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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광 / 삼매와 광기의 사이

박영택


중광 추억
1990년대 초반 미술관에서 큐레이터로 근무하던 시절, 중광(重光, 1935-2003)은 내가 근무하는 전시장을 자주 찾았다. 요란한(?) 복장에 성큼성큼 걸어와서는 한 바퀴 ‘휘익’ 둘러 보고 가곤 했는데 나갈 때는 반드시 한 마디 평을 하고 갔다. 나는 그 소리를 듣기 좋아했다. 사실 난 그 당시 중광의 작품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있지는 않았다. 흥미있고 파격적이며 해학성 등을 두루 지니고 있기는 하지만 독창적이랄까, 작업 자체의 질적 측면은 그다지 새로워 보이지는 않았다. 특히 작품성에 대한 차분한 논의보다도 그의 남다른 행색이나 기행에 대해 떠들어대는 언론의 주목에 대해 호감이 가는 편이 아니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미술을 다루는 언론의 태도는 여전히 변함없이 선정적이고 지극히 얕고 가볍다. 질에 대한 논의보다는 대중성, 상업성, 선정성이 그 자리를 대체해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실력이고 능력으로 인정되고 논의된다.

중광이 전시장 문턱을 빠져나가기 전에 한 마디 던져놓고 간 그 음성은 내내 귓가에 맴도는 나름의 힘이 있었다. 결론적으로 그의 그림 보는 안목이 꽤나 매서웠다는 것이다. 해서 속으로 “이거봐라, 중광의 그림 보는 눈이 예사롭지 않구나”하는 생각을 하곤 했다. 그 당시 그가 열심히 전시장을 다녔다는 사실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그가 아무런 미술사의 지식이나 교육 없이 지신의 마음이나 정신세계에서만 그림을 길어 올린 것은 아니다. 도를 닦고 선을 추구하던 스님이 어느 날 순간 깨달으셔서 독창적이고 새로운 무엇인가를 갑자기 창조해낸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 누구도 어떠한 영향에서 자유로울 수 없고 완전히 혼자 깨달아서 좋은 그림을 그릴 수는 없다. 그는 열심히 현대미술을 공부했고 다른 작가들이 작업도 부지런히 보았던 것이다. 그리고 이를 다시 주물러 자기 속으로 집어넣고 버무려 무엇인가를 만들어 내려했다. 일반작가들과는 달리 중광은 해탈과 득오, 선매의 경지를 추구하던 이라 그 정신의 깊이와 폭이 남달랐고 그로인해 그의 그림의 내용과 성격이 규정되는 것도 분명하다. 그러나 결국 그는 조형작업을 한 이다. 미술인이다. 그가 깨닫고 느끼고 추구했던 세계를 시각이미지로 보여준 이다. 따라서 그 남겨진 흔적 자체가 가능하다면, 그런 세계가 어떻게 잘 표상하고 있는지가 중요한 문제인 것이다. 그러나 그 심오한 세계를 단지 이미지만으로 말하기도 실은 어려운 일이다. 이래저래 중광 작품을 평론하는 일은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중광이 빈번히 전시장을 다니던 시기는,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 중반의 상황은 한국현대미술이 이전과는 다른 차원에서 새로운 징후로 재편되던 때였다. 70년대의 다소 획일적인 추상미술과 80년대의 무거운 주제의식에 사로잡힌 민중미술이 지난 자리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밀려들고 개방과 자유로운 온갖 양상들이 만개하던 시기였다. 바야흐로 미술이 이전의 다소 억압된 틀에서 해방되어 다채로운 실험들이 줄을 이었고 새로운 감각으로 무장한 신세대들이 등장하였다. 그 시기에 중광의 작업도 가장 뜨거웠었다. 그러다가 90년대 중반을 지나 어느 날부터 중광의 발길이 뚝 끊어졌고 이후 백담사에 갔다는 소식과 병중이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2000년에 돌돌마전을 열고 ‘괜히 왔다 간다‘란 부제를 달았는데 그 전시를 끝내고 얼마 후에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전시에 나온, 수묵으로 무심히 그린 몇 점의 소박한 달마상이 좋았다. 마치 70년대에 그가 그린 선화의 경지가 새삼스럽게 투영되었다. 그러나 그 전시가 결국 마지막이었다. 우리 모두 이내 사라져버릴 존재들이긴 하지만 그래서 이렇게 찰나의 생을 고비처럼 살고 있지만 막상 그가 이 세상에 부재하고 더 이상 그의 굵게 깔린 음성으로 벌처럼 쏘던 야무진 한 말씀을 더 이상 전해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조금은 슬펐다.

그렇게 중광이 죽은 지 10여년의 세월이 훌쩍 지났다. 그의 존재와 명성이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금씩 빠져나가는 한편 그의 그림에 대한 추억과 의미들이 사라지려는 순간에 그를 기념하는 전시가 열리게 되었다. 이번에 전시될 약 150여점 이상의 작품들을 미리 일별하고 그간의 자료들을 찬찬히 살펴보는 시간을 가졌다. 오랜 전에 보았고 많이 보았다고 생각해왔지만 새삼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개별적인 작품이 의미보다도 나로서는 무엇보다도 놀라운 것이 바로 중광의 창작충동, 그러니까 에너지나 열정 같은 것이었다. 그가 남긴 이 많은 작업들을 보면서 그의 뜨거운 창작열이 궁금해졌다. 분명 그는 작업뿐만이 아니라 삶도 열정적으로 소진시키고 사라진 이다. 결국 사라질 이 허망한 인생을 극한으로 밀고나가 죄다 불지르듯이 산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렇게 산 삶의 행간에서 불거져 나온 그의 작업들은 또 무엇이었을까?

중광의 예술
그는 중이었고 화가였고 그런가하면 미친 중, 걸레스님이자 광기의 예술가라고 불렸다. 과도한 음주와 흡연, 성적 일탈을 일삼으며 지독한 자학으로 일관한 그는 한때 중으로 살았고 화가로서 생을 보낸 이다. 그렇게 유별나게 기행을 일삼아야 좋은 예술을 하고 또 뛰어난 예술가가 되나 하는 의문도 들지만 그 세계를 전혀 이해 못할 것도 아니었다. 이 허무한 세상에서 진정한 자유로움과 깨달음을 추구한다는 것은 고통스럽고 외로운 길이다. 더구나 좋은 작품을 창조하고 그것을 지속적으로 밀어젖히며 사는 예술가의 생애를 유지한다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다. 그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올인’하고 거의 죽음에 이르러야 하는 일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누구도 그런 길을 그렇게 가파르게, 극단으로, 모서리에 붙어 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그림을 그린다는 것, 예술을 한다는 것은 모든 관습과 상투적 관념에 목숨을 걸고 저항하는 일이고 그런 과정에서 나오는 것이다. 그런 생이 진정한 예술가, 아방가르디스트로서의 삶이자 작업세계다. 그러나 누가 그 길을 그렇게 힘들여 가겠는가? 중광은 그런 길을 가고자 했을까?

