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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복의 산 그림,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박영택


김종복과 산
기억에 의존하면 김종복의 그림은 항상 산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1969년 <추정>이란 풍경화가 국전에 입선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하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지금의 시각에서 그 그림을 보면 놀랍게도 그 안에 김종복표 풍경화의 특징을 거의 변함없이 보여주는 온갖 징후들이 가득하다.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작가의 작업세계는 거의 불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연이 지닌 아름다움을, 그 벅찬 감흥을 그림으로 구현하는 일, 방법론은 다분히 표현주의적인 구상화이고 세세한 묘사가 아니라 주관적인 감정에 기반한 붓질(신체성)과 색채 만으로 이루어진 회화라는 사실이 그것이다. 그것은 한국 구상화의 오랜 전통 위에 표현주의와 추상표현주의, 색채추상 그리고 동양의 산수화 전통들이 뒤섞여 이룬 세계다.

그 일관성 위에 약간의 변화가 이어진다. 그러니까 초기작에서 점차 후기로 접어들면서 서로간의 경계가 촛농처럼 녹고 바람처럼 흔들리는가 하면 물처럼 흐르는 경향이 농후해진다. 화면 가득 산의 전면성이 박진감 있게 차들어 오는 형국이자 하늘과 대지, 산이 서로 구분 없이 녹아 흐르고 융합하고 엉켜서 선회하는 그런 유동적인 흐름을 보여주고 있다. 딱딱한 고형의 물체감과 질량감, 그리고 틀 잡힌 형태에서 해방되어 서로 교감하듯 넘나드는 모종의 기운의 흐름이 그렇다. 그것은 가시적 존재 너머에 자리한 호흡, 숨결, 영적 기운 같은 것이다. 땅과 산과 하늘은 하나의 대상이기 이전에 맥박 치는 생명체요 보는 이에게 영감과 상상력을 불어넣어주는 매혹적인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그것은 거대한 생명체로 풍만해서 꿈틀댄다. 또한 구체적인 풍경, 산의 재현에서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대상의 윤곽은 해체되고 마치 모네의 후기 작품처럼 색채와 붓질만이 가득한 색채추상에 가까운 흔적으로 나아간다.

그러나 여전히 자연풍경이란 소재를 지우지는 않는다. 따라서 그것은 실재하는 자연을 상실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기계적인 복제에 머물지 않으면서 매번 새로운 풍경화로 거듭날 수 있는 지점의 모색으로 보인다. 그런 시간이 수 십년 흘렀다. 그래서 김종복이란 작가를 떠올리면 당연히 산 그림이 연상되고 작가특유의 붓질, 색채감각이 떠 떠오르는 것이다. 거의 일관된 소재와 주제의식을 보여 온 작가로 기억되는 것이다.

결국 김종복은 오랜 세월 이 땅의 자연풍경을 그리면서, 특히 산을 중심적 소재로 다루면서 그 자연을 어떻게 바라보고 인식할 것인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시각화라 할 수 있을 것인가라는 과제에 몰입해 온 시간을 보내온 작가이다. 물론 이런 과제는 모든 작가들에게 피할 수 없는 질문이고 숙명적인 문제이다. 현대미술이 인간이 대면하는 세계, 자연으로부터 벗어난 지도 오래되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자연이 망각되거나 망실된 적도 없다. 여전히 수많은 작가들은 자기 앞에 자리한 자연을 응대하면서 그 세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이해하며 표현할 것인가에 대해 고민하고 절망하고 다시 도전하기를 반복하고 있다. 자연이 있기에 자연을 그리는 것일까?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하필이면 산이 중심적 소재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특정한 산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산의 형태를 빌은 자연이자 자신의 관념 속에 자리한 이상적인 형태였던 것 같다. 마치 동양화의 산수화처럼 말이다. 차이가 있다면 매체의 다름일 것이다. 그러나 그 저간에는 분명 산악숭배와 같은 거의 종교적인 믿음과 시선이 내재해 있다는 생각이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이루어진 이 땅에서 태어나 자란 이들에게 산은 원풍경이다. 심미관 형성의 근원이다. 병풍처럼 둘러 쳐진 산 사이에서 생을 영위한 선조들로부터 이어받은 유전적인 심미관과 자연관이 여전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복하지만 서양과 동양의 자연관, 세계관에 기대 풀려나온 풍경화와 산수화의 전통을 하나로 엮어서 종합해내는 한편 자신의 몸과 감각으로 체득한 경험적인 사실을 직조해서 그려온 것이 그간 김종복의 그림일 것이다.

