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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정선 / 기억 속의 풍경

박영택

기억 속의 풍경


보들레르가 이른바 ‘현대성’이라고 정의한 것은 바로 19세가 이후 전면화 된, 일상생활에서의 현대성의 경험이며 이것은 전통에 대한 결별과 새것에 대한 감수성뿐만 아니라 스쳐 지나가는 순간들에 대한 현기증 같은 시간, 불연속성에 대한 의식을 그 특징으로 한다. 부르주아적 가치들과 계몽주의적 합리성에 반발하는 모더니즘은 바로 이러한 현대성의 조건에 대한 미학적 반응이다. 그것은 이성과 진보에의 믿음, 주체의 자명함, 현실의 객관성과 재현의 투명성 등 기존 현대성이 전제하던 제반 가치들을 의문시하는 동시에 이 모든 것들과 자기 자신에 대한 근본적 성찰이라는 현대적 태도를 극대화하며, 그런 가운데 불연속성과 파편성으로 다가오는 현실에 대한 감수성을 재현 자체에 대한 반성 속에 담는다.

따라서 모더니즘은 본질적으로 도시적인 것이다. 그것은 도시의 경험들과 불안정하면서도 미묘한 관계를 맺는다. 이 유동화 된 응시가 산책자(한가로운 소요자, 유쾌한 방랑자란 뜻의 플라뇌르flanerie)의 시각이며, 세계의 중심에 위치하는 것이 아니라 주의가 흩어지는 현기증 나는 상황 속에 도시의 공간을 어슬렁거리는 산책자는 현대성의 경험이 전면화 된 새로운 상황에 처한 주체에 다름 아니다.‘한가롭게 거닐기’라는 뜻의 이 말은 보들레르에 의해 널리 유명해졌으며 상류 부르주아 지식인들에 의해 행해진 새로운 형식의 도회생활을 위한 세상읽기(literacy)이자 그들 소수의 특권이기도 했다. 완상에 해당하지만 이는 단순한 산책의 차원을 넘어선 19세기 도회적 삶의 급격한 변화에 대응하는 심미적 태도이자 비판적 수용능력이다. 이러한 소요자는 관찰하기는 하지만 결코 끼어 들지는 않고, 바라보기는 하지만 진실된 시선을 주지 않으며, 팔기 위해 내놓은 상품을 바라보듯이 다른 사람들을 바라보면서 도시의 공공 장소들을 돌아다니는 특권과 자유를 상징한다.

그 소요자는 탐욕적이면서 에로틱한 시선을 구체화한다. 인상주의화가들이 그들이며 이들은 퍼즐을 맞추어나가는 탐정과도 같이 피의자를 미행하고 증거보존을 위한 장면들을 흡사 ‘모터드라이브가 달린 카메라의 망원렌즈로 포착하듯 시지각의 망막 위에 각인’한다. 전통과 규범에 억눌려있던 아틀리에에서 탈출해 낮부터 밤까지 쏘다니면서 길거리, 카페 테라스, 술집이나 오페라에서 만난 창녀나 종업원, 댄디와 함께 호흡하며 동시대의 ‘현재’를 마음껏 호흡하고 이를 화폭에 담았다. 식민지 시대에 그런 시선을 소유한 고독한 산책자의 한 예를 우리는 이상의 <날개>의 주인공과 박태원의 소설 <소설가 구보씨의 일일>의 구보에게서도 접한다. 이상과 박태원의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이 바로 모더니스트, 플라뇌르 다. 다소 장황하게 언급한 이 소요자의 시선을 윤정선의 그림에서 다시 만난다. 윤정선의 그림에 대한 기억은 항상 도시 건물이나 그 주변의 사물들 일부를 마지못해 제공하면서 나머지는 묘한 여운처럼 남겨주고 사라진 그런 그림이라는 것이었다. 한편으로는 재현에 대한 불신이나 무력감을 안겨주는 동시에 풍경화이면서도 어딘지 반풍경적 요소가 강했고 사실적인 그림인 듯 하면서도 미니멀하고 더러 디자인적, 다소 쿨 한 팝 적 표면의 느낌도 강했다. 그래서인지 단순하게 평면화 시킨 색채의 면적들이 감정을 배제하고 무심하게 도포한 듯한 붓질로 마감되었다. 색면 추상에 유사한 풍경이라는 인상이었다. 그러한 색면 단위들이 모여 집이나 건물의 외형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구상이면서도 추상적 내음이 나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분명 실재하는 풍경이고 작가가 본 구체적인 대상이면서도 어딘지 그 실재감이 휘발되고 난 자리에 공허하게 떠도는 소멸이나 사라짐, 부재나 안타까운 향수, 기억 같은 감정들이 찜찜하게 감도는 편이었다. 분명 좀 슬픈 풍경이었다.

