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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혜/ 생수병 속의 낯선 자연/산수

박영택

김신혜-생수병 속의 낯선 자연/산수




나는 몇몇 음료수병은 쉽게 버리지 못한다. 버리기에는 너무 예쁘고 아름다운 것들이다. 그것들이 일회용으로 사라지거나 버려진다는 것을 받아들이기 힘들다. 해서 나는 그 빈 병을 깨끗이 닦아 책장 틈 사이로 세워놓고 보고 있다. 그것은 순간 오브제미술이자 흥미로운 설치가 되었다. 오늘날 상품의 포장과 디자인은 가장 감각적이고 매혹적이라 거부하기 힘들다. 이른바 대량생산시스템속의 소비사회를 규정하는 ‘상품미학’은 동시대인의 감각과 감수성을 죄다 빨아들인다. 그래서 상품이 그 어떤 예술작품보다도 더 강력한 ‘아트’가 되고 있다. 현대 자본주의의 광고와 상품디자인은 아방가르드적 감수성과 상업주의가 결합한 것이다. 예술의 산업화와 동시에 이루어지는 것이 산업의 예술화다. 산업은 부르주아예술이고, 기계는 부르주아의 작품이다. 그렇게 오늘날은 자본주의 자체가 ‘예술’이 되어버렸다. 따라서 미술은 이제 그 자본적 감수성 아래 잠식되거나 그와 유사한 ‘디자인’이 되고 있다.

김신혜는 물병과 음료수병의 표면을 장식하고 있는 디자인에 주목했다. 아마도 일상에서 가장 흔하게, 광범위하게 소비하는 것이 바로 음료수일 것이다. 작가는 세계 각국의 생수와 음료수, 샴페인과 와인병 등을 수집했는데 그 병의 표면에 부착된 상표에는 공통적으로 자연이미지가 개입되어 있다. 실은 그 자연이미지가 흥미로워 수집한 것이다. 오늘날 도시에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자연은 이런 식의 체험으로만 가능하다고 말할 수 있다.
도시속에서, 상품속에서 관리되고 박제화, 소비화 된 자연이미지다. 만년설을 이고 있는 산과 폭포, 붉은 매화와 아네모네 등이 그려져 있는 병 등을 수집하고 이를 커다란 화면에 공들여 그렸다. 장지와 분채를 사용해, 전통적인 채색기법으로 병과 상표, 문자와 이미지 등을 섬세하게 묘사했다. 흡사 인쇄한 것처럼 깔끔하고 산뜻하게 그려진, 쓰여진 그림은 디자인과 회화 사이에서, 실제 로고와 디자인과 그로부터 파생한 전통산수 사이에 걸쳐있다. 결과물인 작가의 그림이 실제 병을 완벽하게 재현한 것은 아니다. 똑같이 그렸지만 부분적으로 틈이 벌어진다. 상표 안에 자리한 자연이미지가 병의 몸체에서 벗어나 밖으로 확산되거나 퍼져나가는 형국이다. 디자인과 로고 안에 갇힌, 박제된 자연이미지에 가생하거나 이를 풀어 헤쳐 전통산수화를 연상시키는 그림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FIJI, Arizona Green Tea, Azzura, Jeju, Volvic, Evian, FUJI, 삼다수 등 한국, 중국, 대만, 일본, 캐나다 등지에서 생산된 생수, 와인, 샴페인 병의 로고 안에 깃든 여러 자연이미지를 수집해서 이를 정교하게 묘사하가고 그 안에 깃든 자연이미지는 전통산수화와 겹쳐놓았다. 그렇게 해서 에비앙산수, 볼빅산수, 제주청정바다산수, 아이스필드산수 등이 탄생했다. 그것은 기이한 산수화다.