자연과 미술
우리가 사물과 세계를 본다고 하지만 그것은 결국 보는 이의 기억 속에 저장되면서 변형을 거친다. 또한 사물과 세계를 보는 관점, 학습된 가치관과 미학에 의해 규정된다. 따라서 미학은 단지 감성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에 대한 인식’에 해당한다. 그것은 인식의 감각을 바꾼다. 이것이야말로 ‘낡은 감각’에서 새로운 것을 끄집어내는 계기다. 결국 미학적 차원은 존재의 구성이다. 이 구성은 다분히 일시적이고 가상적이긴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실재의 작동에 해당한다. 그래서 사물과 세계를 어떻게 보느냐와 어떻게 감각하느냐의 문제는 겹쳐지고 미학과 세계관은 한 쌍을 이룬다.
그러니까 자연을 그린다는 것은 그 자연을 어떻게 보고 감각하느냐의 문제이자 자연에 대한 일종의 가치판단의 문제이기도 하고 또한 미학적 판단이자 윤리적이며 심지어 정치적 판단이 개입되는 문제이다.

우리는 풍경화를 보면서 이 예술작품의 목적이 자연을 객관적으로 재현하는데 있는지 아니면 작가의 내면적 심상을 구현하는데 있는지를 묻는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이 질문은, 자연(대상)은 예술의 목적인가 수단인가? 라는 질문일 수도 있고, 예술의 진실은 세계를 밝혀주는 것인가 자아를 밝혀주는 것인가? 라는 질문일 수도 있다.

김종복의 그림은 어디에 놓여질까? 객관적인 자연대상의 재현은 아닌 듯 하다. 그렇다고 추상으로 나가지도 않는다. 구상과 추상 사이에서 머뭇거린다. 아니 그 둘의 종합적인 그림인 듯도 하다. 분명 재현과 무관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그 이미지는 분명 실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것과 무관한 것도 아닌 그 사이, 틈에서 나온 것이다. 그 틈이 결국 미술이고 그림이 가능해지는 지점이다. 아름다움은 자연 속에 있어 인간은 그 아름다움을 창조하기 보다는 발견해낸다고 해야 할 것이다. 미술은 인간이 활동이지만 그 궁극의 목표는 자연을 닮아가는 일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럽지 않다.

동양문화권에서는 자연이란 말에 함축된 의미 그대로 ‘스스로(自) 그렇게 되다(然)’는 뜻을 좇아 자연과 인간의 합일을 추구하고자 했다. 동양에서 예술이란 결국 자연이 지닌 지극한 조화와 불변하는 법칙을 이해하고 그 의미를 조형화하는 일이자 그렇게 스스로 존재하는 자연의 형상을 인위에서 출발해 무위의 경지로 옮겨가는 일이기도 했다. 그것은 모순적인 일이다. 그러나 그 모순이 인간과 자연 사이에 자리한다. 자연을 닮고자 열망했던 것이 고대 동양인의 삶이자 예술이었기에 사람들은 자연을 완상하고 이를 반복해 형상화하면서 자기 생을 완성해나갔다. 그렇게 만들어진, 구현된 예술은 자연과 구분 없이 자존한다. 좋은 예술이란 풀처럼, 물처럼, 돌처럼 자리하고 바람처럼 기꺼이 사라지는 것이다. 그렇기에 미술이란 소멸의 지점으로 자연스레 나아간다. 김종복의 그림 역시 그런 여정을 동경해온 것은 아닐까? 그 긴 여정을 통해 작가는 우리 자연을 어떻게 보여왔을까?

