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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양 / 익숙한 시선과 지각의 교란

박영택

주도양-익숙한 시선과 지각의 교란



1839년 프랑스 과학아카데미에서 세계 최초로 카메라의 발명이 공표된 이후, 사진은 엄청난 발전을 거듭해왔다. 이제 사진이 단순한 기술의 차원을 넘어 독자적인 예술장르로 확고히 자리 잡았으며 현재 사진 매체는 다른 어떤 매체보다도 현대미술의 중심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런 차원에서 현재 한국미술계에서는 장르와 전공을 불문하고 다양한 작가들이 사진을 흥미롭게 다루면서 자신의 작업세계를 전개해나가고 있음을 본다. 나로서는 오히려 사진 쪽 작가들보다 미술 쪽 작가들이 사진매체를 자유롭고 기발하게 다루면서 이미지에 대한 풍부한 사유, 그리고 재현을 둘러싼 논의와 사진이란 매체의 의미, 조건 등에 풍요로운 질문을 던지고 있는 일련의 작업을 만난다. 그중에서도 사진을 통해 허구적인 상황을 연출하면서 기존 사진이 객관적 사실의 증명 혹은 기록이거나 투명한 재현이라는 사실을 교묘하게 뒤틀거나 흔들면서 또 다른 허상을 보여주는 작업내지 기존 사진적 시각의 반성과 사진이란 매체를 회화적 도구로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면서 시선과 재현의 문제, 작가라는 주체에대해 의미 있는 질문을 던지고 있음을 본다. 주도양의 작업 역시 그런 예의 하나다.

화면은 2차원적인 평면이다. 사진이 얹혀지는 인화지 역시 납작한 평면, 피부에 불과하다. 평면에 빛으로 그려진 하나의 ‘상’이 사진인 것이다. 그렇다면 2차원에서 3차원을 재현하는 것은 회화의 수법의 문제이자 사진의 문제이기도 하다. 회화와 사진은 모두 피부위에서 환영적인 이미지를 보여준다. 둘 다 평면에서 보여줌과 동시에 눈으로 사물, 세계라는 3차원을 재현하는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이미지가, 사진이 현실로부터, 우리 몸의 지각으로부터 완전히 단절될 수는 없다. 아울러 그렇게 지각된 현실의 한 단면이 평면, 피부위에서 기이한 환영적 체험을 야기한다. 그러면서도 실제적인 외부 환경을 입체적으로 환기시킨다. 그것은 사진이 지닌 미묘한, 불가사의한 힘이다. 최근 여러 작가들의 사진작업은 그 같은 실제와 환영의 경계를 문제시하고 있다. 사진이란 매체를 공유하지만 이들에게 사진은 단순한 기록이나 개념의 도상화가 아니라 사진이란 매체 자체를 질문하고 사진이 구체적인 실세계를 담아내면서 그것이 평면위로 안착되어 오는 과정에서 야기하는 지각체험 등을 문제시하고 있다. 주도양의 작업도 그 맥락에서 기능한다. 그에게 사진이란 매체는 회화의 재료로 기능한다. 그는 사진을 가지고 물감과 붓을 대신해 이미지를 만들어나간다. 연출해 보인다. 이 사진 콜라주는 여전히 화가의 눈과 손에 의해 만들어진 작업이다.

독일의 생리학자 페닝거(Karl Pfenninger)의 시각적 비유에 의하면 인간의 오른쪽 눈, 왼쪽 눈은 각각 2차원의 영상밖에는 인식하지 못한다고 한다. 그렇지만 이 두 눈에서 받아들인 조금씩 다른 2차원의 영상들이 두뇌에서 종합되면 3차원이라는 질적으로 다른 공간적 비전을 만들어낸다는 것이다. 비슷한 방식을 통해 서로 다른 형태로 수용된 두 데이터가 두뇌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결합해서 한 단계 높은 차원의 창조성으로 발현된다는 것이다. 우리 눈 역시 매우 잡종적이고 그로인해 창조적인 새로운 결합을 만들어내는 기관인 셈이다. 주도양의 사진은 우리 눈의 그 같은 속성을 끌어들여 그 환영성을 길어 올린다. 그는 사진의 ‘한 눈 보기’를 거부하고 다차원적인 접근을 시도한다. 실제의 세상을 바라보고 ‘진짜처럼 보이는 효과’를 얻기 위해 여러 장면의 사진을 사용하고 우리가 지각하는 관념적인 세상을 보여주려는 것이다. 따라서 원 샷으로 마무리하는 원근법적 시각을 벗어나 현재의 시점, 시간을 다양화하고 있다. 그것은 결국 우리의 지각을 의심하는 데서 출발한다. 그의 사진은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원형으로 제공한다. 그것은 일면이 아닌 다면의 세계이자 우리를 둘러싼 입체의 세계를 평면으로 만든다. 사진기를 360도 회전시켜 여러 장의 사진이미지를 얻은 후 이를 바탕으로 정교하게 조합하고 합성을 해서 한 장면으로 만든 사진이다. 사진의 평면성과 실세계의 재현력이 결합된 불가피한 장면이 만들어진 것이다. 이 구부러지고 원형으로 기이하게 결합된 사진은 실재에 대한 왜곡처럼 보인다. 현실로부터 출발했지만 그로부터 무척 벗어나 보이는 이상한 세계상을 펼쳐 보이는 것 같다. 그러나 현실을 조각조각 해체하고 이를 다시 이어붙이면서 다면원근법으로 통합해낸 그 이미지야말로 실세계의 사실적 모습임을 새삼 깨닫게 해준다. 그가 찍은 대상은 자연과 도시의 비근한 풍경으로 그 자체로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 그 사진을 보노라면 바라보는 주체의 자리가 무척이나 헷갈린다. 뒤집힌 세계이자 거꾸로 선 자리이고 내가 보는 것이 아니라 사물에 의해, 자연에 의해 보여지고 있다는 체험을 제공한다. 주체가 세계를 보는 것이 아니라 그와 반대로 사물이, 세계가 사진 찍는 주체를 바라보는 관점을 제공해주면서 작업을 주재하고 세계를 편재하는 작가의 주체적 위치 자체를 은연중 무력화시키는 것이다.

