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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문 / 식물로 이루어진 책가도

박영택

김광문- 식물로 이루어진 책가도



식물들은 마냥 적막한 공간에 고요하게 자리하고 있다. 식물은 부동과 정지의 생명체로서 늘 그 자리에서 멈춰있다. 동물성의 육체를 지닌 것들과 대비되는 그 정적과 자활적인 생애가 풍경처럼 드리워진 그림이다. 김광문은 옆으로 펼쳐진 화면에 드문드문 화분을 배치하거나 마른 풀과 꽃을 듬성듬성 놓아두었다. 드물고 빈 풍경이자 적조하고 공허한 세계다. 원근법이 지워진 평면적인 세계에 정지된 시간, 부동의 침묵과 오랜 시간에 씻겨 말간, 퇴락한 색조가 흡착되어 있다. 깔깔한 질감과 마르고 탈색된 색채가 겨우 식물의 존재를 지시한다. 그것은 흡사 오래된 식물도감의 삽화처럼 혹은 빛바랜 흑백의 인쇄이미지가 되어 다가온다.

은은하고 온화한 바탕색조로 연유하는, 여백이 주는 안온함 그리고 정갈함과 섬세함이 느껴지는 묘사에 뒤를 이어 소박한 장식적 요소가 강하게 환기되는가 하면 매우 정적이고 차분하게 자연이 한 부위가 축소되어 안착된데 따른 고아하고 탈속한 경지조차 느껴진다. 책가도나 기명절지나 민화 등 조선조 회화의 세계에서 풍기는 은은한 색채와 구성의 묘미, 여운의 맛도 슬며시 베어난다. 경첩과 일련의 오브제를 활용한 작업에서는 오랜 목조가구의 매혹적인 분위기가 묻어 있다. 김광문의 작업은 이처럼 우리 옛이미지들을 감각적으로 차용해 그 오래되고 퇴락한 것들이 발산하는 매혹적인 색채와 닳고 문드러진 부위가 주는 아련한 상처의 흔적, 소멸하기 직전의 것들이 지닌 경이로운 시간의 퇴적 등을 촘촘히 쌓아올린 것들이다. 결국 그가 표현하고자 한 것은 시간이다. 그것은 보이지 않고 다만 상처로 남고 사물의 피부에, 존재의 표면에 내려와 앉은 기미들이다. 징후들이고 분위기일 것이다.

그는 일상의 주변에 흩어진 화분들을 발견했다. 우리네 삶의 언저리에 화분들은 늘상 그렇게 고요하게 자리한다. 그것들은 평범하고 지루한 일상에 경이로운 순간을 잠시 안겨준다. 베란다와 책상위에 혹은 카페와 골목길 이곳저곳에 장식물로, 혹은 버려지듯 놓인 화분/식물은 지나는 이들의 눈과 마음에 생명을 환기시켜주고 차가운 콘크리트와 시멘트, 인공의 물질 사이에 여백과 틈을 제공한다. 도시 속에 자리한 가축화된 자연이지만, 누군가 돌보지 않아도 제 힘껏 뿌리를 내리고 수직으로 오르는 생의 절정을 경이롭게 안긴다. 작가는 그 화분들을 채집했다.

창호지나 닥지 위에 수용성의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후 부분적으로 유화를 이용해 덧칠한 화면은 미묘한 질감을 자아낸다. 그 위로 석고판을 이용해 떠낸 형상을 콜라주해 입혀놓기도 했다. 더러 경칩을 비롯한 쇠붙이들이 침잠하듯 파고들어 표면에 작은 융기를 일으킨다. 저부조의 화면은 촉각적이고 손으로 더듬고 싶은 유혹을 조심스레 흘린다. 그렇게 화분, 식물이 놓인 화면은 앞서 언급했듯이 기명절지나 책거리 그림을 연상시킨다.
학문을 숭상하고 예술을 즐기던 선비들의 고아한 취향을 담아 학문하는 이들의 방을 장식하던 책가도는 늘상 생의 근거리에 책을 위치하고자 하는 마음의 바람이었다. 그 욕망을 환영적으로 둘러친 것이 책가도병풍이다. 정조는 왕위에 오른 후 바쁜 정사로 인해 책을 가까이 할 수 없음을 안타깝게 여겨 책거리 병풍을 펴놓고 스스로를 경계했다고 한다. 책가를 배경으로 책, 문방구류, 장식품 등 다양한 기물을 그린 일종의 정물화인 책가도는 흥미로운 구성과 차분한 색조, 핍진한 묘사에서 매력적이다. 김광문은 책가도에서 풍겨나오는 은은하고 빛바랜 듯한 색채에 매료되었다고 한다.

그는 화분을 수집하고 이러저런 식물을 통해 자기만의 책가도, 기명문방도와 흡사한 그림을 만들어냈다. 다양한 화분, 식물을 임의대로 재구성하면서 혹은 스스로 새로운 식물을 창조하면서 사실적인 재현인 동시에 그로부터 멀리 벗어나 비현실적이고 신비감이 감도는 묘한 정물화를 그렸다. 조심스레 그어진 감각적인 선의 자취, 아련하게 떠오르고 가라앉기를 거듭하는 식물이미지, 환한 햇살이나 가득한 빛에 의해 홍건해진 배경, 언뜻언뜻 드러나는 사선과 드문드문 찍힌 점들, 그림이자 부조이고 콜라주가 뒤섞인 평면에는, 현실계의 시간과 물리적 법칙, 중력이 사라진 자리에는, 고립되고 개별적이어서 그 자체로 충만한 세계인 식물이 하나씩 굳건한 돌처럼, 섬처럼 자리하고 있다. 주변에서 흔하게 접하는 식물, 화분의 존재감이 이토록 매혹적이었음을 새삼 떠올려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 단순함과 고요함, 그리고 탈속과 담백함, 자연주의야말로 한국문화의 미의식의 본질을 촘촘히 짜준 요소들에 다름아니었다. 김광문이 찾고자 했고 형상화하고자 했던 것도 결국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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