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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을 보는 시선- 동시대 한국화의 풍경

박영택

전통을 보는 시선- 동시대 한국화의 풍경



최근 한국화(동양화) 작업은 이전에 비해 과감하게 해제되어 가는 형국이다. 젊은 작가들에 의해 감행되는 전통화의 도상들을 자의적으로 차용하고 유희적으로 번안하는 작업들이 그 한 예다. 그것이 유사하게 패턴화 되면서 유행이 되고 있다는 인상도 든다. 유사한 아이디어가 반복되고 관습화되어 떠돌아다닌다. 물론 개인적이고 기발하며 놀라운 성과들도 분명 많아졌다. 이전과 무척 달라졌다. 그러나 여전히 부족하다.
오늘날 작가들에 의해 산수화는 라면으로도 만들어지고 종이로 입체화하고 컴퓨터상에서 사진이미지로, 혹은 동시대의 도시풍경과 습합되어 유동한다. 민화는 플라스틱오브제로, 초상화는 마이클 잭슨이나 슈퍼맨이미지로 변신한다. 그런가하면 루이뷔똥이나 샤넬 로고가 전통적인 채색화로 그려지는 형국이다. 그것은 전통을 오브제화 하고 하나의 탈문맥화된 기호로 다루면서 자의적인 이미지의 배열 안에서 순환시킨다. 그래서 마치 팝아트의 도상들처럼 다루어진다. 산수화, 초상화, 민화, 사군자가 죄다 그렇게 번안되고 변질된다. 그것은 이미 죽은 이미지들, 화석이 되어 버린 이미지들이다. 아마도 최근 작가들이 이해하는 전통은 그런 것으로 자리매김된다. 그러니까 오늘날 전통은 간편한 소재로 취급된다. 전통을 하나의 이미지, 기호로만 여길 경우는 그렇다. 따라서 중요한 문제는 ‘전통의 현대화’라는 구두선이 아니라 매 순간 한국 동양화단에서, 미술계에서 도대체 전통이란 것이 왜, 누구에 의해, 무엇 때문에 호명되고 의미를 부여받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전통을 박제화시키고 그것을 오브제로 여기지 않으려면 전통에 대한 모색과 논의가 다른 차원으로 진전되어야 한다. '전통이 이런 것이다' 라고 확인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전통이라고 규정하는 것이 아니고 전통은 어떻게 호명되고 만들어지는가, 어떤 필요성에 의해 호출되는가를 질문해야 한다.

그리고 그 당시에 그림이 그렇게 그려졌으며 어떤 문맥에서 제작되고 이해되었으며 조형적 방법론들이 무엇이었는가를 잘 깨달아 그것들이 간직하고 있는 이미지에 대한, 미술에 대한 의미심장한 요소들, 그러니까 서구미술을 넘어설 수 있는, 탈근대적인 내용들을 부단히 찾아내어 환생시키는 일이 중요해 보인다. 시선의 문제, 프레임, 그림과 문자의 관계, 시간, 유토피아의식, 이미지와 삶과의 관계, 이미지의 주술성, 그림의 가설방식, 정신적 활력 속에서의 그림감상 등등 헤아릴 수 없는 여러 흥미진진한 부분들이 잠복해있다고 여겨진다. 그런 면에서 동양미술의 전통은 거대한 광맥이다. 그런데 나로서는 이런 시도를 오히려 다른 장르쪽에서 더 많이 발견한다.

전통회화의 세계를 토대 삼아 이를 해석하고 풀어내는 작업, 그리고 풀어내긴 하되 그것이 서구현대미술의 방법론과 조형이론과 접목되는 지점 내지는 다분히 이를 의식한 데서 이루어진 것이 그간의 한국 현대한국화란 사실은 부정하기 어렵다. 크게 구분해 본다면 산수화적인 풍경, 인물산수화와 사군자, 서예(서체)의 변용, 그리고 한국화의 재료 체험을 문제시하는 작업이 그것이다. 이는 당연하고 바람직해보이고 또는 분명한 성과를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한국화를 사고하는 틀의 유연성이 부족하고 지나치게 명목론적인 입장에서 정답 같다고 여겨지는 쪽을 물고 있다는 아쉬움도 지우기 어렵다. 그런 당위성을 갖다가 저마다 조금씩 ‘인테리어’를 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작업은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우리가 동양화의 전통과 그 ‘현대적 변용’또는 식상하지만, 전통을 무엇이라고 인식하고 있고 그것을 해석하는 틀들이 무엇인지 그리고 도대체 ‘현대화’한다는 것은 또 무엇인지, 그리고 정말 현대화를 해야 하는 것인지, 그 현대란 것은 무엇인지, 그리고 현대미술과 ‘조형의 현대화’란 것을 어떻게들 이해하고 있는지가 해명되어야 한다.
나로서는 너무 강박적으로 전통을 의식하지 않는 것이 좋을 것 같다. 동양화도 하나의 회화로서 그 회화에 관련된 여러 모색들을 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회화’를 먼저 질문해보아야 한다. 작가들 스스로 먼저 나는 회화를 무엇이라고 여기는가. 어떻게 이해하는가, 나에게 회화는 어떤 것인가가 물어져야 한다. 그것이 스터디가 되고 체험되고 깊어져야 한다. 동시에 전시방식, 재료의 완결성, 좀 더 세련되고 멋이 있고 감각적인 마무리 등이 요구된다. 총체적인 감각의 ‘퀄리티’가 요구된다. 아울러 그런 작업에 대한 이론적 논의도 지금과는 다른 차원에서 전개되어야 한다. 한국화와 관련된 이론으로만 매몰되지 말고 동시대 회화, 영상, 사진, 인문학과 맞물려 논의되는 여러 지점들을 부단히 개발해야 한다. 해석되어야 한다. 현재는 그런 요소들이 부족하기에 주요 기획전시, 미술시장, 페어에서 한국화가 고전을 면치 못한다는 생각이다.