슬프다는 것은 일회적 삶을 사는 우리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시간을 상처처럼 떠올릴 때이기도 하고 내가 본 이 풍경을 언제 다시 볼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할 때다. 가끔 내 앞에 있는 저 사람, 대상을 다시는 못 보리라고 분명히 예감할 때 조금 슬프다. 모든 것은 사라진다. 우리는 사라지기 직전에 기적처럼 살아 이렇게 걷고 보고 느낀다. 윤정선의 그림은 어린 시절부터 익숙했던 곳, 그래서 잘 알고 있는 곳이지만 동시에 무척 많이 변하기도 하는 곳, 매일 거닐고 보았던 장면, 그 기억을 다시 반추하고 그 위로 타자의 시선과 몸을 슬그머니 유인한다. 얹혀놓는다. 작가의 최근작 역시 이전과 동일하게 자신의 삶의 동선에서, 일상의 반경에서 접한 풍경을 그렸다. 그 앞에서 사생을 하거나 묘사한 것이 아니라 눈으로 보고 사진으로 찍어와 다시 보는 과정에서 포토샵처리를 해서 부분적인 선택, 배제의 과정, 이른바 필터링을 거친 것을 그린 그림이다.

유난히 기억에 남는 것, 은근히 가슴에 남아 여운처럼 떠도는 특정 부위, 지난 시간의 흔적과 현재의 달라진 변화 사이에서 잠시 명멸하듯 겨우 있는 자취들, 결국 자신이 보고 싶은 곳만 남겨두었다. 해서 다 그렸다기 보다는 부분적으로 그려졌고 그렸다기 보다는 안 그린 듯도 하고 미처 다 못 그린 듯도 한 그런 그림이다. 따라서 그려진 부분보다는 그것을 감싸고 있는 여백 같고 텅 비어보이는 부분이 더 많은 그런 풍경화다. 비어있는 풍경, 아니 비어있는 것 같은 풍경, 단색의 파스텔톤의 색채가 중성적으로 모든 것을 녹이는 풍경, 사라지기 직전의 한 순간이 풍경이 적막과 함께 얼어붙어 있다. 어느 날 따스한 햇살은 적당히 비추이고 공기는 가볍고 별일 없이 사는 것 같고 길가, 골목길에 사람은 부재한 그런 시간대에 이곳저곳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건물의 외벽, 작은 집/가게의 앞면, 측면을 본 시선을 담담히 기록하고 있다.그 시선은 작가의 몸이 유동하고 감각이 미끄러지듯 흩어진 자취다. 분명히 보았고 자주 보았으며 아득해지는 기억 저편에서 스물거리며 솟아나는 대상이자 어쩌다 가보면 이내 다른 건물, 달라진 외관으로 맞이해주는 것이다. 익숙하고 변함없으면서도 어딘지 이상한 이질감, 다소 낯선 생경함을 슬그머니 안겨주는 그런 장소에 대한 감회가 모락거린다. 그런데 분명 이전 작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 돈다. 좀더 중성적이랄까. 예전 작품에서 접했던 개인적인 일기의 느낌, 낭만적인 정서보다는 그 개인성을 조금은 덜어내고 밀어낸 자리에 다소 감정이 배제된 상황성이 차분하게 드리워져 있는 편이다. 어쩌면 그 자리로 보는 이들을 유인하고 흡입해내려는 시도 같기도 하다. 그림을 보는 이들은 이 장면을 통해 기시감을 갖게 될 것이다. 자주 보던 어딘가의 풍경, 분명 보았고 알 것 같은, 그러나 잠시 망설여지는 기억의 낙오 속에서 그 풍경은 흔들리는 것이다.

