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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인수 / 양귀비 꽃의 이미지

박영택

꽃은 그것을 바라보고, 냄새맡고, 만져봄에 의한 즐거움으로써 우리의 미적 의식에 주어지는 무상의 순수한 부여물이다. 하나의 꽃은 단순히 식물로서의 꽃이라는 개별적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그로부터 벗어나 하나의 우주, 실존의 공간이 되기도 한다. 꽃을 그리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동물성의 세계와는 달리 식물성의 세계는 고요하고 정지되어 있으며 남을 상처주지 않는다. 그것은 자신의 주어진 공간에 침묵하고 수직으로 뻗어 내려갈 뿐이고 주변의 공간 위로 마냥 부풀어 오른다. 지표가 경계를 이루고 그 위와 아래로 세계는 나뉜다. 그 어딘가에 지천으로 꽃이 핀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고 서식하는 식물은 빛을 향해 발돋음 한다. 음과 양의 세계에 동시에 거한다. 그 둘의 이원적 세계를 아우르고 한 몸으로 힘껏 껴안는다. 그래서인지 꽃은 암수가 한 몸으로 자리한다. 성별의 구분조차 무화시켜버린다. 꽃은 모든 이원성을 지우는 화합이고 조화이다. 꽃은 또한 오랫동안 기념과 추억, 제의와 죽음, 기쁨과 심미적 행위의 중심에 위치해있었다. 사실 꽃은 한순간, 바로 그 찰나에, 그저 아름다울 뿐 영원과는 거리가 먼 존재다. 그래서 서양의 정물화 전통에서는 헛됨과 세속적 삶의 허망함을 상징해왔다. (바니타스, 메멘토모리) 그러나 인간의 관점에서 볼 때 세상에서 꽃을 빼버리고 나면 세상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꽃 없는 세상, 꽃 없는 미술을 상상하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이 꽃을 그리는 이유일 것이다.

권인수가 그린 꽃은 양귀비다. 수술은 많고 암술은 한 개이며 잎자루가 없고 잎가장자리에 불규칙한 톱니모양을 지닌 이 꽃은 덜 익은 열매의 흠집에서 나온 즙액 말린 것이 바로 아편이 된다고 알려진 꽃이다. 아름다움의 대명사로도 불리고 강한 중독성의 아편의 재료가 되고 이미 기원전 10세기 경 수메르인들의 공예품에서 양귀비꽃의 형상을 살펴볼 수 있을 정도로 오래전부터 미적 대상으로 재현되어온 꽃임을 알 수 있다. 특히 모든 꽃들은 비옥한 땅에서 잘 자라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것을 좋아하지만 이 양귀비라는 식물은 황폐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특성이 있는 꽃이다. 무엇보다도 양귀비꽃은 요염한 입술과 불타는 빛깔을 지닌 꽃으로 익숙한 편이다.

작가는 바로 그 양귀비꽃을 단순화해서 화면에 그려넣었다. 원형의 꽃이 화면 가득 달처럼 떠있다. 양귀비꽃을 그렸다기 보다는 그 꽃이 그대로 화면 위로 올라와 머물고 있거나 흔들리고 있다는 인상이다. 분명 양귀비꽃의 형상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그로부터 멀어져 보편적인 원형의 꽃 한송이가 되기도 하고 다시 양귀비꽃만이 지니는 자태와 색채를 유감없이 발산하는 일종의 도상으로 다가온다. 그것을 꽃으로 볼 수 있지만 동시에 한지에 스며든 물감, 색채의 흔적이고 응고의 자취이고 시간의 흔적이자 붓의 너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아름답고 강렬한 색상을 응집하고 있는 양귀비라는 구체적인 꽃의 이미지다. 그것이 이미지다, 실제와 가상 사이에서 놀이하고 유희한다. 그는 양귀비꽃의 형상과 색채를 빌어 그림을 그린다. 그것은 꽃이자 순수한 색채와 붓질, 물감의 흔적으로 머문다. 구상과 추상이 공존하고 이미지이자 물리적 현상 그 자체로 멈춰있다. 작가의 인위적인 의도에 따라 꽃이 그려지지만 동시에 자연적이고 우연적인 법칙에 순응하고 의탁한 결과다. 종이 자체가 지닌 구조와 속성, 물의 수용성, 삼투와 응고, 시간과 중력이 법칙 등 보이지 않는 힘이 이 그림을 가능케 했다.

