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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우 / 식물성의 자취

박영택

동물성과 다른 식물성은 고요와 정지, 부동과 침묵, 스스로의 자활적 생의 도모를 그 특징으로 한다. 빛과 물만으로 광합성 작용을 하며 자존하는 식물의 생은 놀랍다. 그것은 다툼과 살육, 경쟁과 희생을 통해서만 살아가는 동물성의 육체에 반성의 자리를 마련해준다. 동물의 생이 의타적이라면 식물은 스스로 생을 유지한다. 또한 식물은 구분과 차별없이 공존하며 모든 경계를 지우고 메꿔나가기도 한다. 모든 대지를, 여백을 초록으로 물들이며 번성하는 풀들과 그 사이로 솟아 흔들리는 꽃들의 생애는 또한 그지없는 심미성의 세계를 축복으로 안긴다.

그래서일까, 선인들은 식물성의 육체에 가닿고자 그토록 열망했던 것 같다. 동물성의 육체를 중화하고 식물이 지닌 덕목을 내재화하면서 바람직한 인간상을 구현하고자 했던 것이다. 그것이 산수화나 사군자, 민화 등의 그림 속에서 피어나고 자연과의 교감과 친화적 관계 아래 부려진 생의 모든 자취가 그렇고 그 자리를 차지한 사물들에 대한 수식이 또한 그렇다. 그래서 식물에 대한 옛사람들의 지극한 마음의 자취를 떠올려보는 것은 이 각박하고 살벌한, 무한경쟁으로 내몰린 오늘의 현실을 되돌아보게 하는 힘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식물성을 논하는 것, 식물성의 의미를 사유하는 것, 식물의 자취를 따라가 보고 이를 그림으로 형상화하는 일은 그런 맥락에서 자리한다.

이근우는 그런 식물성의 자취를 모필로 따라가 본다. 이미 오래전부터 식물을 그려온 그이지만 새삼 식물성을 생각해보고 그 미덕을 그림으로 형상화하려는 것이다. 이전에도 그의 그림은 다분히 선화처럼 함축적인 대상, 간결한 붓선, 부분적인 설채, 그리고 얼룩과 반점, 튕겨진 점의 자취 들이 어우러져서 이룬 그림으로 특히나 모필과 먹의 맛을 직관적으로 부려놓는 편이었다. 그것은 그려진 대상보다도, 주제의식보다도 그림을 이루는 흔적, 그러니까 그림을 그리는 동안의 작가의 마음과 몸의 상황성을 알려주는 기호로서 작용하는 그림에 가까워보였다.

근작은 그런 흔적들이 다시 식물성이라는 내용을 좀더 드러내는 쪽으로 몰려간다. 그러나 여전히 이전 작업의 형식적 측면들은 유지된다. 그는 종이에 모필과 먹으로 식물의 흔적을 조심스레 그려본다. 가는 선들은 흔들리고 떨어댄다. 생명의 탄생과 팽창, 확산과 소멸의 과정들이 얼추 연상된다. 그런 시간성이 흐르고 있고 순환의 과정이 펼쳐진다. 가늘고 긴 줄기가 위로 솟아오르고 그 정점에 부푼 씨방들이 터진다. 이내 꽃이 탄생하고 씨앗과 꽃가루는 사방으로 부유한다. 그런 풍경이 자연스레 떠오르는 그림이다. 그것은 구체적인 자연풍경이나 정물처럼 놓여진 식물의 모습을 재현한 그림이 아니다. 실재하는 자연이 아니다. 마음속의 자연이랄까. 심상의 식물풍경이라고나 할까.

이근우가 그린 것은 식물이란 존재가 지닌 본성이나 덕목을 가시화하기 위한 배려이다. 이른바 식물성의 초상일 것이다. 생각해보면 그런 것이 결국 조선시대 선비들이 쳤던 사군자다. 그래서 아름답거나 화려하거나 그럴듯한 꽃들의 무리나 군집이 이룬 풍경도 아니다. 일반적인 자연풍경이나 식물을 소재로 해서 그린 정물화가 아니다. 그저 작고 보잘것없고 가냘픈 식물이 흩어진 장면이다. 작가가 기억하고 있었고 마음속에서 그렇게 떠오르는 모습의 형상화다. 식물이란 존재를 가슴으로 품어서 그것을 발효하고 부풀려내 나온 이미지다.

마냥 흔들리는 줄기와 잎, 꽃들이 초서처럼, 숨결이나 작은 몸짓처럼 자리했다. 이 서체적인 선들이 문득 식물의 한 자리를 연상시켜준다. 다시 그것은 자발적인 선 본래의 모습으로 되돌아가 꿈틀거린다. 그리고는 이내 식물로 돌아오기를 반복한다. 필선이자 그림이고 그림이자 필선으로 순환한다. 즉흥적인 마음의 자취들이고 운율이다.

근작은 크게 두 가지로 그림은 나뉘는데 하나는 화분이 배경으로 등장하고 그 앞에 뿌리를 드러낸 식물이 수직으로 상승하듯 자리하고 있는 그림이다. 식물의 뿌리가 드러난 것은 강한 생명력을 상징한다. 속박과 강제적인 제도와 틀을 연상시키는 화분 속에서 빠져나와 자유롭게 자리한 식물의 모습이다. 그것은 식물이 추구하는 자유의 모습이자 모든 굴레와 제도로부터 벗어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램이 투영된 그림으로 보인다. 여전히 발묵과 선의 맛, 여백이 강조된 그림이다. 다분히 문인화적인 제스처와 정신성을 강조한 그림이란 얘기다.

반면 다른 그림들은 중심도 주변도 없이 식물들이 흩어져있다. 그린 듯 그려지지 않은 듯, 물감을 뿌려댄 듯, 혹은 인위성과 무위성이 혼재된, 다소 애매한 풍경이다. 마치 초서를 써내려가듯 지극히 자유롭고 무심하게 그어진 선들이 문득 풀과 줄기와 꽃을 떠올려주는 이미지다. 나로서는 이 그림이 앞서 언급한 화분그림보다 더 좋다. 이 작가가 지닌 필선의 맛과 호흡이 적극적으로 드러나서 좋고 식물성이 지닌 덕목을 형상화하려는 시도 등이 그렇다. (나로서는 그런 시도가 좀더 효과적으로 풀려나왔으면 한다.) 그림 그 자체의 맛을 풍성하게 지니고 있어서, 그런 효과가 감촉되어서 좋다. 모필의 맛도 차이를 주어 가늘고 섬세한가 하면 꾸욱 눌러서 뒤집어 빼내기도 한다. 그렇게 스며들고 퍼져나가는 면을 강조하기도 하고 속도감 있게 먹물을 흩뿌려놓거나 거칠게 비벼놓은 형국을 공존시킨다. 그만큼 먹과 모필의 맛들이 다채롭고 재미있다. 그리고 그런 실험들이 극단적이거나 과잉으로 흐르지 않고 적절한 상태에서 긴장을 이루는 편이다.

화선지와 광목천을 바탕으로 해서 모필과 먹을 사용해 식물성을 질문하는 작가의 근작은 필묵의 유희와 선의 매력, 그리고 동시대에 새삼 식물과 자연을 상기해야 하는 이유 등을 버무려놓은 그림이다. 이를 통해 식물성에 대해 생각하게 함과 동시에 동양화 전통 속에 내재한 그 식물성의 자취를 그렸던 궁극적 이유가 무엇이며 또한 오늘날 그런 덕목이 새삼 우리에게 어떤 의미에서 요구되어야 하는지를 생각하게 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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