한국 현대미술, 특히나 현대한국화는 근대 이후 유입된 서구미술과 지난 전통사회에서 기능하던 이미지 사이에서 나름의 ‘알리바이’를 만들어나가려는 지난한 과정을 보여왔다. 그것은 대다수 작가들에게 공통된 과제이자 심리적 억압이고 불편한 강박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그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데서 문제는 좀 심각해진다. 미술이 이렇게 공통된 숙제를 열심히 풀어내는 일이 되어버렸다는 것은 우리 미술이 자유롭고 개방적이고 진정한 의미에서 개별적이 되는 길을 옭죄는 일이기도 하다. 나로서는 자기의 개인적인 작업이 개별적이고 창조적이며 진정한 의미에서 주체적이여야 한다면 무엇보다 자신의 삶이 주체적이 되고 개별적이 되어야만 가능하다. 자신에게 있어 미술이 무엇인지, 한국화작업이란 것이 무엇인지에 대한 개별적 시각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그림은 바로 그 지점에서 풀린다. 그리고 이는 그만큼 전통회화에 대한 정확한 이해를 바탕으로 개별적인 시선으로 그것을 뜯어먹어야 한다는 점이다. 한국화와 미술에 대한 자신만의 주체적 시각과 해독 행위가 있어야 가능하다는 것이다. 당연히 서구현대미술에 대한 이해와 해석 역시 그러하다.

오늘날 한국화 작가들의 작업에서는 여운과 맛이 부족해 보인다. 전통회화에서는 그들의 삶의 감각과 희구가 매력적으로 녹아있다. 오히려 표면적으로는 전통화의 도상과 상징들, 재료들을 거침없이 끌어 쓰는데도 그런 맛과 여운, 세계와 사물, 그림을 대하는 태도는 다분히 실종된 듯 하다. 너무 꾸며지고 조형으로만 가공되고 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현재 상당수 동양화작업은 거의 공예적이다. 그것도 키치적인 공예수준이다.
서양과 동양의 두 문화의 접점과 경계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그 두 세계를 다 같이 들여다보고 거기서 어떤 틈과 흔적을 되살려내는 일이다. 그 차이를 읽어내는 일인데 그것은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 그 두 개의 단순화의 논리를 비껴나는 일이기도 하다. 또한 단순히 동양화 장르, 그림의 문제만이 아니라 결국 근대화 이후 한국에서의 삶과 문화를 반성해 보는 일에 다름아니다. 사실 글은 이렇게 쓰고 여러 단상들이 범람하지만 과연 동양화가 어떻게 진행되어야 하고 어떤 식으로 풀어나가야 될지 가늠하기란 쉽지 않다. 잘 안잡힌다고 하는 것이 솔직한 표현이겠다.