“나는 20세기 문화예술에 이빨 없는 킬러이다. 보편타당한 진선미이니 전통이니 정통이니 법도이니 하는 따위 쓰레기 같은 소리다...나는 하늘과 땅을 한 입에 몽땅 삼켜 우주의 똥을 싸며 미친 무당처럼 이 세상을 한 바탕 살풀이 하는 거다.”(중광)

중광은 속세를 출가해 수행하는 중이 되었다. 그런 과정에서 그는 선시와 선화를 그렸다. 따라서 그의 예술행위는 미술 내부에서 발아한 게 아니라 불교라는 종교와 선이라는 세계에서 나아간다. 수행의 연장선상에서 그리기와 만들기, 퍼포먼스와 기행적 삶이 맞물려갔다. 선방에서 경전 공부와 참선을 통해 깨달음의 경지를 얻는 이도 있을 것이고 세상 밖으로 나가 뒹굴며 깨닫고자 하는 이도 있을 것이다. 그는 선방에서 머물다 세상으로 나갔고 참선과 경전공부에서 선시를 짓고 문자를 쓰고 달마를 그리고 나아가 다양한 그림과 도자기를 만들고 퍼포먼스나 해프닝을 벌였다. 그 모든 행위는 수행하는 중으로서의 생애에서 불가피하게 파생된 흔적이자 결과일 수 도 있다.
그러나 모든 중이 그렇게 선시나 선화를 제작하고 현대미술의 여러 경향들을 체득해내면서 작가로서 작품활동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중광은 스님으로 머물기에는 그 안에 내재한 예술가로서의 열정이 너무 컸던 이다. 그래서 그는 승방이나 불교계 안에서 머물지 못하고 화단으로 나왔고 이곳 미술계에서도 만족치 못해 세계로 나갔다. 그 사실을 자랑하곤 했다. 그는 현대미술가로서 인정받고 싶어 했다. 이 인정의 욕망은 분명 세속적인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작품을 잘 몰라준다고 불평하며 스스로를 적극 알리고자 했다. 그는 늘상 자신의 작품을 자랑하고 다녔다. 혹 누군가 핀잔을 주면 그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좇같이, 사람들이 몰라주니 내라도 말해야 할 것이 아니냐”

스님으로 선을 깊이 체득한 그는 깨달음과 득오의 경지를 갈무리하려는 열정과 단호함이 단단한 ‘뼉다구’로 자리한 삶을 그의 예술세계의 중심에 위치시켰다. 하긴 예술가의 삶이란 모종의 깨달음의 길, 도의 길을 가는 것과 별반 다르지 않다. 따라서 예술과 종교는 서로 겹쳐진다. 정답 없는 길을 가면서, 스스로를 가혹하게 몰면서 고뇌하며 간다. 그 과정 속에서 분비물처럼 작품들이 흩어진다. 그 그림그리기는 철저하게 자신에게 속하면서 동시에 대중들에게 반향 된다.

그는 스스로를 걸레라 칭했다. 더러운 것을 훔치고 깨끗하게 만들지만 정작 자신은 세속의 모든 때와 더러움을 몸소 껴안는다는 의미이다. 세상을 정화하고자 하는 의욕과 함께 기존의 형식적 그림이나 제도권에서 논의되는 그림과는 무척 다른 붓놀이를 거침없이 선보였다. 그것은 거창한 작품제작이 아니라 기존 미술, 서예에 대한 저항이자 상식적인 미학에 대한 거부이고 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미학에 대한 개안의 요청이었다. 그래서 그는 불가피하게 파격과 일탈의 방법론을 선보인다. 그것은 단지 괴이하고 요란한 전위가 아니라 새로운 개안과 맞물리는 행위이고 무지한 대중들을 개안시키려는 의지이기에 그만큼 낯설고 생경함이 있었다. 동시에 그의 글씨와 그림, 도자기는 교육받기 이전의, 문명의 세례를 받기 이전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고 동심적인 것으로 가득하다. 마치 처음으로 붓을 잡아본 아이들의 그림, 낙서처럼 그려지고 쓰여졌다. 기존의 관습들을 지우고 관행과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뭉개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는 되는대로 그리고 되는 대로 쓰고 되는 대로 빚었다. 이 ‘되는 대로’란 모든 규율과 법칙, 상식과 보편을 공략하려는 시도에서 불가피하게 나온 전략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 전통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지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지점에서 시작될 수는 없다.

그는 스님으로서 깊은 불교적 이해와 선화, 선시적 소양을 중심에 깔고 그 위에 다양한 현대미술의 영향을 받아들이는 한편 자신과 교류했던 이들의 작업에 큰 영향을 받는다. 특히 피카소와 장욱진이 그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그의 그림이 추상표현주의 등 현대미술의 여러 흔적들을 상기시켜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추구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 그에게 예술 그 자체는 결코 목적이 되지 않았다.

중광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배우거나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다,..참 예술은 적어도 느끼거나 깨달아야 한다...참예술은 혼이요, 삶이요, 혼탁한 정신을 치료해주는 정화수요, 생명이다.”

