하게 마감되거나 그 내부가 온전히 메꿔지지도 않는다. 전체적으로는 넓게 펼쳐진 단일한 하늘로 보이지만 그 내부는 무수한 변화와 저마다 차이를 발생시키는 격자들로 채워져 있다. 아울러 이 격자는 주어진 캔버스가 납작한 사각형, 격자임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주어진 장방형의 평면으로서의 화면의 조건을 따르면서도 그 내부에서 미세한 차이를 야기하면서 평면성의 논리를 은연중 내파 하고 있다. 이는 결국 작은 격자형의 면들이 어우러져 밤하늘의 별이 되기도 하고 부서지는 빛이 되는가 하면 까마득한 우주의 신비를 머금은 온갖 전설과 신화, 설화의 단어들이 되어 떠돈다. 그렇게 문학적인 요소가 밀고 들어오는 통로가 이 작은 격자형이 되고 있다.  
 하늘을 상대적으로 많이 차지하게 그린 이유가 여기에 있을 것이다. 그것은 제주도라는 섬에서 전해오는 그 무수한 신들, 신들의 이야기, 그리고 신화의 내용이 밤하늘의 별처럼 많다는 것일 것이다. 별들을 작은 격자 칸 하나로, 그리고 그 칸을 채운 붓질과 색 점 하나로 설정해서 보여주었다면 하단에 자리한 낮은 오름은 그 거대한 하늘 아래 작게, 낮게 자리한 제주라는 땅, 삶의 터전을 암시한다. 그리고 그 사이로 난 붉은 길은 그 하늘을 이고 살았던 이들의 생의 고난과 그들의 신산한 생의 굴곡을 암시하는 듯 하다. 

 또 다른 갈래로 나오는 그림은 좀더 구체적인 풍경의 형상화에 해당한다. 또는 자연과 인간의 상황을 은유하는 지도화 작업에 해당한다. 하늘과 달, 나무와 집, 그리고 사람과 새가 있는 풍경이 그런 예다. 물론 그것은 실제의 재현이나 묘사가 아니라 닮음 꼴에 가까운, 단순화한 도상의 꼴로 그려진, 일종의 기호에 가깝다. 그 기호들은 마치 단어처럼 화면에서 모종의 문장을 형성한다. 작가는 이 이미지 단어들의 배치를 달리하면서 그림을 만든다. 제주 자연 속에서 사는 사람들, 나무와 새와 별, 달과 함께 생을 보내는 이들, 그것들이 내는 소리를 듣는 이들, 그리고 나무 밑에서 긴 휴식을 취하고 있는 이의 모습 내지는 이 거대한 자연의 순환 속에서 고요히 좌정하며 명상에 잠긴 듯한 사람의 모습 등은 마치 전통적인 동양화의 인물산수화가 추구했던 이념을 떠올려준다. 나는 무엇보다도 거대한 나무와 그 나무 밑에서 누워 있는 사람을 그린 그림이 흥미로웠다. 콜라주하거나 오려낸 듯이 저부조로 표면에서 올라온 형상의 흥미로운 마감 처리, 그로인해 생겨나는 선의 자리가 인상적이다. 그리고 매력적으로 그려진 나무와 새, 인물의 도상화와 그것들이 어우러져서 이룬 다분히 낭만적이면서도 자연과 인간의 합일 내지는 자연과의 친연성이란 주제를 무척 회화적으로 완성도 높게 그려낸 그림이라는 생각이다. 특정한 주제나 서사를 작위적으로 혹은 도상의 연출에 의한 장식성으로 매만져 풀어내기보다는 지극히 편안하고 자연스러운 조형화로 인한 회화성의 극대화란 것이 더욱 의미가 있다는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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