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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인간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는 사진

박영택

이훈-인간 존재의 의미를 질문하는 사진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이훈의 사진은 잘 짜여진 각본에 의해 연출된 일종의 드라마, 신scene이다. 그것은 자신의 각본에 의해 무용수, 운동선수 등 이른바 전문적으로 훈련된 몸들을 통해 연기된 장면을 촬영한 사진인데, 그러니까 이미 이 사진은 작가에 의해 머릿속에서 상상한 것의 외화인 셈이다. 개념의 설정과 이를 시각적으로 연출한 것으로서의 사진이다. 그러니까 정교하게 프로그래밍 된 것의 객관적인 출력이 그의 사진이다. 이 인풋과 아웃풋의 과정이 꽤나 깔끔하고 명료하다. 다분히 개념적인 사진의 성격이 강하게 검출된다. 사진의 제작 과정상에서의 여러 변수야 있겠지만 가능한 그의 사진은 주어진 각본대로, 시놉시스에 따라 이루어진다. 그에 따라 모델들은 오브제가 되고 개념은 이미지가 되어 인화지에 정착된다.   
이 흑백의 사진은 4개의 테마를 연속적인 장면으로 연결해서 표현한다. ‘두 개의 의식과 두 개의 무의식’, ‘보이지 않는 힘’, ‘유전인자’, ‘환영’ 이렇게 4개의 주제를 각각 젊은 남녀들이 흡사 무용이나 연극, 에어로빅을 하듯이 연기하고 있다. 전경과 후경으로 나뉘고 여러 장면이 혼재되어 겹쳐있기도 하다. 그렇게 이미지의 중첩, 이질적인 시간대가 누적된 층들이 한 화면에서 공존하면서 화면은 모호한 공간이 되었다.  
한편 다분히 철학적인 주제를 시각적으로 연출한다는 것, 그것도 인간의 몸에 의지한 일종의 신체언어로서, 퍼포먼스로서 시연한 후 이를 사진으로 기록하고 있는 작업이다. 그러니 이 사진은 실상 몇 겹의 방법론과 여러 차원의 시각작업이 눌려있다. 특정한 순간을 응고시킨, 찰나적인 시간을 정지시킨 화면은 인간의 몸이 만들어내는 움직임과 그 우아한 동선의 아름다움, 흑백 톤의 미묘한 계조가 자아내는 색채, 몸의 다양한 동작과 여러 표정에서 전이되는 모종의 메시지들이 서로 얽혀서 다가온다.  

 이 작업은 이미 있는 사물의 표면에 달라붙는, 이른바 레디메이드로서의 사진이라기보다는 스스로 연출하고 셋팅 한 장면을 사후에 찍은 것이다. 그것은 존재하지 않았던, 상상으로만 가능했던 것의 현존이자 드러남이고 사진으로 촬영된 순간 이내 사라지는 움직임의 세계, 내면의 감정을 표정화 한다. 개념 속에 자리한 것의 가시화이자 시간의 순서에 따라 진행하면서 모종의 서사, 내러티브를 구성하고 있다. 작품의 제목을 보면 다분히 철학적인 내용을 축으로 하고 있다. 그것은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주의와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관한 담론을 우선적으로 떠올린다. 어찌보면 인간의 본성과 본질에 대한 가장 기본적인 내용인데 이는 작가가 젊은 시절부터 매달린 문제의식이었다고 한다. 인간이란 누구인가, 그리고 인간의 사고와 행동양식은 무엇에 의해 지배되는가 하는 질문일 텐데 아마도 인간이란 존재의 해명과 깊숙이 연관된 이 주제를 그는 사진으로 해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해서 제한된 몇 명의 인원과 흑백사진을 주조로 해서, 스튜디오에서 찍었다. 정답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에 대한 자신의 단상, 느낌을 감각적으로 ‘표현’하고자 했다. 여기서 그의 사진에 대한 일정한 태도와 인식이 드러난다.  
 
 광각으로 펼쳐진 시선과 구도, 그리고 섬세하게 조율된 조명 아래 무용수들의 몸들이 특정한 몸짓으로서의 언어를 드러내면 사진은 이를 기록한다. 여러 시간대가 겹치고 이미지가 포개지면서 의식과 무의식, 실존과 허상, 외면과 내면이라는 경계들이 아롱지는 사진이 연출되고 있다. 첫번째 시리즈는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에 관한 것이다. 4명의 무용수가 의식과 무의식의 터치로부터 시작되며 화합, 사랑, 섹스, 증오를 보여주며 의식과 무의식의 결합, 간섭, 그리고 갈등으로 전개되는 추이, 나아가 무의식의 소멸은 의식의 소멸로 발전한다는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인간의 사회화에 관한 내용이다. 수많은 편견과 관습으로 인해 형성된 자아를 마네킹으로 보여주며 그것이 인간이 되는 일련의 과정을 선보인다. 이 과정에서 마네킹은 해체되고 점차 인간으로 변화되는 데 인간이 된 마네킹의 갈등과 번뇌 속에 보이지 않는 힘을 표현하고자 한다. 세 번째는 인간의 유전자에 관한 것이다. DNA사슬에 들어 있는 인간의 유전자가 신체의 각 부분을 순서적이고도 논리적으로 구성할 때, 인간의 감정과 사고방식도 같이 형성되고, 그래서 유전자가 인간의 사고와 행동 양식을 어떻게 지배하고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네 번째는 자기와 자기, 자기의 자기와 관계하는 관계로서의 자기에 관한 얘기다. 사실상 자아란 자기의 중심이라기보다는 무의식, 관념, 유전자의 힘과 관계하는 관계일 뿐이라는 인식 아래 그 환영으로서의 자기를 장노출로 인해 생긴 무수한 상들이 흔들리고 겹치는 장면으로 보여준다. 