예술은 단순하게 특정한 대상을 기계적으로 복제하는 것이라기보다는 ‘새로운 세계관을 통해 사물의 질서를 구획하는 것’이다. 사물과 세계를 보는 안목을 확장시키고 새롭게 사유하게 한다. 세계에 대한 관점을 이전과는 다르게 위치시키고 확립시킨다. 여기에 창조의 진정한 의미가 도사리고 있다. 좋은 예술은 단지 새로운 것의 추구가 아니라 한 시대를 규정하는 가치관과 당대 삶을 강제하는 가치관, 세계관을 의문시하고 의심을 갖는 일이다. 상투적인 상식과 굳어진 가치관을 넘어서서 새로운 것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낡은 가치관과 세계관을 문제시하고 그것이 왜 낡은 것이며 낡은 것이 어떤 것인지를 밝히는 한편 그래서 어떤 것이 과연 새로운 것인지를 알아내고 이를 설득력 있는 조형언어로 시각화시키는 일이다. 그런 작업을 우리는 아방가르드작업이라거나 또는 새로운 작업, 의미 있는 작업이라고 말한다. 세계에 대한 인식을 바꾸는 일이 진정한 예술이고 예술가의 일이다. 그것은 새로운 존재를 구성하는 일이자 새로운 눈으로 환생하는 일이다. 그랬을 때 우리는 그 작가를 새로운 작가라고 칭한다. 과연 중광은 새로운 작가인가? 그의 작업은 새로운 작업인가? 그는 우리의 보편적이고 상식적인 어떤 미학을 문제시하였을까? 그가 발견한 아름다움의 미학은 무엇일까? 그의 작업은 한국현대미술사에서 어떤 위상을 차지하고 있는가?

중광의 작가로서의 삶
중광은 고립무원의 섬, 제주도에서 태어났다. 육지로부터, 내지로부터 멀리 떨어진 고독한 섬에서 외롭고 가난하게 태어났다. 그의 세속의 이름은 고창율, 1935년 1월 4일생으로 알려져 있다. 모국어를 상실한 일제식민지치하에서 태어난 그는 대대로 물려받은 가난과 대동아전쟁과 해방, 한국전쟁과 4.3항쟁, 분단, 수인생활, 그리고 출가와 환속의 길을 걸어왔다. “큰 배 마냥 떠 있는 제주도가 하나의 큰 감옥처럼 생각되었고 이 곳을 탈출하지 못하면 내 체내에 쳐 박혀 있는 바람기가 나를 미치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었지. 나를 지금 떠돌게 하는 것은 바람의 생리 때문이거든, 또 하나 유년의 고행 속에 잊을 수 없는 일은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 현장을 많이 목격한 것이야.”
시인 미당이 자신을 키운 것은 팔할이 바람이라고 말했던 것처럼 중광은 자신 속의 바람기에 이끌려 떠돌며 끝내 중이 되고 화가가 되었다. 가난과 죽음, 고독과 방황이 그의 생애를 지배했다. 전후의 지독한 환멸이 그를 출가의 길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산으로 들어간 그는 구도의 길을 가고 그런 과정에 자연스레 선 수행, 선시와 선화를 접하게 되었다. 아마도 선시, 선화에 재능을 보이고 이에 대한 관심이 그를 본격적인 창작의 길로 이끌었는지 모르겠다. 기록에 의하면 그는 1977년에 선시와 선화를 발표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는다. 공식적인 데뷔인 셈이다. 그러니까 그는 스님으로서 선공부의 연장선에서 선화와 선시를 발표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 둘은 별개의 것이 아니다. 스님들은 공부와 수도의 일환으로 서예와 선화, 선시를 다룬다. 종종 스님들의 선화 전시를 만난다. 중광은 80년대에 들어와 본격적인 작가의 길을 간다. 그러나 이미 그가 남긴 1970년대 그림에는 중광 작품의 세계를 규정하는 것들이 함축되어 있다. 종이에 먹으로 간결하게 그린 생명체는 순간적인 필선으로 즉흥성을 강하게 띄며 먹의 농담이 자유롭게 구사되어 있다. 그리고 악센트로 찍힌 색채, 꾸밈없는 표현, 해학적인 도상화 그리고 선의 강약의 자재로운 구사 등에서 이미 이른 시기에 자신만의 독자한 작업세계를 형성했음을 보여준다. 1970년대 그림에서는 당시 서세옥이 유희적인 모필로 그려놓은 동물의 해학성도 연상시켜주는 편이다. 더구나 장욱진의 그림에서 보이는 동심에 가득한 형상들이 자리하고 있음도 볼 수 잇다.

그가 미술계에 본격적인 전시를 선보인 것은 1981년 미화랑에서의 전시였다. 당시 전시 제목은 ‘선화선시작가 중광전’이다. 전시도록에는 “오랜 수도생활을 한 자만이 기를 수 있는 달마상과 무구無垢상”이라 쓰여 있었다. 달마, 난, 닭, 동자상, 석란도, 새, 장승, 매화 등이 등장하는데 한결같이 파격적인 편이다. 서예와 사군자를 치던 능란한 솜씨가 활달히 변용되어 나온 사례다. 이때 그림은 초기 고암의 묵죽이나 묵란을 연상시키는 먹의 힘찬 기운이 있고 형상의 파격이 있었다. 이후 1984년 다시 미화랑에서 전시를 하고 1989년에는 예화랑에서 개인전을 연다. 1996년 시몬갤러리에서 열린 개인전에서는 오브제 작업이 등장한다. 이 전시에서 그는 우리 민속품을 오브제로 활용해 화면에 부착하였다. 이른바 콜라주이나 레디메이드 작업이다. 떡살이나 먹통, 그릇, 고서와 금분 등을 사용해 화면에 부착하고 그림과 함께 설치했다. 초기의 수묵작업 위주에서 점차 색상을 쓰고 캔버스에 유체나 콜라주, 오브제작업으로 나가는 한편 1990년대에 와서는 액션페인팅과도 같은 행위예술을 한다. 당시 19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에 이루어지는 캔버스 작업 역시 과감하고 격렬한 붓질로 화면을 점유해나가는 한편 물감의 물성을 강조하고 거침없는 몸짓을 선명하게 드러내는 작업을 선보인다. 그 시기가 중광 창작의 가장 뜨거운 시간이었다고 본다.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에 그는 온갖 장르를 넘나들고 다양한 매체를 구사하면서 자신의 선화를 극대화한다. 분청도자와 다완제작도 흙이란 물질의 본성을 지극히 자유로이 다루고 가장 편안하게 편애하는 작업이라면 그리고 그 흙이 드러내고 싶은 형상을 손의 촉감을 고스란히 살려 주물러대면서 풀어내고 있다면 그림 역시 동일하다. 도자기를 만들고 그위에 그림을 그리고 유약을 칠하는 행위 또한 다분히 퍼포먼스적이다.

