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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익훈 / 물질과 그림자 사이에서

박영택

엄익훈-물질과 그림자 사이에서



엄익훈은 철 조각들을 일정한 단위로 집적시켜서 덩어리를 만든다. 그것은 철의 물성을 둥글게 말아 보여주는 조각, 편린들의 증식으로 이루어진 작업으로 흡사 식물처럼 뻗어나간 형국을 보여준다. 그는 오랫동안 물질을 반복배열해서 공간을 채워나가는 작업을 선보였다고 기억된다. 조각은 물질이 주어진 특정한 공간을 채워 나가는 일이자 그 공간에 사건을 일으키는 일이다. 작가는 금속성의 물질에 불을 개입해 덩어리를 만들었다. 철을 작은 단위로 잘라 안으로 말아 붙인 후 그것들을 용접해나가면서 밖으로 밀고 나간 것이다. 이는 공간에 철이란 물질로 드로잉을 하는 일이자 불로 철을 이어가면서 매스를 만드는 일이다.
그것 자체로는 추상적인 조각이다. 일정한 단위의 철 조각들이 계속 반복해서 부착되고 이어지면서 수직으로 상승하고 흡사 생명체처럼 증식해나가는 과정을 환영처럼 안긴다.
이 추상적인 조각은 그러나 고대 그리스조각들을 흉내 낸다. 그것 자체로는 그저 철 조각들이 용접에 의해 붙어있는 자취인데 빛이 개입해 벽에 그림자를 드리우면 그 이미지가 그리스 조각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와 시모트라케의 니케, 메두사의 머리를 든 페르세우스 상들이 영상처럼 벽에 어른거린다. 마치 그림자극을 보는 듯하다. 조각이자 그림이고 설치이자 영상적인 부분까지 아우르는 작업이다.

고대 미술 가운데 가장 탁월한 것으로 그리스 미술을 꼽은 이는 빙켈만이다. 그리스조각가들은 살아있는 것 같은 이미지, 매혹적인 환영을 창조한 이들이다. 고대 그리스의 미술감상자들은 이미지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일 때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스미술가가 이미지의 창조자로서 특권을 누릴 수 있었던 이유는 그리스문화가 종교적이었고 그 종교는 바로 ‘신인동형론’에 기초했기 때문이다. 즉 신을 어떻게 인간의 모습으로 보여주느냐가 그리스 종교의 관건이자 미술가의 임무였던 것이다. 그리스조각은 서구미술의 원형이자 조각의 고전으로 여전히 논의되고 감상되고 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그리스 미술이 변함없는 인간의 마음을 상징한다고 본 이다. 그가 인간 심리에 대한 분류체계를 세우는데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그리스조각인 셈이다. 한국의 경우도 근대 이후 서구미술의 수용과정에서 그리스조각은 서구미술, 미술(조각)의 전형이고 기준이었다.

엄익훈은 그 그리스조각상을 그림자로 보여준다. 그림자는 철 조각들을 용접해 이어나간 덩어리들로 인해 발생한 것이다. 그 자체로는 무의미해 보이는 일상적 오브제, 철 조각조각들, 어떠한 형상이나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은 듯한 작은 철/물질을 반복해서 붙여나가면서 일으켜 세우고는 그 위로 조명을 쪼였다. 그러자 벽에 그림자가 드리워졌는데 그 그림자가 실감나게 그리스조각상을 연상시켜준다. 결국 엄익훈이 애써 용접해서 증식시킨 철 조각은 벽면에 투영된 이미지를 만들기 위한 것이었을까? 여기서 그림자는 사물에 종속되는 이차적인 존재라거나 우연한 현상으로 생겨난 것이라기보다는 작가의 의도에 따라 필연적으로 생겨난 현상이다. 최근 그림자가 새롭게 주목되고 그것 자체로 의미를 지닌 작업들이 많아졌다는 생각이다.(정광호, 차상엽 등)
엄익훈이 공들여 철 조각들을 용접해 붙여나가 이룬 추상적인 구조는 부재하는 (그러나 없다고 할 수 없는), 부피나 질량을 갖거나 공간을 채우고 있지도 않은 일종의 허상을 만드는데 동원되었던 것이다. 그의 조각은 그렇게 그림자로 인해 비로소 의미를 갖게 되었다. 조각이 놓이는 공간(바닥)에서 소외되고 배제된 벽이 핵심적이 장소가 되었으며 물질성을 지닌 조각적 소재가 결국 비물질적 이미지로 가 닿은 형국이다. 눈으로 보고 확인하는 물질과 그것들이 불가피하게 파생시킨 그림자 이미지의 관계는 그 어느 한 쪽으로 기울지 않고 대등하고 평등한 관계를 만들었다. 표면에서 이루어지는 회화의 세계와 공간에서 이루어지는 조각의 세계가 겹쳐졌고 조각이자 회화이고 실재하면서도 부재하는 것을 동시에 거느린 풍경이 되었다.
추상적인 물질덩어리와 그것이 만든 구체적이고 사실적인 이미지 사이에서, 철이란 물질의 표면 현상과 그 너머에 펼쳐지는 이상적인 이미지가 공존하는 기이한 장면이기도 하다. 시대를 초월해 서구고전주의조각의 전통과 모더니즘 조각이 상호조응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참조하고 기생해나가는 상황을 보여주기도 하며 신화의 세계와 차가운 물질의 세계가 이원적인 구도로 대립되거나 분리되기 보다는 그 둘이 흥미롭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기도 하다. 엄익훈의 작업은 이렇게 많은 의미를 파생하며 그림자처럼 어른거리고 흔들리며 다가온다. 기존 조각을 규정짓던 무수한 개념들을 흩트려가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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