풍경과 풍경화
인간은 특정한 공간에서 산다. 인간의 삶을 규정하는 핵심적인 장소인 그 공간에서 비로소 인간은 자신의 생각과 감각을 가설하고 부려놓으면서 삶을 영위한다. 사실 그 공간은 추상적인 것이다. 공간은 인간의 사유에 의해 탄생한다. 모든 공간은 그러니까 인간 사유가 서식하는 근원적이고 원초적인 여백인 셈이다. 인간의 감각활동의 하나인 예술이란 무엇보다도 주어진 공간에 제약을 받고 그 공간에서 파생된 삶의 체험과 감각, 느낌의 결정체를 말한다. 아울러 예술은 역사적, 지리적 공동체를 이상적으로 객관화하여 나타내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무엇보다도 풍경화란 인간을 둘러싼 공간에 대한 적극적인 인식행위이다. 나를 둘러싼 이 환경, 공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들여다 볼 것인가가 모든 예술행위의 근간인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 그 이전에 유일한 생의 조건이다. 우리는 모두 내 육체 앞에 놓여진 모든 것들을 일정한 조망, 퍼스펙티브 속에서 바라본다. 본다는 것은 사유하는 것이다. 예술의 역할은 인간으로 하여금 보는 것을 가르치는 것이며, 예술에서 보는 것이란 본다는 것의 여러 가지 의미에도 불구하고 직관을 의미한다. 이 직관은 지적 지식이 아니라 지각에 의해서 대상의 내부에 뚫고 들어가 대상이 가진 내성과 합일하는 공감이다. 일정한 조망의 거리, 퍼스펙티브를 확보했을 때 인간은 사유하고 깨닫고 인식한다. 그런 거리감이 결국 공간, 풍경에 대한 하나의 사고일 것이다.

흔히 ‘풍경’은 아름다움, 자연, 순수함이라는 일종의 도식 위에 존재한다. 그것은 풍경의 신화화이자 이데올로기다. 풍경은 예술장르가 아니라 이종의 매체인데, 그것은 인간과 자연, 자아와 타자 사이에 교환되는 그런 매체다. 풍경은 문화와 관습에 의해 매개된 자연의 모습이다. 따라서 풍경은 결코 자연의 중립적이고 미적인 반영에만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그런 상투형의 인식을 벗어나 시대와 문화에 의해 끊임없이 길들여지고 왜곡되는 대상으로서의 자연풍경을 생각해보아야 한다. 무엇보다도 풍경은 지금의 자기와 눈앞이 세계가 만날 때 태어난다. 이 세상 속에 존재하는 자신과 자신이 대면하는 세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규정함으로써 발생한다. 따라서 풍경은 무엇보다도 관계의 미학이다. 풍경은 단순히 자연의 투사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계기로 항 인간의 내부에서 발생하는 이미지 현상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풍경이라는 현상에는 자연이라는 물리적 실체와 그것을 시각상으로 포착하는 사람, 이 양자의 존재가 서로 조응해서 만들어진 그 무엇이다. 우선 인간의 풍경 체험은 외계의 시각상을 눈으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시작한다. 풍경체험은 단순히 외계사물의 시각상을 객관적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그 사물의 몸과 표정을 읽는 것이다. 풍경은 신이나 시골에 속해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작가 자신에 속해 있다. 그래서 풍경을 탐험하는 것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내면생활을 탐험하는 것이다.