“초벌구이를 하기 앞서 한 번의 칼놀림에 새김, 즉 일도일각(一刀一刻)의 정신으로 각을 했고, 그 각을 중심으로 그림을 그리고, 채색을 했다. 도식화, 상투화된 전통적인 상감기법으로 도화를 하자면 공예적인 한계를 벗어나기 어렵고, 그래서 자유로워야 할 창작에 제약이 많다고 판단했다. 상감기법을 배제했다고 해서 우리의 빛나는 전통을 송두리째 외면하지는 않았다. 각이 재미있게 시도되었던 신라토기의 조형기법을 내 나름대로 오늘에 살펴보고자 했다.”(중광)

그는 다완, 병, 달마와 동자상을 지닌 여러 도자를 만들었다. 한결같이 흙을 최대한 주무르고 짓누르고 뭉개서 흙의 원초적인 촉각성을 극대화했다. 그는 자신의 다완을 종종 “내 개떡 같은 다완”이라고 말했다. 최종태는 중광의 도자작업에 대해 “항아리 빚고 칠하는 데에서 보다 더 그다운 면모가 잘 나타난 듯 싶었다. 아무렇게나 만들어진 것 같은, 속이 휑하니 비어 있는 항아리나 그릇의 모습이 꼭 중광 같다는 생각을 했다. 서투르고 거칠고 그렇게 만들어진 어찌 보면 흉측하기까지 한 그 그릇을 보면서도 아름답다 하는 기분이 생기는 데 참 묘한 일이었다.” 라고 말했다.

중광은 흙을 빚어 무엇인가를 “개떡같이” 만들듯이 역시 물감을 가지고 “개떡같은” 그림을 그렸다. 그는 물감을 뿌리고 긋고 칠하고 올리는 등의 여러 행위를 반복하면서 그 물감과 붓질의 본성을 고스란히 살리고자 한다. 중광의 그림은 흘러내리는 물감이 자아내는 자연스러운 흔적, 순간적인 충동으로 일군 화면, 튕기고 뿌리 자취들, 그리고 그 사이로 등장하는 천진한 동물의 형상이 등장하는데 그것은 그의 먹그림과 동일한 주제를 내포하고 있다. 그런데 이 추상적인 작업들은 외형적인 유사성에 견주면 이른바 뜨거운 추상표현주의풍이 그림들에 해당한다. 타피에스나 폴록 등이 그림이 오버랩 되는 것이다. 아울러 당시 황창배의 탈동양화적인 작업, 그러니까 온갖 재료와 매체를 넘나들면서 동양화의 경계를 와해시키던 자유로운 작업들과의 유사성이 강하게 검출된다. 해학적인 도상, 물감의 질료성을 강조하는 작업, 문자와 숫자, 낙서 등이 이미지와 공존하는 작업, 그러니까 다분히 파격적이고 기존이 관습적인 틀에서 해방되고자 하는 의지 등은 이 두 작가에게 공통된 요소들이다. 그리고 그 작업의 형태적 유사성이나 방법론 역시 매우 동일하다.

중광의 현대미술
중광은 이미 60년대에 서화를 배웠고 익혔다고 한다. 어떤 연유에서인지는 모르지만 그 사건은 중광 안에 잠재되어 있는 미술적 재능이 개안하는 순간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단지 스님들의 여가적 차원이거나 종교적 틀 안에서 이루어지는 선화나 서예에 만족치 못했다. 그는 순수미술, 이른바 현대미술을 하고자 했다. 물론 그 안에는 선사상이나 그가 추구한 깨달음이 구현되는 방편으로서의 성격은 결코 망실되지 않는다. 그는 어쩌면 현대미술의 성격에서, 흔적에서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사유의 형식들을 보았는지 모른다.

새삼 그가 이해하는 현대미술이 무엇이었을까가 궁금해졌다. 그는 우선 피카소를 자주 언급했다. 그를 의식하고 있다는 반증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피카소는 데생에 의해서 공부를 했지만 나는 데생이 절대 필요 없다. 나는 무아에서 심상의 작업을 했을 뿐이다. 물감이고 재료고, 동양붓이건, 서양붓이건. 걸레건 손톱이건 손에 걸리는 대로 작업을 한다. 나에게는 서양화 동양화가 따로 없다.”

생각해보니 그는 한국의 피카소라고도 불렸다. 사실 피카소는 특정 화가의 이름에 머물지 않는다. 그 이름은 현대미술을 전적으로 대변한다. 상징한다. 중광 그림에는 분명 피카소의 그림이 보여주는 유형을 연상시키는 자취들이 어른거린다. 피카소처럼 중광 역시 방대한 작품을 생산했으며 온갖 장르를 넘나들고자 했다. 중광이 종이에 먹그림뿐만 아니라 캔버스에 유채, 분청도자 및 테라코타, 그리고 행위예술까지 해낸 이유도 특정 매체에 저당잡히지 않으려는 제스처이자 기능적이고 관습화된 미술경향에 저항하려는 의지이며 동시에 당시 그가 접한 여러 현대미술의 정보 속에서 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피카소뿐만 아니라 전후에 이 땅에 급속히 수용된 앙포르멜도 그에게 큰 영향을 끼쳤으며 동시대 작가들의 작업 또한 그는 열심히 공부하였던 것 같다. 아울러 그는 옛날 만화들, 십이지상, 목판 탁본들, 책들과 필사본들을 공부했고 유럽과 미국미술도 열심히 보았다고 한다.

왜 그는 그토록 열심히 미술공부를 하였을까? 그렇다면 그는 단지 선화에 머무는 그림으로 만족치 않았다는 얘기다. 그는 철저히 현대미술을 공부하고 우리 전통미술의 아름다움도 깨달아가면서 이를 자신의 불교적 사유세계와 합치해서 무엇인가를 만들고자 했을 것이다. 여기에는 나름의 개인적 한도 개입되어 있다.

“내 내면에는 이런 한이 있다. 나는 너무나 한국에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 중광 그림은 첫째 전통화를 공부한 전통 화가가 아니다. 온갖 모략으로 매도하고 정규미술대학을 못나왔다고 하며 인맥산맥을 찾아다니는 무리들에게 지금까지도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내 가슴 속에는 예술적 복수심이 가득 차있었다...첫째, 정직, 창작, 실험, 정신과 혼신을 다하는 집중력으로 열심히 공부하는 것 뿐이다. 둘째 예술생활은 금욕, 명예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
중광이 자신의 그림을 형성하는데 있어 가장 결정적 역할을 한 존재는 바로 장욱진이다. 그는 “장욱진 화백의 말씀에 홀딱 반해버렸다”고 말한다. 장욱진과의 교류가 그의 그림에 끼친 영향은 크다. 특히 먹그림으로 새와 동물, 사람들을 해학적으로 그린 그림들에서는 장욱진 그림의 맛이 물씬 풍긴다. 우리 고미술의 영향을 유니크하게 발산하는가 하면 어눌하면서도 자유분방함이 있고 무엇보다도 동심적이다. 아이들 그림 같은 유치함도 질펀하게 깔고 있는 것이다. 이 둘은 서로가 함께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서로 만나면 술을 마시고 붓, 연필, 매직, 색연필 등을 가지고 선문답식 그림 10여점을 합작한 것이다. '말도 없이 술잔만 주고 받으며 한 획씩 그려 넣은 그림, 그것은 글자 그대로 염화 미소였다. 이 일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장욱진 화백과 나만이 아는 일이다.“(중광) 1970년대 말의 일이다.