권인수는 어느 날 우연히 길가에 피어있는 양귀비꽃을 보았다. 그는 모종의 유혹에 빠져 한 참을 그 양귀비꽃 앞에 머물러있었다고 한다. 자연스레 본성에 이끌린 결과다. 그는 본능에 충실하게 반응했다. 꽃은 분명 유혹이다. 그것이 양귀비꽃을 그리게 된 이유다. 양귀비 꽃에 반하는 순간 그는 양귀비꽃을 그리게 되었다.

“보면 볼수록 그 아름다움 속에는, 온 몸을 휘감은 꽃잎 몇 장과 생명의 근원이 되는 암술과 수술의 오묘한 조화는 거부할 수 없는 이끌림에 충분한 것이었다.”(작가노트)

그 많은 꽃 중에 하필 양귀비일까? 그것은 작가의 마음이다. 다른 어떤 꽃보다도 양귀비꽃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 형태와 색상이 그렇고 그날의 분위기와 환경이 그랬을 것이다. 작가들마다 특정한 꽃을 집중해서 그리는 경우가 있다. 도상봉은 여러 꽃을 그렸지만 그중에서도 라일락꽃을 잘 그렸다. 아니 그가 그린 라일락꽃은 다른 이가 그린 것보다 분명 운치가 있고 멋이 있다. 김용준의 매화나 수선화도 그렇고 오지호의 목련, 황염수의 장미, 천경자의 장미, 김지원의 맨드라미 등이 떠오른다.

그 꽃들은 단지 하나의 대상이거나 식물에 머물지 않는다. 작가의 내면이 투영된 존재이고 그들이 체득한 미적 경지를 실현하는 매개물이자 각자의 조형세계를 구현하는 수단들이다.

권인수에게 양귀비 역시 그런 존재일 것이다. 비근한 일상에서, 지루하고 범속한 현실에서 그는 양구비의 매력에 한 순간 반해버렸다. 강렬한 이끌림에 자연스레 붓을 들었고 그 형상과 색채를 따라갔다. 그렇게 마음속에서 들어갔다 나온 다른 그만의 양귀비꽃이 그림이 되었다.

양귀비를 그린 이도 적지 않다. 권인수도 그중 하나다. 그는 채색물감을 수묵처럼 다루면서 양귀비 꽃을 단순화했다. 채색화도 수묵화처럼 홍건한 물맛과 번짐과 퍼짐 등의 자욱한 효과를 내고 있다. 수묵화 같은 채색화, 채색화지만 여러 번에 걸쳐 입혀지고 그렇게 차올라 깊은 맛을 우려내기 보다는 한 번에 이루어지는 그런 채색화를 보여준다. 일필과 일획으로 멈춰선 채색화다. 단수하면서도 함축적이고 일회성으로 충만하면서도 미세한 떨림과 파문을 간직한 체 홀연 멈춰서있는 긴장감이 있다.

이 그림은 양귀비꽃의 재현이라기 보다는 그것에서 받은 인상과 감흥을 압축하고 요체화해 내는 이미지에 가깝다. 작가는 자신이 양귀비꽃에서 받은 총체적인 인상과 느낌을 그림으로 그리고자 한다. 오로지 색채만으로, 색채의 흔적으로 호명한다. 한지 속으로 스며든 물감, 색은 종이/ 지지체와 일체가 되면서 그 조직 안으로 삼투한 흔적을 고스란히 증거한다. 시간의 경과에 따른 경로를 보여주는 결이자 그림 그리는 과정이 녹아든 모습이다.