많은 동양화 전공자들이 ‘동양화’라는 것을 그린다. 그런데 대부분 작가들에게 동양화란 것이 특정한 소재와 형식, 의미와 사유의 담론으로 고정되어 있다는 인상이다. 따라서 그 그림은 동양화라고 이미 일정하게 전제되어 있는 것들을 습관적으로 그리고 이를 통해 ‘동양화’작업을 하고 있으며 따라서 ‘동양화가’라는 알리바이를 차용하는 선에서만 정당성을 갖는 기이한 상황을 노정한다. 반면 김신혜는 동앙화를 그리려 하기보다는 ‘동양화적인 것’을 주의 깊게 들여다본다. 관습적으로 그림을 그리기 이전에 이미 일상에 광범위하게 스며들어있는 미술적인 것, 그리고 동양화 전통속에 각인된 의미망을 지닌 것들을 들춰본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서 천연수 에비앙과 볼빅의 팻병이나 샴페인, 여러 음료수에 통적으로 달라붙은 ‘자연’, 이상향과 유토피아, 천연의 자연을 암시하는 산수화적인 이미지를 주목했고 차용했다. 동양의 이상향(산수)을 닮은 그 로고 역시 좋은 물, 이상적인 물을 상징하는 것인데 맥주, 와인, 생수 등 물과 관련된 제품의 로고에는 예외없이 자연/산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거기에 이미 ‘산수’가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동시대 현대미술은 사물들을 다룬다. 뒤샹의 레디메이드나 앤디 워홀의 팝아트를 지나 사물 그 자체가 모든 것을 대체하고 있는 형편이다. 최근 회화에서도 그 사물의 표면을 애무하는 경향은 심화되어 간다. 극사실적인 회화나 팝 적인 그림들이 보여주는 패티시즘은 새삼스럽지 않다. 젊은 작가들은 자신이 욕망하는 상품, 사물들을 그린다. 소유한다. 결국 매력적이고 감각적인 사물의 유혹, 화려한 인공의 상품들의 표면이 지배적인 문화이자 미술의 문제가 되었다. 김신혜가 그린, 여백이 많은 화면에 단촐하게 올라와 있는 이 깜찍하고 빛나는 물건은 ‘상품미학’의 매력으로 충만하다. 그 사물을 똑같이 재현한다는 것은 일종의 소유의 욕망을 드러낸다. 오늘날 현대인들은 오로지 사물과의 친연적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자본주의는 맹렬한 속도와 한계 없는 위력으로 사물을 욕망하게 한다. 그렇게 사물을 구매하고 수집하고 이를 편애하는 삶이 오늘날 우리들의 보편적 생활이다. 그에 비례해 놀라운 솜씨로 사물들을 정교하게 그려내고 있는 작업들은 기계적인 이미지와 손으로 그려진 이미지 간의 구분을 모호하게 함과 동시에 사진이미지보다 더 사실적이고 실제적으로 그려내려는 욕망을 매달면서 전적으로 사물에 육박한 시선을 보여준다. 오로지 사물만을 독대하게 하고 그 사물의 피부에 들러붙게 만드는 것이다. 그것은 관념이 아니라 너무도 생생하게 실존하는 물질의 세계이자 몸으로 만나는 구체적 존재들이다.
그러한 인식은 물질적 풍요와 자본주의의 소비사회를 삶의 조건으로 받아들이며 이에 익숙한 모든 이들이 갖는 보편적 세계 인식이자 사물관이다. 여기서 사물의 고유한 물리적 성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사실주의적 기법, 전략이 동반된다. 그래서 매혹적인 상품, 사물을 공들여 그리거나 그것들을 채집해 그리는 일, 소소하고 비근한 사물로 채워진 자신의 일상(공간)을 그리는 일이 보편화되고 있다. 그것은 사물로 이루어진, 너무나 많은 인공의 사물과 상품으로 둘러싸인 소비사회의 환경에 대한 시각적 반응 같기도 하다. 사물을 빌어 말을 하고 사물들로 하여금 말하게 하는 일이다. 자연 역시 그런 식으로 물신화되고 소비된다. 그런데 김신혜는 그 자연이미지에 전통적인 산수화를 얹혀놓았다. 자연에 대한 보편적인 욕망과 기호, 소비사회의 감수성 아래 변질된 자연관, 전통산수화의 영역을 각각 중층적으로 포개어놓고 그 둘의 분열적 세계상을 한 자리에 공존시켰다. 그것이 김신혜가 그려보이는 오늘날의 산수화다.

김신혜는 흥미롭게도 생수병과 와인, 음료수 병 안에 깃든 자연, 산수이미지를 보았고 그것의 의미를 새삼 헤아려보았다. 도시공간에서의 삶과 소비사회가 요구하는 욕망의 구조안에서 발견한 자연을 다시 재현하고 전통산수와 오버랩시켰다. 작가는 다양한 기호와 로고를 뒤바꾸어놓으면서 그 과정에 자신의 발랄한 개별성의 감성을 섞어놓는가 하면 ‘동양화적인 것’들의 자취를 찾아 여기에 신선한 피를 수혈해주고 있다. 산수화라고 하는 특정 장르나 스타일을 유지하거나 폐기하는 차원이 아니라 산수화의 현실 속에서 유통되고 있는 기존의 의미론적 영역을 흔들거나 슬쩍 해체하면서 다소 파격적이고 비현실적으로 확장 갱신하는 시도를 보여준다. 다시말해 산수화에 대한 새로운 상상력을 부여하는 일이자 ‘전통산수화의 비현실’을 빌어 이 시대의 현실을 탐구할 수 있는 가능성을 탐구하고자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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