알다시피 동양인들은 자연을 외경하면서 자연의 기운이 인간 생활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믿어왔다. 자연과의 조화가 삶의 가장 중요한 일이고 바람과 물이 인간의 문제와 깊이 결부되어 있다는 인식이 바로 그것이다. 인간이 이 세상에 태어나서 머무르는 것과 사물과 그리고 세계, 이 모든 것이 하나의 조화로운 총체를 이루며 있는 어떤 방식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동양의 예술이고 그림이다. 그런 의미에서 전통 동양화란 결국 동양문화의 형이상학을 말해주는 지표이자 일종의 가시화된 상징이다. 아름다운 자연환경 속에서 인간이 느끼는 현실적 조화의 느낌에 그 현실적 근거를 두고 고양된 자연의 장은 자연 속에서 운위되는 일상적 삶과 단절될 필요가 없는 것이다. 모든 것의 근본은 자연의 유기적 일체성이고 이것은 자연의 체험에서 궁극적으로 증거되는 것이다. 이 전체성은 또한 현실적으로 농경적 삶의 안정된 한계들에 의해 뒷받침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구화, 근대화의 물결 속에 그같은 공간 인식은 상실되었다. 사물의 전체적 안정성을 보장하는 그 공간의 안정성이 사라지고 장소와 결부되지 않은 이미지들이 범람하게 된 것이 오늘날 현대미술이다. 그렇다면 오늘날 이전에 회화에서 특별한 목적으로 재현되고 가설된 풍경, 산수 등 전통사회의 이미지를 그린다는 것, 계승하고 현대화한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가를 물어본다는 것, 그것이 현재라는 시공간 속에서 어떻게 다시 읽혀지고 해독되고 번안되어야 하는 지의 문제는 상당히 의미 있는 질문일 것이다.
예를 들어 산수화를 생각해 보자. 조선조의 유교적 인생관은 사람의 사회적 의무 및 공인으로서의 봉사에 가장 중요한 의미를 부여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은자적 삶의 근원성 또한 인정하였고 그를 통해 균형 잡힌 삶, 현실과 이상의 조화로운 공존을 지탱시키고자 하엿다. 그러한 은자적 삶의 근원성을 현실계에서 가능하게 충족시켜 준 것이 바로 산수화다. 이처럼 산수화의 사회적 기능의 하나가 바로 ‘은자적 삶의 이상화’이다. 사회적, 대 인간적 의무로부터 놓여나 자연 속에서 자기 수양에만 몰두하는 단순한 삶을 의무와 봉사의 인생에 대조시킴으로써 그 둘 사이에 있어야 하는 ‘균형의 필요를 상기시키는 것’이다. 나로서는 바로 이 지점이 산수화의 핵심적 기능이라는 생각이다. 그것은 결국 현실적, 세속적 삶의 의무와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지키고 끊임없이 긴장을 부여하면서 스스로의 삶의 자정역할을 가능하게 해주는, 추스려 주는 힘이다. 그래서 그림 속 선비들은 대부분 자신의 육체를 ‘엣지edge’에 위치시킨다. 가파른 모서리에 갖다놓는다. 이런 시선과 태도가 오늘날 한국화에서는 어떻게 자리하고 있을까?
또한 산수화는 읽는 그림이자 더듬고 그 사이로 헤매는, 가상의 소요 체험을 상상하게 한다. 그림은 책이었다. 르네상스 이후 서구미술의 시각양식은 자연세계와 그 회화적 표면 사이의 대칭적인 관계를 강조하는데 반해, 동양화의 지배적인 양식은 비대칭적이며 그려진 이미지와 관찰된 세계 사이, 그리고 그려진 이미지들 자체 사이의 은유적 연계를 강조한다. 동양인들은 그림이 실재가 결코 될 수 없다는 사실을 오래 전부터 알았다. 사실 그림은 그림일 뿐이다. 따라서 동양의 그림은 실재를 추구하기 보다는 정신적인 활력을 통해 외부세계를 체득하는 그 어떤 통로로 그림을 대했다. 그림은 그저 종이라는 단면에 올려진 먹과 붓질이 만들어놓은 흔적일 뿐이다. 그것은 실재가 아니라 일종의 허구이다. 그러나 그림이 없다면 세계를 내 의식 안으로 끌어들이고 감상하고 오랫동안 응시하기 어렵다. 산수화는 실세계를, 자연의 진면목을 가상으로 경험하게 해주는 그림, 일종의 시뮬레이션에 해당하는 그림이다. 그래서 그림은 다른 세계로 이행하게 해주는 매개의 역할을 한다. 징검다리로서의 그림말이다. 그것은 ‘그리기’라기보다는 ‘상상하기’라고 해야 더 어울린다. 사물자체에 내재한 정신성과 기운이 발현되어야 보고 이를 표현하는 것이 산수화의 문제였다. 따라서 대상을 보는 이의 사상과 감정, 의도, 철학 등이 화면 안에 반영되어야 했다. 결국 동양화에서 중요한 것은 물리적 현상의 재현이 아니라,‘현상의 경험’이었다. 단순한 물리적 재현이 아닌 정신적 재현이라는 얘기다. 그것은 눈으로써 사물을 관조하는 것이 아니라 이른바 심안으로서 관조하는 것이다. 정신적인 활력을 자극해 실세계를 지각하고 그림 너머의 세계로 몸과 정신을 유인해주는 것이 바로 산수화다. 산수화를 보면서 실재하는 자연을 소요하는 체험(정신적 활력)을 맛보게 하는 것이다. 이처럼 관자를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고 동참시키며 그의 상상력과 지각작용을 독려하는 것이 산수화였다. 서양의 회화가 외부세계를 재현함으로써 이를 소유하고 장악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키워왔던 것, 그래서 소유의 욕망을 극대화하는 이른바 인간중심주의적 시각으로 자연을 정복하려는 욕망에서 나왔다면 동양은 애초에 그런 재현의 욕망이 있을 리 없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전통화에 내재된 탈근대적인 요소를 만날 수 있다. 그런 것을 어떻게 오늘날 환생시킬 수 있느냐가 핵심적인 과제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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