모든 생명체는 물기로 채워져 있다. 살아있다는 것은 어떤 액체를 지니고 있다는 말이다. 물기가 없다는 것은 분명 죽음과 소멸에 가깝다. 내가 살아있다는 것은 내 육체가 아직 마르지 않았음을 말한다. 죽음은 물기를 지우고 수분이 증발된 자리에 메마르게 번진다. 그곳에서 바삭거리며 기꺼이 부서지는 육체들. 그래서일까, 모든 존재들은 촉촉한 물기를 그리워한다. 물기는 생명의 상징이며 감정의 경계를 보여준다. 우리들 육체의 근원이 다름 아닌 뜨뜻하고 눅눅한 양수 속 이였음을 기억해 보라. 그래서 우리는 그 누군가의 물기를 늘상 그리워하는 것일까? 내 몸과 살, 피가 그 어떤 액체와 함께 하기를 원한다는 이 강력한 욕망의 진원지는 어디일까? 물은 생명의 액체, 생명의 근원이다. 모든 만물의 창조력의 원천이 물이라고 여겼던 동양인들에게 그림은 오로지 물에 의존되어 이루어진다. 동양 그림의 필획 하나 하나는 천하를 주유 하는 바람이나 물의 생리를 동경하는 제스처에 다름아니다. 만물의 생성원리를 물을 통한 그림그리기로 확인해보는 수행이기도 하다. 모든 이미지들 역시 살아있고자 하는 갈망을 해대면서 무엇인가에 적셔진다. 물이나 기름을 통해 물감은 용해되어 화면 위에 안착된다. 흙 역시 물기를 머금고 원하는 형상으로 빚어진다. 사진 역시 액체 속에 잠겼다가 서서히 이미지를 피워낸다. 권인수의 양귀비꽃그림은 전적으로 물에 의한 그림이다. 그는 결국 물의 속성을 보여준다. 물의 엄정한 이치를, 법칙을 알려준다. 그러면서 동시에 꽃그림이 부감한다. 물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은 그림이고 물에 의해서만 실현가능 한 형상이자 자취인 셈이다. 따라서 이 그림은 양귀비꽃이자 그 형상을 빌은 물의 자취이다.

작가는 바닥에 한지를 놓고 그 위에서 양귀비꽃의 원형상을 그린다. 칠한다. 특정 색채를 머금은 붓은 종이의 내부를 향해 간다. 그 붓질과 물감의 번짐이 꽃잎을 암시한다. 그 가운데에 노랑색 물감의 점과 선으로 포인트를 준다. 꽃잎의 색상은 달라도 그 중심부분의 처리는 동일하다. 그 부분은 꽃의 중심이고 생명의 근원이며 활짝 핀 꽃의 배꼽이다. 우주의 중심이자 생명의 중심이다. 그 중심부분만을 극단으로 밀고 들어가 보여주고 있다.

보는 이들을 양귀비꽃의 중심으로, 핵심으로 몰입시킨다. 나머지 자잘한 부위들은 다 지워졌다. 날려버렸다. 오로지 이 꽃과 보는 이만을 독대시킨다. 그리고 그 꽃은 한결같이 정면에서 본 모습이다. 꽃의 핵심만을 보겠다는 의지다. 원형의 꽃은 사각형의 화면 사이로 떠내려가듯, 부유하는 듯 하다. 정사각형의 화면에 다채로운 시선으로 잘리고 포착된 부분들이 흥미로운 꽃의 모습들을 연출한다. 단조로울 수도 있는 꽃의 형상이 다채롭게 번진다. 작가는 순백의 바탕 위에 꽃 한송이만 크게 확대시켜 덩그러니 화면 한가운데 위치시켰다. 더러 몇 개의 원형꽃들이 겹쳐있거나 공간을 배분한다. 그리고는 온통 여백이다. 따라서 한지는 다양하게 선택된다. 여러 종류의 한지를 사용하고 그 한지의 질감, 닥나무를 부분부분 안고 있는 종이가 선택되면서 단조로움을 피한다. 종이의 표면에 있는 질감, 오브제 역시 꽃의 형상과 색채 못지않게 모조으이 표정을 지어보인다.

전체적으로 이 그림은 강한 색상의 대비, 여백을 감당하는 형상의 공간감, 압축된 단일 형상으로 시선을 모으는 흡입력, 형상과 여백이라는 음양의 팽팽한 긴장과 균형의 경계선상에 의해 조율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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