어느 시대, 어느 곳에서든 그 지형과 산수관(山水觀), 즉 자연경관이 만들어내는 공간 개념은 소위 풍경화의 구조와 상호연관을 갖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인상주의 화가들 자신은 그들이 자연을 객관적으로 혹은 기계적으로 복사해내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이 즉흥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자연’이 ‘나’와 부딪힌 결과이지 자연 자체가 아니었다. 그렇기 때문에 인상주의 화가에게도 내면과 외부의 관계, 주관과 객관의 관계는 그리 간단한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세잔 자신은 끊임없이 “자연에 충실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집요하게 관찰한 자연을 통해서 그가 남겨놓은 것은 그림의 과정이 드러나는 붓질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붓질, 터치는 태어난 것, 만들어진 것이라는 점이다. 그가 20여년에 걸쳐서 뚫어지게 바라보면 볼수록 셍 빅트와르 산은 더 이상 풍경이 아니었을 것이다. 더 이상 자연도 아니었을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지 끊임없이 회의하는 과정을 통해 그가 남겨놓은 것은 물론 붓자국이다. 그러나 이 붓자국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었다. 그 붓질은 세잔이 자연을 앞에 두고 관찰하고 숙고하면서 그것이 자신의 신체와 의식에 남긴 것의 조형화의 결과였다. 그것은 단지 그림에 머물지 않는다. 세계와 부딪쳐 이룬 투쟁의 결과이자 감각의 상처들이다.

김종복의 그림 역시 자신의 신체 전체와 자연이 만나 이룬 결과물이다. 그림은 그 모든 것을 붓질과 색채로 가시화한다. 여기서 붓질과 색채는 외부 세계의 재현에 종속되기 보다는 자기 신체와 감정의 등가물로 위치한다. 자연에서 받은 감동과 떨림이 그대로 그림으로 구성된다. 무엇보다도 김종복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증거하고자 한다. 그것은 오랜 회화의 전통을 떠올려준다. 거대하고 숭고하며 아름다운 자연에서 받은 총제적인 감흥이 어떻게 그림으로 구현될 수 있을까를 질문한다. 따라서 작가의 그림은 그 질문의 결과물이라기보다는 매번 반복되고 거듭되는 문제에 대한 그때그때의 지속적인 응답이자 지연되는 모색의 성격을 지닌다.

김종복의 산 그림
김종복의 그림은 자연이 아름답다는 전제 하에 출발한다. 사실 아름다움이란 자연에 가장 가까이 다가가는 것이다. 인간은 아름다움을 만들지 못한다. 다만 자연이 아름다움을 낳고 인간은 그 아름다움에 가닿을 뿐이다. 자연에 이미 들어와 박힌 그 아름다움을 드러나게 하는 것은 인간의 몫이다. 생각해보면 아름다움이란 결코 인간에 속해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자연으로 간다. 그곳에 인간에게 부재한 절대적인 미가,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 현기증 나는 신비가 피어난다. 그러나 사실 그 아름다움조차 인간의 몫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연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드러내고 발견하고자 하지만 자연은 결코 그 모습을 온전히 보여주지 않는다. 아니 그것은 불가능하다. 보일 듯이 보이지 않고 보이지 않으면서도 얼핏 자신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자연이다. 자연은 항상 살아있고 약동하며 수시로 변화한다. 우리들 시선이 눈을 주는 대로 자연은 계속해서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 고정될 수 없고 정지 시킬 수 없는 것이 자연의 매력이다. 그것은 영원히 포착되기를 거부하고 지속해서 나타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시간과 공간 속에서 단 한 순간도 잠들지 못한다. 이때 그림은 감각을 끌어 모으는 과정을 통해서 그 자연에 도달하려한다.