장욱진의 그림과 이영학의 조각 그리고 이중섭이 그림에서 그는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그림의 세계를 발견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작품을 좋아했다. 그런가하면 피카소와 장 뒤뷔페, 추상표현주의의 강렬한 액션과 자유로운 표현방법론이 그에게 여러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런 작품들 속에서 그가 지향하는 자유와 무애, 천진함과 해학, 무한한 동심의 한 자락을 보았을 것이다. 그의 그림이 추상표현주의 등 현대미술의 여러 흔적들을 강하게 상기시켜주기도 하지만 그러나 그것들이 추구한 것과는 다른 차원에서 작동한다고 하겠다. 그에게 예술 그 자체는 결코 목적이 되지 않았다. 중광은 이렇게 말했다. “그림은 배우거나 지식으로 아는 게 아니다,..참 예술은 적어도 느끼거나 깨달아야 한다...참예술은 혼이요, 삶이요, 혼탁한 정신을 치료해주는 정화수요, 생명이다.” 혼이고 삶이며 정화수이자 생명이 되는 그림을 그리고자 한 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 스스로가 그런 존재가 되어야 또한 가능한 일이다.

당시 그는 이런 선시로 남겼다 “반은 미친 듯 반은 성한 듯 사는 게다. 삼천대천세계는 산산히 부서지고 나는 참으로 고독해서 넘실넘실 춤을 추는 거야! 나는 걸레'(나는 걸레)

그러니까 그는 걸레로서 살고자 했다. 그는 자신의 몸이 걸레가 되어 먹물을 뒤집어 쓰고 먹이나 물감, 흙을 묻히고 그것과 함께 뒹굴어 모종의 흔적을 남겼다. 더러운 것을 훔치고 깨끗하게 만들지만 정작 자신은 세속의 모든 때와 더러움을 몸소 껴안는다는 의미이다. 이 세상의 모든 더러움을 몸소 껴안고 그것들을 치우는 일이자 동시에 자신을 기꺼이 희생하고자 했으며 모든 물질, 재료들과 모든 생명체와 더불어 하나가 되는 한편 질펀하게 녹아나고 싶어 했다.

나는 문득 중광의 작업실 사진을 보면서 젊은 시절 고은이 환속 이후에 자신의 서재에서 찍은 사진이 떠오른다. 육명심의 사진이었나? 난장판으로 어지러운 방 안에서, 엄청난 책과 원고지 사이에 파묻혀 파안대소를 하면서 머리를 쓰다듬던 고은의 천진한 미소, 한복을 입고 방바닥에 앉아 있던 모습, 그리고 그 방안에서 풍기는 무섭고 뜨거운 기운이 인상적이었다. 용광로 같은 창작의 산실 풍경으로서 섬ㅤㅉㅣㅅ했다. 중광의 창작 열정도 고은의 그 열정에 버금갈 만하다. 그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에는 작업실 문을 걸어 잠그고 그곳에서 모든 것을 해결한다. 그림을 그리고 먹고 싸고 온갖 쓰레기 더미와 악취 속에서 산다. 입은 담배 아궁이가 되고 쓰레기통은 소변과 대변을 받는 화장실이 되었다고 한다. 그의 방은 너무 심한 악취로 인해 타인의 접근을 가로 막는다. 중광은 스스로 만들어 놓은 더러움 속에 몸을 섞는다. 앞서 언급했듯이 그는 스스로 걸레가 되고자 했다.

밀폐된 공간에서. 그 더러운 곳에서 미친듯이 작업에 몰두하고 지독한 음주와 흡연으로 몸을 소멸시키고자 했다. 독한 술로 몸을 씻고 뜨겁고 깊은 연기로 몸을 태우고자 했다. 그래서 완전히 속을 게워내고 완벽히 재가 되는 상태를 동경했다. 그는 육체의 바닥으로 기어들어가 기어이 무가 되고자 했다. 아무 것도 아닌 상태, 아무것도 없는 상태, 그냥 걸레인 중광말이다. 그런데 그렇게 걸레가 되기 위해, 자신을 비우기 위해 그는 작업이 필요했다. 몰입할 수 있고 신이 나고 환희와 신명의 상태로 몰고 갈 수 있는 정점이 요구되었다. 창작행위는 그런 상태로 자신을 끌고 가는 통로가 되었다.
중광을 둘러싼 여러 기행을 보면 흡사 이중섭의 생이 연상된다. 월남 이후 가족과 헤어져 혼자 외롭게 지내던 이중섭의 삶은 비극적이면서도 그만의 기행적인 생의 풍경을 예사롭지 않게 풍겨주었다. 이는 고은의 책과 구상의 회고에 의해 잘 드러나 있다. 그런데 이렇게 구상, 이중섭, 고은, 중광은 서로 얽혀있다. 중광은 구상을 존경했고 구상 역시 중광을 인정했다. 고은은 이중섭 평전을 썼고 구상은 이중섭과 동향이자 절친한 친구였다. 이중섭의 곁에서 지속적으로 그를 보살피는 한편 그의 재능과 성품을 사랑하고 인정해 주었던 이다. 그래서인지 중광 그림에는 이중섭 그림의 흔적들이 얼핏 묻어있다. 사람과 동물들의 경계없는 혼재, 아이들 그림과도 천진함의 세계, 낙천성과 해학성, 특정한 도상의 반복적인 등장 등이 그렇다. 그리고 이는 중광이 존경했던 장욱진의 그림세계와 뒤섞여 나간다.