따라서 그림은 윤정선 한 개인의 체험과 기억의 풍경 같으면서도 그것을 넘어서거나 가볍게 지워나가면서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풍경, 지점으로 이동 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림을 보면 작가가 정면을 응시하고 측면을 바라보다 문득 고개를 들어 위를 쳐다보았었을 그 시선이 감촉된다. 그림 그린 이의 동선, 시선, 관심 있게 바라보고 느끼던 그 마음이 결을 다시 밝고 지나가 보는 것이다. 무덤덤 해보이기도 하고 아무렇지도 않은 이 비근한 풍경의 디테일 그 자체를 다시 보게 한다. 제목 또한 특정 날자와 시간만이 기재되어 있다. 그 순간 마주친 사물, 풍경과의 독대다. 그것뿐이다. 꺾인 골목길 모퉁이에 자리한 가로등, 입구에 놓인 몇 개의 화분, 하늘과 맞닿은 기와집의 선, 측면에서 본 건물의 차양, 건물 사이에 악센트로 자리한 빨강색의 간판, 물고기 형상의 풍경, 빗물받이 홈통, 비슷비슷한 벽의 색채 들을 담담히 그렸다.

작가의 관심은 그곳을 지나는 사람에 있지 않고 그들을 덜어내고 배제한 풍경만을 보고 그렸다. 따라서 이 풍경은 분명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자신이 보고 싶고 강조하고 싶고 인상적이었던 부위, 그래서 기억에 비교적 또렷하게 남거나 기억하고 싶은 부분만을 발췌한 것이다. 자신의 기억, 향수와 감각에 달라붙은 부분만을 비교적 상세하게 설명했고 나머지는 그 부분적인 부분에 맞는 색상 하나를 단순하게 칠한 것이다. 윤정선은 삼청동, 가회동, 성북동, 종로 등을 거닐었다. 어느 정도 옛것을 간직하면서도 변해가는 그런 골목풍경이다. 그리고 집에서 작업실까지 가는 길, 여정이다. 거의 매일 보는 낯익은 풍경이면서도 무엇인가가 새롭게 얹혀지면서 이전과 다른 모습으로 조금씩, 때론 격렬하게 뒤바뀌는 도시의 외양이다. 그곳에서 작가는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자신 또한 저 풍경처럼 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도 모르게 무척 많이 변해있다.

이 일상에 대한 핍진한 시선, 세부적인 것에 대한 편집증적 관찰과 수집, 사소하고 반복되는 것 사이에서 차이를 읽어내는 감수성으로 그려진 윤정선의 그림은 서울 골목길에 대한 아카이브적 성격을 지닌 만도 하다. 혹은 자신의 반복되는 일상에 대한 섬세한 기억일 것이다. 반복되는 과정 속에서 미세한 균열, 차이를 감지하고 그 의미를 소중하게 되돌아보는 것이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기억들, 향수를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기록이기 보다는 수집이랄까. 아니면 순간의 흔적 남기기랄까. 생각해보면 기억이란 완전하지도 않고 충분하지도 않다. 기억은 늘 불안하고 미심쩍고 자의적이다. 명료하게 모든 것을 장악하지도 못한다. 그러나 우리는 그 불확실한, 불안한 기억에 의지해 삶을 산다. 반복되는 일상으로 인해 누적된 삶에서 무엇인가를 뽑아내는 것이 또한 기억일 것이다. 기억이 없다면 삶은 없다.

내일은 어제와 오늘의 기억에 의지해 있다. 우리는 늘 기억에 기생해 그 기억을 갉아먹으며 앞으로 조금씩 밀고 나가며 산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보거나 느끼거나 사유한다는 것은 지금이라는 시간에 내 앞에 자리한 저 세계에 대한 어떤 기억과의 접점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생각해보면 과거란 결국 늘 현재의 시간 위에서 매번 새롭게 환생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기억이 과거의 영역에 국한되어 가라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현재라는 시간대위에서 건드려주기만 하면 튕겨져 나갈 것처럼 격발 상태로 포진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우리들 정수리 앞에, 망막위에, 대뇌피질의 전방, 심장의 껍질위에서 말이다. 기억해보니 윤정선의 이번 전시 제목이 바로 <기억의 풍경>이었다. 작가가 그린 풍경은 결국 과거와 현재의 순간 위에서 긴장감 있게 자리한 자기 생에 대한 이야기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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