김종복의 산들은 대개가 큰 산이고 거대하고 웅장하며 숭고하기 까지 하다. 원근에 의해 조망된 산이 아니라 근접해서 일으켜 세운 산이다. 보는 이의 눈에 산 그 자체의 물질감과 덩어리를 안긴다. 남성적인 이 산의 괴량감과 질량감은 외형적인 산의 일반적인 묘사/재현 혹은 풍경화의 상투적 관례로부터 벗어나 있다. 풍경적인 산이나 자연의 이미지가 아니라 그 안쪽으로 들어가 외관 아래 잠긴, 내재해 있는 어떤 것을 끌어내려는 제스처 같다. 이른바 동양화에서 흔히 말하는 ‘기’라든가 생명력 등이 그것이리라 추정된다. 그래서 수묵화대신 유화로, 화선지 대신 캔버스에 동양화의 정신과 표현방법론 등을 응용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아니면 결국 서양화라는 이질적인 장르와 매체의 쓰임을 토착적이고 문화적인 틀 안에서 번안해내는 과정에서 불가피하게 나오는 그림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그것을 서양화재료로 구현된 동양화적인 풍경, 산 그림이라고 거칠게 말해볼 수 도 있을 것이고 구상과 추상이 혼재된 풍경이기도 할 것이다. 사실 이런 그림이 결국 한국에서 가능했던 서양화/풍경화는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본다. 이른바 주관적인 표현주의풍의 풍경화라고나 할까?

나는 김종복의 산 그림을 보면서 자연스레 박고석의 산을 연상한다. 지극히 과작(寡作)이었던 그의 산 그림은 무척이나 남성적인 매력을 풍기는 뜨거움으로 가득하다. 박고석은 살아생전 무척이나 산을 사랑한 작가이며 그래서 산 그림이 많다. 그의 평상시 옷은 아예 등산복 차림이었다고 한다. 평생 산 그림을 그렸지만 사실 그는 1년에 3-4점밖에는 완성하지 못한 과작의 작가이자 과묵한 성격이 소유자로 알려져 있다. 그의 생김새와 삶 자체가 아예 산이었던 것이다. 산을 좋아한 그는 수많은 산행을 통해 산을 눈과 가슴에 담아와 어느 순간 화폭에 분출하듯이 그려냈다. 마구 쏟아내듯이 물감은 튜브를 빠져나오고 이내 맹렬하게 화면 위에 가 달라붙어있다. 그 물감은 물감 자체의 물성을 극대화하면서 산의 본성 같은 것을 질료성과 색채로 단박에 던져준다. 붓의 대담한 놀림과 자유 분방하면서도 사물이 지닌 내적 질서의 감을 정확히 집어내는 그의 붓질 맛이 생생하게 살아있다. 청색과 녹색, 흰색, 고동색 등을 기조로 한 굵고 짧게 친 붓터치들이 일구는 속도와 중후한 질감은 자연을 뜨거운 감동 속으로 끌어넣으려는 의도이다. 마치 정선의 <인왕제색도>에서 바위산을 표현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검게 쓸어내린 먹의 색감과 웅건한 필력이 연상된다. 그런 그림을 통해 우리는 박고석이란 한 개인이 지닌 기질과 품성에서 가능한 그만의 자연을 만난다. 누구도 그를 대신할 수 없는 그만의 눈과 마음, 감동과 표현력으로 그려진 그림이라는 얘기다. 우리가 그림을 보는 이유는 누구나 다 똑같이 보는 장면을 만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사람만의 감각과 기질로 해석된 사물과 세계를 보기 위해서이다. 많은 이들이 자연을 그렸지만 박고석의 그림은 비로소 한국의 산, 한국의 자연을 감동적으로 만나게 한다.