중광의 모필체험
중광의 거침없는 삶의 행적은 고스란히 그림이 되었고 그것이 필법이 되었다. 그는 왼손, 오른손을 자유자재로 구사하면서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으며 되는 대로 흙을 주물러 그릇을 만들었고 달마상을 제작했다. 그렇게 해서 써진 글씨와 그려진 그림, 도자기는 고졸하기 그지없는 경지를 얼핏 보여준다. 그의 서예는 빼어나다. 나는 그의 힘차고 아무렇게나 써내려간듯한 그 무심한 필체가 좋다. 오른손, 왼손을 자유로이 다 사용한 그는 ‘절대절명의 필법’을 무시한 채 거꾸로 필순을 진행하기도 하면서 정통 필법을 무시하였고 그것으로 그림과 글씨를 만들었다. 글씨를 갓 배운 어린아이들이 경지를 닮아 그저 고졸하기 그지없다. 이처럼 중광의 그림은 우선적으로 모필체험에서 가능한 것이다. 알다시피 선종 예술은 선(線)을 그리지 않고 바로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몰골기법이다. 붓에 물을 적게 묻혀 휘두르는 갈필 등도 많이 쓰인다. 이는 수묵의 세계가 선적 자취를 나타내는데 유리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중광은 모필로 선화를 체현한다. 그는 필의 맛을 알고 그 필을 자유로이 마음껏, 지칠 때까지 갖고 논다. 필선을 실험하는 일, 그 필을 마음 가는 대로 부리는 일이 그의 글씨고 그림이다. 쏜살 같이 빠져나가고 뜨겁게 치밀어 오르고 차갑게 가라앉고 더없이 흥분되고 번개처럼 내리치는 상념과 마음의 모든 것들을 필이 따라가고자 한다. 그의 그림은 결국 그 필을 극대화하고자 하는 욕망이다. 그 필, 선은 그림이 되었다가 글씨가 되고 그 자체로 붓놀림이 되고 몸짓이 되고 숨결이 된다. 그래서 그의 그림은 결국 필의 퍼포먼스로 나아간다. 그는 붓을 휘두르고 먹물을 뒤집어 쓰고 바닥에 죄다 뿌리거나 흘리고 종내에는 난장을 만든다. 1990년대 초다. 중광은 자신의 성기에 붓을 매달아 그리거나 썼다. 발기된 성기라 해도 그것이 붓대를 지탱하거나 혹은 의지대로 그림이나 글씨를 쓴다는 일은 상상하기 어렵다. 백남준의 부인인 구보타는 오래 전에 자신의 음부에 붓을 끼워 넣고 그것으로 그림을 그린 적이 있었고 백남준 역시 머리에 먹물을 뒤집어쓰고 바닥에 놓인 화면에 그림을 그리는 퍼포먼스를 했다. 마치 초서에 능했으며 선서도의 대가였던 회소가 술만 먹으면 벽이건, 땅이건, 의복, 그릇 등 닥치는 대로 먹물에 머리칼을 적셔 초서를 휘둘러 댔다는 일화를 떠올려준다. 그런가하면 몸 전체에 물감을 뒤집어 쓴 체 모델들로 하여금 신체회화를 선보인 이브 클라인도 기억난다. 그런데 지금도 심심찮게 퍼포먼스를 한다면 다들 물감을 뒤집어 쓰고 돌아다니는 일이 하나의 관례가 된 것이 나로서는 좀 의아하다.

중광은 초서처럼 쓰고 그린다. 글과 그림은 하나로 엉켜있다. 그의 그림은 결국 서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는 그 법을 넘어선다. 필의 작난이요 극치요 희롱이고 무법이다. 그래서 그는 “나는 붓을 그냥 던져도 그림이 된다”고 자주 말했다. 물론 그런 그림은 오랜 시간 숙련을 거친 후에야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그림이다. 흉내로서 이루어지는 그림이 아니다. 따라서 그것은 오랜 숙련을 거쳐 그 법마저 다 지워버리고 해체하는 경지에서 가능한 말이다.

그가 그린 그림은 결국 붓질 그 자체다. 붓질이자 이미지이고 이미지이자 순수한 서체적 놀림으로 가득하다. 그런 성격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이 학을 그린 그림이다. 그는 꽤 많은 학 그림을 그렸다. 간단하게 즉흥적으로 그른 몇 개의 선이 모여 학을 연상시켜주는데 그 선이 그대로 선이고 그림이고 문자이며 종내 한 획으로 귀결된다. 물론 학 그림뿐만 아니라 그가 즐겨 그린 반복적인 도상들 모두가 생명력으로 충만하고 선적 경지를 함축하는 선의 맛으로 진동한다.

중광은 처음부터 기존의 형식적 그림이나 제도권에서 논의되는 그림과는 무척 다른 붓놀이를 거침없이 선보였다. 그것은 거창한 작품제작이 아니라 기존 미술, 서예에 대한 저항이자 상식적인 미학에 대한 거부이고 그로부터 벗어나 새로운 미학에 대한 개안의 요청이었다. 그래서 그는 불가피하게 파격과 일탈의 방법론을 선보인다. 그것은 단지 괴이하고 요란한 전위가 아니라 새로운 개안과 맞물리는 행위이고 무지한 대중들을 개안하려는 의지이기에 그만큼 낯설고 생경함이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그의 글씨와 그림, 도자기는 교육받기 이전의, 문명의 세례를 받기 이전의 원초적이고 본능적이고 동심적인 것으로 가득하다. 마치 처음으로 붓을 잡아본 아이들의 그림, 낙서처럼 그려지고 쓰여졌다. 기존의 관습들을 지우고 관행과 보편적인 아름다움의 기준을 뭉개려고 애를 썼다. 그래서 그는 되는대로 그리고 되는 대로 쓰고 되는 대로 빚었다. 이 ‘되는 대로’란 모든 규율과 법칙, 상식과 보편을 공략하려는 시도에서 불가피하게 나온 전략이다. 그러나 그것은 기존 전통을 이해하고 이를 극복하는 일이지 그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지점에서 시작될 수는 없다.

모필을 통해 중광은 동일한 소재를 반복해서 그린다. 달마가 그렇고 동자상이 그렇고 학과 닭이 그렇다. 동물과 사람, 달마가 구분없이 선회하고 구별없이 서식한다. 그것은 모든 차별과 인위적 경계와 명명성의 세계를 지운다.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동물은 뭇생명체를 표상한다. 그는 인간중심주의적 사유가 아니라 “일체 만물 그리고 동물과 벌레에 이르기까지 부처가 될 수 있는 불성이 있다고 강조”하고 있다.

