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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승예 / 내 안의 불안, 불안한 괴물 자화상

박영택

산해경이란 중국에서 가장 오래된 백과사전인데 이 책을 보면 기이한 새와 동물들, 신선과 마귀 등의 흥미로운 이미지가 등장한다. 당시 사람들이 상상해낸 온갖 괴물과 두려운 존재의 표상이 가득하다. 고구려고분속의 조인鳥人들이 그 안에서 출몰하기도 한다.

박승예 역시 상상해낸 공포스러운 괴물의 이미지를 그린다. 그런데 그 괴물은 다름아닌 자신의 얼굴 속에서 피어난다. 얼굴 속에 감추어진 또 다른 얼굴, 자기 내면이 품고 있던 또 다른 자아상이다. 그림이 정교하고 강렬하다. 볼펜으로 그린 그림인데 그 기법과 묘사력이 돋보인다. 그리고 얼음 같이 문장을 시각화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테라페이퍼라는 중성지 위에 볼펜을 계속해서 굴리면서, 원형의 선을 반복해서 끄적거렸다. 둥근 원형의 선들이 형상을 만들어나간다. 온통 꼬불거리는, 라면발 같고 곱슬머리 같은 선으로 채워졌는데 추상표현주의적인 이 선들이 모여서 선명한 구상을 보여주는 아이러니가 발생한다. 내부는 복잡하게 꼬였고 난해하고 미스터리지만 그것들이 모여서 반듯한, 그러나 부분적으로 균열이 일어나고 인간과 동물이 섞이고 손과 얼굴이 들러붙는 변종, 기형이 탄생했다. 집요하고 치밀한 그리기이자 그리는 노동과 시간이 요구되는 작업이다. 작가는 “그림을 그린다는 행위는 노동이라기보다는 좀 삭신이 쑤시는 유희 같다”고 말한다. 그 유희를 통해 떠도는 상념과 많은 사유와 지친 불면과 혼곤한 잠에서 발아하는 꿈들을 시각화하고 있는 것이다.

아크릴로 칠한 색 면을 부분적으로 만들고 그 위에 볼펜으로 덮어나가 얼굴을 그렸다. 중력이 법칙과 시간의 흐름에 의해 생겨난 물감이 흘러내리는 자취는 내면의 상처를 암시하거나 불안과 불만을 눈물처럼, 피처럼 뚝뚝 흘려놓기도 한다. 이는 볼펜만으로 이루어진 다소 건조한 그림에서 액체성과 유동성을 가시화하고 좀 더 회화적인, 자유로운 그림의 상태를 도모하는 차원에서 연출되는 편이다. 볼펜으로 굴린 선은 가장 원초적인 선이자 낙서나 막연히 무엇인가를 표현하기 위한 원초적인 몸짓, 마음의 음성을 연상시킨다. 또한 꼬불거리는 곡선은 직선에 비해 무엇인가를 묻어주고 다른 것과 어우러지는 한편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선이 되었다. 그리고 틀리지 않은 선이자 그림 그리는 이를 한없이 자유롭게 해주는 선이기도 하다. 박승예의 작업은 볼펜으로 정확한 데생, 드로잉을 하는데 상당히 완성도가 높고 그만큼 정확한 표현이 되고 있으며 일러스트레이션적인 도상화의 힘이 크게 다가온다. 메시지가 선명하고 강렬하게 다가온다. 그런데 그것이 너무 꽉 조여져서 오는 아쉬움이 있다. 그림이 지나치게 선명한 문장 같을 때 그림의 힘과 여운은 반감되는 편이다. 그렇지만 그림을 통해 떠도는 무수한 상념과 자신의 삶에서 유래하는 모든 관심과 불안 등을 집요하게 성찰하고 이를 타인과 소통하기 위한 시각화 작업은 주목된다. 여전히 미술이 언어가 되고 소통이 되며 인간과 삶에 대해 지속적인 질문을 던지는 일이라는 사실을 새삼 환기시켜주고 있는 것이다.

작가는 뱅글뱅글 돌아가는 선으로 자화상을 그렸다. 그런데 이 자화상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의 반영이 아니라 그로부터 출발해 낯선 존재로 변신해가는 이상한 자화상이다. 동물과 자신의 몸이 하나로 붙어서 이종교배된 형국이다. 마치 반인반수가 되었다. 자신의 얼굴과 그 얼굴이 가리고 있던 괴물 같은 또 다른 얼굴이 그렇게 들러붙었다. 흥미로운 얼굴에 강렬한 눈빛, 마임과도 같은 표현적인 손짓, 여러 동물의 형상이 공통적으로 검출된다. 얼굴이 그려진 부분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부분은 그대로 여백으로 놔두어서 마치 그려진 부분, 얼굴이 고립되거나 단절되어 있다는 느낌을 준다. 다소 무섭고 괴이한 얼굴이지만 아주 낯설지는 않다. 인간은 자신의 몸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 또 다른 존재를 꿈꾸는가 하면 자신의 얼굴 안에서 낯선 얼굴, 존재를 보기도 한다. 자기 자신을 담보해주는 것이 결코 이 얼굴, 몸일 수는 없는 것이다. 인간과 괴물의 날카로운 경계도 실은 없고 인간은 동물이자 고상한 인격체이기도 하고 순간 낯선 괴물이었다가 알 수 없는 존재로 부유하고 선회한다. 단일한 그 무엇이라고 명명될 수 없는 것, 거울에 비친 얼굴로만 재현될 수 없는 것이 인간이다. 박승예의 자화상 또한 그런 맥락에서 출몰한다.