동시에 그것은 산이란 자연대상이 동양문화권에서 인식되던 전통을 현재의 시간 위에 올려놓는다. 그것은 단지 관조적이고 경관적 으로 바라보는 산이 아니다. 그것은 산을 진정으로 알고 이해하고 그것과 함께 한 자들에 의해 비로소 보이는 산의 초상, 육체다. 아는 만큼 보이듯이 그림 역시 그 대상에 대해 상투적인 이해 내지는 선입견이나 약속된 코드에 의존해서는 결코 보이지 않고 열리지 않는다. 결국 좋은 작가는 주어진 사물. 세계를 기존의 틀에 기생하지 않고 자기 식의 틀 안에서 바라보는 자들이다. 이를 통해 우리는, 관자는 새삼스럽게 새로운 시각을 얻는다. 그것은 더 이상 익숙한 자연이 아니라 낯선 자연이고 그 작가에 의해 새롭게 환생한 자연이다. 작가는 주어진 세계를, 이미 있는 세계를 다시 자기 안에 품어서, 자기 몸과 의식 안으로 수렴해서 지금까지 존재하지 않은, 본 적이 없는 그런 존재로 만들어내는 이다. 그런 이들의 목록이 미술사를 기술한다.

김종복의 산/자연 또한 구체적인 대상에서 출발하고 그것을 기원으로 한다. 그러나 결과물은 원본으로부터 무척 자유롭게 해석되는데 무엇보다도 작가의 기억과 인상에 의해 재구성되거나 변형되는 편이다. 작가는 저 자연의 미세한 율동, 리듬, 호흡, 그리고 모락거리는 기운, 비늘처럼 반짝이고 뒤척이는 이 숨 막히는 아름다움을 지닌 자연을 보는 이에게 감각적으로 만나게 해준다. 작가는 그 풍경과 하나가 되어 풍경의 의식을 가지고 풍경에 대해 발설한다. 풍경 스스로가 말하게 한다. 이미지의 어원에는 빛이란 단어가 숨겨져 있다. 빛이 없다면 우리는 볼 수 없고 이미지도 없다. 모든 이미지는 빛에 빚지고 있는 것이다. 자연은 그 빛과 더불어 항상 변모하는 질료로 존재한다. 빛에 의해 응고되어져, 광물질의 표면처럼 빛나기도 했고, 부서지는 색채의 가루로 소멸하기도 하고 흐린 대기처럼 엷어지기도 한다. 이렇듯 실체를 규정할 수 없는 끊임없는 변모가 자연의 실체다. 수시로 자연은 색을, 밀도를 바꾸고 있다. 자연은 쉼 없이 변화 생성하는 존재에 다름 아니다. 이런 관점은 다분히 동양의 자연관이자 산수화를 보는 시선이다. 김종복의 그림에는 그런 시선의 일단이 검출된다.

동. 서양의 공간구도의 근본적 차이는 사물을 보는 눈의 위치를 어디에 있는 것으로 설정하느냐 하는 점이다. 서양의 원근법은 고정된 한 눈의 관점에서 사물을 보는 가시적 공간을 구성한다. 서양의 회화적 구도는 자아와 세계를 서로 분명한 구획을 가진 고정된 실체들의 관계로서 파악한다. 반면 동양화에서는 고정된 하나의 관점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변화, 혼융상태에 있다. 자연의 형태란 다만 고정된, 물리적인 실체뿐만 아니라 비물질적인 특질도 지녔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사실 세계는 고정되지 않는다. 세계는 정지태가 아니라 운동태며 존재가 아니라 생성이며 고정이 아니라 떨림과 흔들림이란 것이 동양인들이 깨달은 공간, 세계였다. 서구인들처럼 인간이 세계를 고정시킬 때 그 결과물은 개념적 언어이거나 또는 원근법에 의해 프레임 안으로 걸려들어 갇힌 이미지일 뿐이다. 우주의 끊임없는 변화의 장으로 부터(객체로서의) 실체가 분리되고 (주체로서의)실체 또한 사상되는 것이 그래서 동양의 그림이다. 모든 것은 실재이면서 동시에 끝없는 변화의 과정 속에서 존재한다고 본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인 셈이다.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 현상의 경험이었다. 결국 그 응시 법은 다원적 시점이고, 움직이는 시점이 된다. 아울러 복판에 내재한 시점이다. 시점을 풍경의 복판으로 옮겨가는 것 즉, 그림 안에서 움직이는 관점인 것이다. 그것은 다름 아닌 ‘실존의 시선’이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김종복의 산 그림은 캔버스에 유채를 통해 분방하고 활기찬 붓놀림이 거침없이 횡단하면서 자연에서 받은 총체적인 인상과 느낌을 매우 심플하고 직접적으로 표현해 내는 그림인데 그것은 구상이면서도 결국 붓질의 자취, 흔적들로 떨고 있다. 구상이자 추상적인 자취이며 구체적인 대상의 재현인 것 같으면서도 결국은 그림을 이루는 조건들이 물리적 각인이었다. 흡사 드 쿠닝의 그림이 얼핏 여자이미지를 보여주지만 순간 붓질로 환원되어버리고 그렇다고 마냥 붓질과 물감덩어리로 귀결되기 보다는 이미지를 제공하고 감상의 단서를 마련하면서 보는 이의 눈에 비교적 익숙하게 다가가는 식이다. 그것은 구상과 추상사이에서, 재현과 비재현 사이에서 진동한다.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 사이에 자리하고 있다. 좋은 작가란 그 보이지 않는, 느낌과 감각과 직관에 의해 자연/세계의 내부를 열어 보이는 자이자 그 안을 보고만 자들이다. 그것을 그림으로 표현하는 존재들이다. 그래서 그림은 항상 보임과 감추어짐, 드러남과 은폐의 틈에서 흔들리고 찰나적으로 빛을 발하며 반짝인다.