앞서도 언급했듯이 그는 학을 즐겨 그렸다. 그것은 그림이자 선이고 필선이고 먹의 운용이다. 옛선비들이 학을 군자와 장수의 상징으로 즐겨 그리고 완상했다면 중광은 그 학의 형상을 빌어 필을 실험하고 자유로운 그리기와 쓰기를 시도하고 천진무애의 경지를 궁구한다. 그것은 학이자 문자이고 그림이고 선이자 학이란 형상으로 맞물려 돌아간다. 그가 즐겨 그린 동물은 이외에도 닭, 호랑이, 새, 물고기, 말 등이다. 다들 해학성이 넘치고 유머스러우며 에로틱한 욕망도 분출하고 있다. 거칠 것 없고 꺼릴 것 없는 세계의 한 풍경이 동물의 형상을 빌어 출몰한다. 그것은 그의 의식의 풍경이기도하다.
물론 중광이 그려내는 여러 도상들도 일정한 도식성을 피할 수 는 없다. 습관적인 그리기와 학습된 미학에서 자유롭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다. 중광은 가능한 한 자유로움을 추구하고자 안간힘을 썼다. 그래서 천진한 아이들의 그림처럼 그리고자 했다. 그의 그림에는 순진무구한 아이의 마음이 있다고들 한다. 중광은 항상 무애의 자유 속에서 그림을 그린다고도 했다. 무엇보다도 그의 그림은 대담한 순진성과 어린아이와 같은 길들여지지 않은 야성의 힘이 있다. 그는 미술의 전통에서 그림을 길어 올리지 않고 철저히 자신의 마음과 정신의 심연에 두레박을 드리운다. 그는 자유롭기 위해, 놀기 위해, 장난하기 위해 그린다. 중광의 그림은 유치하고 우스꽝스럽다. 그는 아이들처럼 그렸고 아이들처럼 썼다. 좋은 그림은 이미 아이들의 그림 속에 다 들어있다. 그런 눈과 마음으로 세상과 사물을 볼 수 있다면 누구나 뛰어난 예술가일 것이다. 그것은 결국 선이 추구하는 깨임과 다르지 않다. 해서 중광은 아이의 눈과 마음이 되고자 했다. 동심으로 살고자 했다. 그러나 아이들 그림처럼 그렸다고 해서 그것이 곧바로 동심과 천진함으로 가득한 좋은 그림이 되느냐 하면 결코 그렇지는 않을 것이다. 아울러 실제 아이들이 그린 그림이 모두 선적이냐 하면 분명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어른들은 동심을 갈망하고 어린이의 그림에서 보이는 그 길들여지지 않는 눈과 순진무구한 마음에 마냥 경이로움을 표하는 것도 사실이다.

“내 그림은 다분히 해학적이며 편안하고 천진하며 누구나 갖고 싶은 욕구를 일으킨다. 나도 삼매경에서 작품을 하며 어떠한 목적의식도 없이 이러한 정신세계를 추구하다보면 결국 대상마저 없어져 깨달음의 세계와 같은 경지에 이르게 된다. 내 그림 속에는 천진난만한 동심의 세계로부터 깨달음의 황홀한 경지까지가 공존하고 있다.' (중광)

결국 동심이란 그의 회화가 궁극으로 추구하는 바다. 그는 또 이렇게 말했다.

“동심을 잃어버린 사람은 참 인간으로써 끝이 난 것이다. 동심은 미워하거나 질투하거나 탐심이 없는 것이다. 동심은 그대로 천진불이다. 동심은 죽고 사는 것을 초월한다. 동심은 세상을 아름답게 만든다. 동심은 그대로 극락이요 천당이다. 늘 동심을 가진 사람만이 거듭날 수 있다. 동심이 없으면 위대한 예술을 해낼 수 없다.” 그 세계는 또한 그지없는 졸의 세계다. 선(禪)의 세계인 것이다.

중광의 선화, 달마도
선이란 순수한 정신의 집중을 통해 인간 존재의 실상을 자각하는 수행방법이며, 생사의 속박을 벗어날 수 있는 자유의 길이다. 따라서 선화란 단순하게 선만을 추구하기 보다 선의 궁극적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제작하는 성스런 예술이다. 선화는 기법이나 양식을 중요시하지 않고 선의 이념이 얼마나 가미되는냐 하는 것이 문제이다. 또한 표현하는 방법인 동시에 선의 궁극적인 의미에 도달하려는 삼매의 의지이기도 하다. 선화는 단순하게 선만을 추구하기 보다 선의 구극적 이념에 입각한 주제를 제작하는 성스런 예술이다. 따라서 선화는 기법이나 양식을 중요시하지 않고 선의 이념이 얼마만큼 가미되고 표현되었는가를 문제 삼으며 그림을 통해 삼매를 발견하였을 때 그 승패가 가름된다고 한다. 곧 선화는 선의 본질을 형태적으로 표현하는 방법인 동시에 선의 구의에 도달하려는 삼매의 의지라는 것이다. 이처럼 선필과 선화는 다 같이 꾸밈이 없고 표현을 최대한 절제하는 양식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법이 없다. 그저 무법으로써 법을 삼는 것이다.

“서화란 졸(拙)을 배우는 길이다. 졸이란 교(巧)가 이룰 수 없는 것이다.”
흔히 선화에서의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는 단지 한 개의 사물이 아니라 우주 전체를 집약시키는 하나의 표적이라고들 한다. 그래서 선을 추구하는 이들이 선화를 그릴 때 중요시 여긴 것은 사색의 집중과 그 마음에 따라 붓을 드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의 대상을 그리기에 앞서 그것을 전체적으로 느끼는 것이 요구되는 것이다. 생각이 흩어지면 대상에 종속되기에 대상과의 오랜 교감이 있은 연후에 비로소 붓을 드는데 이때 그것은 그리는 것이 아니라 창조하는 것이다 된다는 것이다. 이는 대상과 내가 결코 분리되지 않는 경지 속에서 그림이 나온다는 뜻이다. 아마도 그것이 중광이 추구하고자 했던 세계이자 이룩한 경지이고 그것은 그의 그림에 잘 드리워져있다.
그래서 중광의 그림은 전체적으로 광의의 선화를 제작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가 그린 달마상은 물론이고 동물과 추상화 역시 그렇고 도자기와 도조작업이 그렇다.