작가는 자신의 얼굴이 재미있게 생겼다고 말한다. 재미있는 표정이나 상황을 만든 후 촬영하고 그 사진을 참조로 해서 낯선 괴물 같은 모습으로 변형한다. 작가가 마치 ‘마임’을 하고 있거나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는 인상이다. 머리는 신체에서 절단되고 분리된 상태다. 그 머리에 손이 붙어있다. 얼굴과 손만으로 이루어진 자화상이다. 타인에 대해 공격적이고 상처를 주는 무기가 되는 그 손의 끝은 붉게 물들었다. 손이 얼굴에 다양하게 붙어나가면서 돼지나 도베르만, 투구 등을 연상시켜준다. 충실하게 길들여진 투견의 공격성, 입이 꿰매진 돼지의 슬픔, 오리주둥이를 단 얼굴, 3M박스에 묻힌 얼굴, 혜안이 강요되는, 그래서 또 다른 눈을 가진 초상 등이 등장한다. 다람쥐 가면을 쓰고 오른팔이 유난히 길게 늘어져 있는 초상은 거부감을 주지 않는 숨은 얼굴에 평균화되는 오른손잡이의 강요와 그로인해 평균화되는 현대인, 그리고 그것이 자신이 존재를 한없이 무겁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 그로인해 괴물이 되어가는 것이라는 불안과 공포를 반영하는 그림이다.

작가에게 그림이란, 작업이란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고 내면과 생각과 감정을 메시지를 전달하는 일이다. 그림은 문장이 되고 책이 되고 일러스트레이션이 되었다. 강렬한 문장의 전언이다. 하나의 결정적인 장면을 압축하고 응고시켜 놓았다. 이 그림은 관객에게 무척 친절한 그림이다. 이야기를 가능한 쉽고 명확하게, 강하게 전달한다. 선명한 조형언어는 소통을 전제로 한다. 작가의 그림은 재미와 소통의 원활함을 목적으로 해서 구상형식에 이야기를 실었다. 그 이야기는 자신에 관한 독백이지만 동시에 보편적인 동시대인들의 것이기도 하다. 작가는 모종의 괴물을 그렸다. 자신의 얼굴 속에서 빠져나오는, 분리되지 않는 괴물이다. 이 초상은 단지 자신의 것에 그치지 않는다. 이 얼굴은 누구나 지니고 있는 얼굴이고 불안과 공포이다.

나란 존재는 본래부터 단일한 것으로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훈육되고 만들어진다. 길들여진다. 저마다 하나의 가면(얼굴), 페르소나를 쓰고 연기한다. 따라서 자아란 부재하다. 라캉식으로 말한다면 “나는 여기에 없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단일한 표정, 얼굴 뒤에 무수한 얼굴, 욕망을 감추고 산다. 차마 그것이 밖으로 삐져나올 까봐 관리하다. 억압한다. 그러나 순간 그 맨 얼굴들이 부지불식간에 출몰하기도 한다. 그럴 때 사람들은 가면을 찢고 괴물의 얼굴을 보여준다. 두려운 대상이 현현하는 순간이다. 사람들은 그 내면에 감추고 있는 괴물이 언제 어떻게 출현할 지 늘 두려워하고 해서 감시하고 억누르고 지우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그 얼굴, 괴물은 좀처럼 지워지지 않는다. 아니 사라지지 않는다. 타자들은 내가 억압하고 있는 괴물의 얼굴을 볼 수도 있다. 나 역시 타인의 몸속에 숨겨진 괴물을 얼핏 볼 때가 있다. 결국 작가는 주어진 사회시스템이 요구하는 틀에 의해 연출되어지는 얼굴, 정체성 그리고 얼굴이 가리고 있는 불안과 공포에 대해 이야기한다. 왜 이런 이야기의 드러냄, 외화가 필요할까? 그림은 그렇게 내면에 잠긴, 숨겨진 것들을 드러내버리는 일이다. 그것은 트라우마와 치유와 관계된다. 각성하는 일이자 타인과 소통하고 위로하고 위로받고 싶다는 투정이자 애정이다.

결국 이 그림은 자신의 내면을 보는 작업이다. 인간이 가진 면면의 다면성들에 대한 이야기인 것이다. 특히 존재하는 그러나 존재하지 않는 역설적인 괴물, 공포와 불안의 초상이 근작을 채우고 있다. 작가란 존재는 생각이 많고 하고 싶은 말이 많은 존재다, 작가란 삶에 투정을 부리고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에 대해 늘상 지껄이는 자다. 해답이나 정답을 바라지 않고 손쉽게 결론을 내리지 않으면서 속단하지 않으면서 지치지 않는 질문을 던진다. 박승예는 ‘골방작가’로서 하루 종일 작업실에서 지내며 작업을 한다. 그러나 동시에 모뎀통신세대로서 쇼셜네트워크를 통해 외부의 누군가와 열심히 소식을 전하고 의견을 개진하고 떠드는 것이 더없이 좋다고도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행복한 사람, 작가가 되고 싶다고 한다. 그래서 그 행복한 삶을 가능하게 하기 위해, 지금 자신이 행복하기 위해 필요한 것, 그 행복을 억압하고 방해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하고 그 생각의 덩어리를 볼펜으로 형상화시키는 일을 하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니 볼펜은 사실 쓰기의 도구이다.) 그 내용이 다소 상식적이며 실존적인 틀에서 반복되고 있다는 아쉬움도 있지만 생각을 철저하게 밀고나가며 그것의 효과적인 시각화에 몰입하는 진지한 작가를 만나기도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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