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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승희 / 여행용가방과 꽃의 조우

박영택

장승희-여행용가방과 꽃의 조우



여행용가방과 꽃이 있는 화사하고 치밀한 그림이다. 공들여 그리고 오래 칠해 마감된 채색 화면은 환하고 견고하다. 동양화 재료를 다루는 기본적인 방법론이 단단하게 자리한 화면에는 단독으로 혹은 여러 개의 박스형 가방들의 내부가 열린 체 늘어서있다. 가방들은 복수로 늘어서 있다. 반복과 병렬은 가방의 존재감을 강조한다. 그 내부에서 탐스러운 꽃이 자라나듯 나와 있다. 딱딱하고 단단한 박스형 가방에 부드럽고 유연한 꽃잎이 탐스럽게 벌어져 끼여 있다. 가방은 내부를 열어 꽃을 피워낸다. 가방은 화분처럼 꽃을 키워내고 있고 품고 있는 것이다. 나로서는 이 개방, 회임, 수용의 은유가 무척 재미있다. 열린 가방들은 인간 육체와 유사하게 다가온다. 가방들은 저마다 하나씩의 꽃을 품고 있다.
가방과 꽃의 만남도 ‘재봉틀과 우산의 만남’ 만큼이나 다분히 초현실적인 조우다. 가방이나 모자에서 꽃을 뽑아내는 마술의 한 장면을 연상시킨다. 왜 마술쇼에서는 한결같이 꽃과 비둘기가 익숙한 일상의 사물들 사이에서 나오는 것일까?
일상의 공간에 꽃을 두는 이유는 삭막한 불임의 공간에 자연과 생명을 개입하려는 의지일 것이다. 혹은 아름다움을 목도하겠다는 시선일 수 있다. 어쩌면 꽃은 모든 순수와 미의 기호가 되어 도처에 흘러 다닌다. 혹은 또 다른 상징으로 여러 의미를 산개시켜나간다.

장승희의 그림은 익숙한 사물을 빌어 상징적 이야기를 기술한다는 생각이다. 가방과 꽃, 지도 이미지가 모여 모종의 이야기를 전해준다. 이 이야기그림은 무척이나 화사하다.
가방은 그 가방을 소유하고 있는 이의 실존을 대신하고 동시에 여행과 이주 등을 떠올려준다. 지도 또한 미지의 공간을 시각화, 기호화하면서 일상에서 벗어나 다른 곳으로의 도피 내지 여행을 암시해준다. 꽃은 소망이나 희망, 꿈의 결실 내지 동경에 해당할 것이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분신처럼 가방 사이에서 몸을 내밀고 희망과 꿈을 키워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처럼 몇 개의 상징을 빌어 작가는 자신이 내밀하게 품고 있는 잔잔하고 아련한 꿈이나 소망을 이야기한다. 그래서 그림은 선명한 문장이 되어 다가온다. 그래서 그림은 정교한 일러스트레이션에 유사하다. 그런데 이 부분이 유연하게 흐트러지면서 회화적인 분위기로 자유로워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다.

딱딱하고 견고한 사각의 가방은 무엇인가를 가득 담고 어디론가 떠나는 이의 실존을 대신할 것이다. 아니면 몸의 분신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그것 자체로 자족적인 세계이자 이동할 수 있는 집, 공간, 작가만의 이상적인 세계는 아닐까? 그런데 정작 그 가방에는 일상의 용품들은 사라지고 꽃밭 마냥 꽃들이 탐스럽고 화려하게 몸을 내밀고 있다. 꽃 또한 저마다 사연을 간직하고 어디론가 떠나고자 열망하는 이들의 대리물일까? 버겁고 비근한 일상에 사로잡혀 사는 이들은 늘상 이런 식의 삶이 아닌 다른 식의 삶을 꿈꿀 것이다. 일상에서의 일탈은 우선적으로 여행으로 상정된다. 현재의 삶이 이루어지는 익숙한 공간을 떠나 낯선 공간으로의 이주를, 잠시나마의 유예를 갈망한다. 사람들은 저마다 분열적 감각 아래 삶을 산다. 익숙한 일상에 젖어들면서도 한편으로는 그 익숙함에 길들여지는 것에 대해 불안해한다. 그 불안이 강도 높게 다가오면 일상을 흔들고 그 내부에 균열을 내고자 한다. 그것이 잠시마나 가능한 것은 여행일 것이다. 아니면 수시로 그런 상상을 통해 자신의 몸과 의식을 경계로 내모는 일을 도모할 것이다. 스스로 틈을 만드는 것이다. 어쩌면 그림을 그리는 일도 그런 맥락에서 가능한 일이다.

일상 공간에서의 일탈이 여행이라면 그것은 여행용 가방으로 암시된다. 우리들은 낯선 곳에서도 최소한의 일상을 유지하기 위해 짐을 꾸려 가방을 채운다. 그러니까 커다란 여행가방이란 일탈과 모험을 여전히 익숙한 생의 리듬 아래 관리하려는 무의식적인 준비일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그 가방 안에서 꽃을 피워낸다. 정교하고 치밀한 채색기법 아래 완성도 높게 그려진 이 그림은 묘한 상황설정을 보여준다. 정물화나 풍경화는 아니고 일상의 기물과 꽃을 빌어 몽상적이랄까, 환상적인 장면을 선사한다. 화사한 장식성을 거느리고 가방과 꽃, 지도가 세밀하게 그려지고 배경은 색채추상적인 흔적으로 가득한데 유심히 들여다보면 부분적으로 질감, 표면의 상황이 다르다. 다분히 촉각적이면서도 균질하고 매끄러운 화면이 공존한다. 그것을 통해 그림이 단지 시각에 호소하기 보다는 몸의 총체적 반응을 은연중 유인하는 장치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 지점이 이 채색화가 성취한 소중한 부분이다.

사실 나로서는 익숙한 상징과 그로인한 이야기보다 기법 자체가 흥미롭다. 보편적인 채색화기법이기도 하지만 맑고 견고하며 밀도 높은 색채의 층을 이루면서 촘촘하게 매만져 이룬 질감, 정교한 묘사를 동반한 완성도 높은 화면 자체가 힘이 있다.
장승희의 근작은 그런 채색화의 힘을 견지하면서 가방과 지도, 꽃 혹은 사물을 빌어 본인이 일상에서 꿈꾸고 몽상하는 장면을 그렸다. 그 이미지들이 상징적 언어가 되어 깔끔하고 명료한 문장을 이루고 있다. 가방 안의 꽃이란 다분히 우연적이고 초현실적인 상황을 통해 자신의 내면과 의식의 흐름을 유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일상에서 소중하게 키워내는 꿈과 일탈에의 동경으로 정성껏 수놓아진 그림이다. 그림그리기는 그렇게 자기 소망의 가시화에 가닿는 절실한 행위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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