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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자- 색면과 선묘로 추려진 자연의 서정

박영택

정경자- 색면과 선묘로 추려진 자연의 서정


                                                    박영택 (경기대교수, 미술평론가)

                                                     
 회화는 평면 위에 그려진 시각적 환영인데 그것은 물감과 붓질로 이루어진다. 납작한 표면에 물감의 물성과 색채가 어우러져 모종의 시각적 지표를 만드는 일이자 그 색채로 환기되는 감정을 야기시키는 일이 그림인 셈이다. 그러니 회화란 특정한 대상의 재현이기 이전에 이미 물감/색채, 붓질만으로도 충분히 자족한다고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이러한 인식이 현대회화에 대한 중요한 담론일 것이다. 현대회화란 결국 대상 세계의 재현, 문학적인 내용, 사물의 고유색이란 기존 고정 관념에 저항하면서 이로부터 벗어나고자 한 제스처이기도 했다. 그로 인해 색과 붓질은 그것 자체로 자율적인 영역을 확보하면서 이후 추상적인 세계로 진입했다. 특히 대상에서 풀려난 색은 음악적 공명, 역동적인 리듬감을 창출하면서 주제, 내용을 대체하게 되었다. 

 정경자 화백의 그림은 납작한 평면과 대담한 색채를 기조로 한 서정적인 추상으로 다가오지만 여전히 구체적인 대상 세계의 편린을 거느리고 있는 구상/추상이 혼재한 그림이다. 전체적인 인상은 조화로운 색채비례를 통한 조화 그 자체가 주제가 되면서 순수 추상의 경향을 지니고 있다. 특히 후기작업으로 올수록 이러한 추이는 강도가 높아졌다. 독립된 조형언어로서의 색채의 의미가 강조되고 있으며 광선이나 빛을 통한 추상미술의 가능성을 탐구하는 동시에 눈을 통해 다가오는 색채가 정신에 전달되어 미치는 모종의 힘, 감각에 겨냥되어  있는 그림이다. 특히 전체적으로 색채를 빚어서 조화로운 감각의 반응을 유도하고 있는 그림이기도 하다. 작가는 이 색채가 음악처럼 심리적인 반향을 불러일으키는 힘이 있다는 인식에 공명하고 있다고 보여진다. 이미 이러한 인식은 20세기 초 현대미술에서 큰 영향을 끼친 사유였다. 

  정경자 화백의 그림은 자연에서 받은 감흥을 간추리고 절제시킨 그림이다. 그것은 넓고 평평하게 칠해진 색면과 간결한 선묘로 추려진 세계이고 색채 간의 배치, 관계성으로 조율해 만든 화면이다. 여기서 색채(물감)와 선, 이 두 가지 요소는 본질적으로 회화적 언어를 구성한다. 외부 세계, 대상에서 받은 인상과 느낌을 선과 색이란 회화의 가장 근원적인 조형요소만으로 납작한 평면의 화면 위에 표현하기 시작한 것이 현대회화의 조형적인 원칙이 되고 있음을 이 그림에서도 확인되고 있다. 그림은 주어진 세계, 대상의 모방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독자적인 또 다른 세계, 사물이 된 것이다. 비로소 그림은 그 오랜 시간 외부세계를 묘사하고 모방해야 했던 의무와 노동으로부터 자유로워지게 되었으며 이제 주관적인 작가 감정의 진폭과 느낌의 결에 따른 세계의 해석으로 풀려나게 된 것이다. 그로 인해 화가들은 손에서 벗어나 정신과 마음이 회화의 중요한 요인이 되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망막에만 호소했던 그간의 그림에서 보는 이의 마음과 정신, 감정에 호소하는 그림으로 옮겨가게 되었음도 알게 되었다. 이처럼 현대미술은 세계와 사물, 대상이 그림 그리는 이의 눈과 마음만큼이나 다양하게 변화되고 다채롭게 표현될 수 있음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그것은 그만큼 대상을 접하는 주체의 태도와 감각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정경자 화백의 그림 역시 이 작가만의 시선과 감각으로 바라보고 느낀 세계를 안겨준다. 그 누구와도 다른 작가만의 감수성으로 물든 세계를 통해 우리는 고정된 시선을 교정하고 미처 보지 못했던, 느끼지 못했던 것을 접촉한다. 그 접촉면을 넓게 제공해주는 그림이 좋은 그림일 것이다.   
 
 정경자 화백의 그림은 한결같이 분명히 구체적인 대상으로 출발했다는 인상을 주지만 정작 화면에서 감지되는 것은 이른바 흔들리는 바람, 뒤척이는 나뭇가지와 풀, 유동하는 공기의 감촉, 부서지는 햇살, 물소리와 수런대는 자연의 온갖 음향, 환하게 파고드는 빛 등을 시각화한 것처럼 다가오는 색채, 터치, 선의 희미한 흔적들이다. 여전히 자연은 아름다움을 제공하고 그것을 작가는 수액을 빨아들이는 나무처럼 길어올린다. 결국 자신의 몸의 감각기관이 총체적으로 기억하고 입력한, 체험한 외부세계의 모든 것들을 가시화한 것이 그림이 된다. 몸 바깥의 것들을 몸으로 받아들여 이를 회화 언어로, 간절하게 복기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선과 색은 그렇게 세계와 사물 그리고 ‘나’와의 만남과 접촉을 유연하고 절실하게 표현해내는 수단이다. 선이란 주어진 대상을 옮기는 수단이기도 하지만 보이지 않는 것, 다만 어떤 느낌으로만 떠도는 것, 의식 속에 자리하고 있는 것들에 육체를 부여하는 일이자 일정한 평면의 피부 위에 환생시켜 놓는 일이기도 하다. 선은 그렇게 우리들의 눈에 무엇인가를 존재케 한다. 그것은 가장 단순화된 기호이자 언어이고 가장 압축적인 문장이다. 정경자 화백은 숙련된 드로잉으로 자기 감정에 충실한 그리기의 궤적을 만든다. 이렇듯 작가는 모든 것들을 색과 선으로, 인상적인 몇가지 색채와 예민한 선의 흐름으로 이루어진 간결한 구성 속에서 자기가 접한 세계의 느낌을, 어떤 아름다움을, 기억과 추억을 보여준다. 그러니 정경자 화백의 그림은 자신의 신체와 감각을 추적해보는 일이며 그것을 따라 지도를 작성하는 일이고 자기 생의 모든 것에 집중하는 일이다. 나로서는 그런 것이 진정한 의미에서의 회화란 생각이다. 주어진 생의 순간, 순간들을 헛되이 소모하지 않고 온몸의 감각 밸브를 열어놓고 적극적으로 힘껏 받아들이는 일, 찰나적인 것들에 집중하는 초집중의 힘이 그런 것이다. 그것이 바로 그림 그리는 일이고 결국 생을 사는 일임을 이 작가는 그림을 통해 방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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