김종복의 그림에서 산은 항상 전면적으로 등장한다. 솟아오른 봉우리와 운무, 견고하고 웅장한 산의 자태와 덩어리감, 시시각각 변화를 거듭하는 색채와 그 자연, 세계의 생성적인 측면을 동적으로 보여준다. 산과 함께 작가가 감동적으로 만난 모든 풍경은 결국 붓질과 색채로 펼쳐진다. 특히 후기로 접어들면서 그의 그림은 색채추상, 색면 추상과도 같이 단순해지고 추상화되는 과정을 보여준다. 거친 붓질이 가까스로 산의 윤곽과 내부를 얼추 드러낸다. 동시에 순수한 붓질, 몸짓을 가시화한다. 작가의 제작 행위가 우선적으로 감촉되는 그림이다. 붓놀림은 유사한 색채의 톤 아래 유영한다. 색채들은 기화하고 이동하며 흐른다. 붓질과 색채의 이 흐름과 이동, 흔들림, 진동은 작가의 신체성과 함께 자연의 생명력과 순간의 파동 같은 것을 짐작하게 해준다. 붓질과 색채로 파악되고 직관으로 포착된 세계의 한 순간이 이미지화되어 있는 것이다. 화면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환각적으로 흔들리고 겹쳐지는 느낌이다. 현란하고 화려한 색채는 변화무쌍한 대기의 변화를 드러내고 그 자연에서 받은 작가의 감정과 인상을 시각화하는 정보가 된다. 특히나 대상세계를 모두 색으로 환원하려는 적극적인 의지를 만난다. 그 색채는 사물의 고유색이나 결정적인 색채가 아니라 임의적이고 화면구성의 조형 아래 자율적으로 구축된 색이다. 따라서 김종복의 그림에는 자신의 기질이나 감각에 의해 받아들인 자연세계를 걷잡아 내려는 의지로 충만하다. 그리고 그 저간에는 자연만이 영원한 미적 감동과 정서를 자극하는 원천으로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및 한국인의 전통적인 산악숭배사상과 동양이 전통적인 산수화의 전통, 그리고 현대미술의 주관주의적 미학과 추상미술의 논리성들이 복합적으로 겹쳐지면서 이루어낸 결과물임을 증거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바로 그 같은 산 그림, 풍경화가 결국 한국현대미술의 한 전형성을 이룬 그림의 세계가 아닌가 한다. 그 어딘가에 김종복의 그림이 어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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