중광은 오랜 세월 달마를 그렸다. 달마는 동토 선종의 1조요, 인도의 29조인 달마조사를 말한다. 달마를 그림으로 그리는 것 자체가 하나의 장르가 되었다. 흔히 달마도에서 어떤 영험한 기운이 나온다고 전해진다. 많은 스님들이 선수행의 방편으로 달마도를 그린다. 모든 달마도 주제는 선문헌과 구전으로 전하는 몇몇 설화에 근거하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중요한 사실은 달마도는 화법으로 익혀서 그리는 그림이 아니라 선 수행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선의 깊고 얇음은 그가 그려놓은 달마도를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는 얘기다. 중광이 그린 달마는 매번 다르다. 변화무쌍하며 동일하지 않다. 오늘날 그려지는 대부분의 달마도는 달마의 흉내를 내고 있을 뿐이다. 박제화 되고 습관이 되어버린 달마도를 맹목적으로 그려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은 부적이 되어 팔린다. 나로서는 중광 화업이 본령은 무엇보다도 달마그림에 잘 드러난다고 본다. 나는 그가 그린 그림중 돌(咄)달마가 좋다. 그의 후기 작품들이다. 절로 웃음이 번지는 그림이다. 한 잔 술을 걸친 듯한 표정, 괴엄하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복잡한 표정이다. 선종의 초조인 보리달마의 초상화들은 엄청나게 큰 눈과 맹렬한 눈빛으로 뚫어질 듯 노려보는, 기형적인 늙은 승려의 모습을 보여준다. 중광이 그린 달마는 진한 먹을 묻힌 붓을 슥슥 문질러 대번에 그려놓은 얼굴과 수염, 북북 칠해놓은 몸통, 중광 특유의 서체로 쓰여진 문자들이 작은 화면에 꽉차있다. 활달하고 자유로운 그림이다. 중광이 그린 달마상은 부동의 위엄과 단순한 인물상을 넘어서 있다.

중광은 달마를 많이 그렸지만 근육 속의 골격은 참으로 그리기 어렵다고 말했다. 중광이 그린 달마는 그에게 있어 깨달음이며 자아성찰이자 예술 그 자체였다. 그 달마는 고전적인 맥락에서 탈출하여 새로운 인물로 조형된 달마이자 원시적 아름다움을 재현하고 있는 달마이기도 하다. 달마를 그리려면 달마를 오랫동안 관찰하고 달마와 친해져야 한다고들 한다. 그리고는 달마를 죽여야 이루어지는 경지라고도 한다. 이른바 선적 경지가 그것이다. 결국 마음이 달마를 그린다는 것이다.

마음의 본성을 관찰하는 것을 관심(觀心)이라고 한다. 마음은 만법의 주체이며 모든 것과 관련이 있으므로, 마음을 살피는 일은 곧 일체를 관찰하는 것과 통한다. 자기 자신이 달마가 되지 않고는 달마를 그릴 수 없다는 점이 바로 달마도만의 특징이다.

달마는 절대로 그리려는 혹은 그려지는 대상이 아니라 바로 ‘무상한 나 자신’ 이다. 무아의 경지에서 나오는 달마도에는 ‘나’란 있을 수 없다. 그러므로 달마도는 없는 ‘나’를 대신해 주어서 내가 나를 망각한 바로 그곳, 내가 나를 버린 곳에서 진정한 나를 찾게 만들어 준다고 한다. 다시 말하자면 무아의 경지에서 공(空)에 맞닥뜨리거나 혹은 한 소식하는 돈오의 순간에 오도송을 지을 때, 비로소 최고의 이상적인 달마도가 그려질 수 있다고 한다. 이처럼 달마도는 특별한 화법이나 기교에 얽매임이 없는 탈속한 그림이다. 그러므로 자유자재하다. 돈오이므로 감필로 순식간에 그려 내니 단순 간략하여 군더더기 없는 여백이 많고 그래서 무척 파격적이다. 그것은 우리의 본래심으로 돌아가려고 하는 맑고 순수한 마음에서 나오는 그림이므로 고정된 관념과 틀을 깨는 파격을 지향한다. 그런 달마도가 중광이 진정으로 추구하고 구현하고자 한 달마도였으리라. 그래서 그는 지속적으로 그토록 많은 달마를 그렸다. 그것은 결국 자신의 모습이었다.

중광을 생각하다
중광이 남긴 작업들은 크게 먹그림, 유화, 도자, 판화, 그리고 퍼포먼스 등으로 구분된다. 그는 여러 장르와 매체를 넘나들며 일관된 작품을 선보였다. 특정한 도상이 반복해서 등장하거나 문자와 이미지가 한 공간에 공존하며 나타나고 이른바 선적인 경지, 동심의 세계를 표상하는 것이자 가장 자유롭고 무애의 경지에서 분출되는 한 세계를 시각이미지를 통해 표출하려는 뜨거운 열정이었다. 그것은 일반적인 예술가라면 한결같이 선망하는 경지이다. 중광은 이를 더욱 극단으로 밀고한 간 측면이 있다. 그러나 그 제스처는 또한 유형화된 작가들의 스타일에 유사하다.
그는 자신의 그림이 여전히 선화의 연장선상에서 이루어지고 있음을 말한다.

“나는 습작을 통해 그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냥 창조되고 있어요. 이것은 깨달음이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의 그림은 깨달음이 있어야 가능한 그림이다. 그는 다시 자신의 작품에 대해 “모두가 낙서에 불과해, 미완성의 고통들 뿐이야”라고도 말했다. 결국 그림 자체는 별 의미가 없는 것이다. 깨달음에 이른다면, 그것을 얼핏 드러낸다면 사실 그 물질, 오브제는 무의미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는 그토록 지속적으로 많은 작품을 생산해냈고 열정적으로 만들었고 뜨겁게 작가로서 살았다. 이 땅의 많은 스님들이 달마를 그리고 선화를 제작했지만 중광 같은 뜨거운 불길 같은 것을 한국화단에 던져 준 이는 거의 없었다.

그가 죽은 지 10여년의 세월이 지난 후 다시 그의 작업들을 볼 이번 기회에 우리는 중광을 둘러싼 오해와 신화 모두를 밀친 자리에서 차분히 그가 추구하고 이루고자 애썼던 세계를 차분하게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참고문헌
김나미, 그림으로 만나는 달마, 시공사, 1989
김영재, 불교미술을 보는 눈, 사계절, 2001
박영택, 나는 붓을 던져도 그림이 된다. 도서출판, 2005
우봉규, 달마와 그 제자들, 살림, 2008
정휴스님, 걸레스님 중광, 밀알, 2002 재판 8쇄
걸레스님 중광 화집, 삼성출판사, 1991
중광-달마전 전시도록 , 가나아트센터,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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