 이훈은 오래 전에 키에르케고르의 책에서 접한 한 구절로부터 지금의 작업이 연원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그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는 책의 한 대목은 다음과 같다. “인간은 정신이다. 그런데 정신이란 무엇인가? 정신은 자기이다. 그러면 자기는 무엇인가? 자기는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며 또는 그 관계 안에서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자기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자신과 관계하는 관계이다. 인간은 무한한 것과 유한한 것의, 시간적인 것과 영원한 것의, 자유와 필연의 종합이며, 간단히 말해서 종합이다. 종합은 그 둘의 관계이며, 이렇게 보건대 인간은 아직 자기가 아니다.”       

주지하다시피 기독교 유신론자인 키에르케고르는 신 앞에서 철저하게 살려고 애를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사람의 실존을 3단계로 나누었는데 심미적, 윤리적, 종교적 단계가 그것이다. 여기서 심미적인 단계는 윤리나 사회적인 규범이 없이 자신의 감성과 쾌락을 따라 살아가는 단계로서 자신이 누구인지, 또는 자신의 존재가 어떠한 존재인지를 도무지 인식 못하는 단계에 속한다. 사람은 육체와 영혼을 가진 존재인데 그 중간 격인 정신이 육체적인 것과 영혼적인 것을 조화롭게 한다고 키에르케고로는 보았다. 또한 그는 더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절망’을 해야 한다고 말한다. 절망이란 ‘이것이 아니다’라는 것을 몸소 아는 것이고 이는 자신의 참 모습을 깨닫고자 하는 일이라고 한다. 이른바 도덕적인 삶이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 종교적인 삶으로 나아간다고 그는 보았다.  
한편 서구철학사에서 키에르케고르는 실존의 발견자로 알려져있다. 실존주의란 실존의 구조와 내용과 본질을 밝히려는 철학 내지 사상을 말한다. 실존주의의 근본 개념, 중심문제는 실존이다.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사상의 핵심적 요소는 주체적 진리다. 남의 진리가 아니라 나의 진리인 주체적 진리만이 나의 생활에 변혁을, 나의 인격에 혁명을 가져 올 수 있다고 그는 말한다. “개별적인 주체로서의 실존은 남과 결코 바꿀 수 없고 남이 결코 대신할 수 없는 유일무이한 귀중한 존재이다. 진실로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또 한 번밖에 없는 개별자는 소중하기 한량없는 단독자이다.” 
따라서 인간 존재를 질문할 때 키에르케고르는 육체가 진정한 자기가 아니고 정신으로서의 자기가 참된 자기이며, 이런 정신으로서의 자기는 종합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에게 실존적 주체가 된다는 것은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이며, 주체적인 것이 진리라는 그의 입장은 종교적인 것이 진리이며, 신앙이 모든 것의 기반과 목적이 된다는 것이다. 자신이 살던 현실 속에서 불가피하게 기인하는 문제의식일 것이다. 그런데 그가 실존이란 말을 쓴 것은 불안과 절망 속에서 ‘나’의 실존 가능성을 의식한다는 것이다. 실존은 내면적인 동시에 현실적 자기임을 의미하며 실존의 핵심은 ‘불안’이다. 인간은 인간이기 때문에 불안을 느낄 수 있으며 인간은 정신적 존재이기 때문에 불안을 느낀다는 것이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인간이면 누구나 절망하며, 그 마음속에 동요, 부조화, 불안 등을 품고 있다고 보았다. 즉 인간은 의식하든 의식하지 않든 간에 절망하는 존재이거나 혹은 절망의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것이다. 실존철학에 있어서의 절망이란 인간이 극한 상황에 처하여 자신의 유한성과 허무성을 자각하였을 때의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키에르케고르는 이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말하고 있다. 키에르케고르에 의하면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지 못할 때 절망하게 된다고 말한다. 절망은 그것을 극복하려고 하지 않고 그 가운데 머물러 있는 사람에게는 ‘죽음에 이르는 병’이지만, 신앙으로서 그것을 극복한 사람에게는 새로운 삶으로 이행되는 계기가 된다. 이처럼 키에르케고르에게 진정한 실존은 종교적 실존이며, 신앙을 갖고 살아가는 실존이다. 그렇지만 여전히 그의 사상이 의미를 지니는 점은 구체적으로 살아가는 단독자로서의 한 개인이 지닌 고유의 가치성을 지닌 것, 지니고 살아야 한다는 것의 자각에서 연유한다. 그래서 키에르케고르는 “단독자 인간이 되는 것이 최고의 것”이라고 말했다. 일정한 시간이 지났지만 여전히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과 인간이란 존재의 해명에 관한 인식은 이훈에게 많은 시사를 주었던 것 같다. 
작가는 이 키에르케고르의 실존철학과 프로이트의 무의식 이론 등을 통해 진정한 인간 존재의 의미를 탐구하는 수단으로 사진 작업을 시도하고 있다. 인간의 의식과 무의식, 인간 실존의 조건 등을 사진을 통해 가시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실험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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