주도양 사진은 가상의 소실점을 중심으로 화면을 구성하는 근대 이후 서구의 시각적 재현을 일탈, 거부하는 재현 구조다. 원근법은 이차원의 평면에 삼차원의 현실 공간을 사물의 거리와 크기에 따라, 수학의 원리에 의거하여 재현하는 원칙으로 근대 미술 생산의 핵심 사안이었다. 원근법은 근대 회화가 보여주는 현실 환영주의, 즉 회화라는 재현을 바라보면서 실제 현실을 바라보고 있다는 환영감을 주려는 의도가 만든 재현 원리이다. 사진 또한 외부 세계를 객관적으로 재현한 것으로 이해한다. 따라서 한 장의 사진을 현실계와 동일한 대상으로 여기거나 그것의 인증의 결과이자 명징한 객관적 기록으로 여긴다. 그러나 사진은 눈앞에 존재하고 있는 세계의 어느 한 측면의 반영이고 그것 역시 그것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시선, 입장, 관심 등을 여과없이 반영한다. 그런 의미에서 엄밀하게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진, 순수한 재현적인 사진이란 사실 불가능하다. 사진 역시 그것 자체로 단일하고 완결된, 순수한 재현의 체계로 구성되어 있지 않다. 재현이란 사실상 불가능하다. 사진은 재현의 기능에만 저당 잡혀있지도 않다. 사진 역시 이미지를 다루는 수많은 매체 중 하나다. 주도양의 사진은 명료하고 선명하게 객관적 세계를 드러내는 사진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 재현의 투명성에 이의를 제기하는 작업이다. 주지하다시피 포스트모던 미술에서 이미지들의 의미를 결정하는 것은 외부세계에 있는 지시대상이 아니라, 이미지들 사이의 관계, 즉 텍스트로서의 의미이다. 따라서 이미지는 세계를 알려주는 것도 아니고, 재현하거나 기술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계를 새롭게 만들어가고, 이러한 창조 작업 속에서 이미지의 위력이 존재한다. 그에 따라 실재는 이미지에 의해 포착될 수 없고 직접적인 재현은 불가능해졌다.

주도양은 공간을 평면으로 만들고 360도로 훑어나간 시선을 종합해서 원형으로 이어 붙였다. 이제 우리는 입체적 대상을 한 순간, 시간 속에서 조망한다. 이 사진은 사물을 둘러보는데 걸리는 시간을 단축하거나 붙여버린 셈이다. 이것은 분명 보이는 세계이지만 미처 보지 못한 세계이자 그동안 사진이 보여주지 못했던 세계, 은폐시키거나 억압했던 장면을 되돌려주는 사진이다. 그로인해 우리는 우리가 보는 세계를 새삼 재인식하고 사진의 재현술을 의심한다. 세계는 정지되거나 한 시점에서만 보여지거나 고정된 시간 속에 응고된 모습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렇게 재현될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끊임없이 요동치고 원형으로 선회하며 걷잡을 수 없이 나아간다. 주도양은 그 세계를 여러 시간, 여러 장면을 이어 붙여나가면서 기존 사진적 시각이 왜곡된 것임을 드러내버리면서 허구나 판타지로 보이는 자신의 사진이 결국 사실적인 사진, 실제적인 세계상을 보여주고 있음을 드러낸다. 그러니까 이 정교한 사진은 사진적 시각을 해체하고 그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는 한편 시각적 유희를 유지하면서 탄탄한 조형적 요소와 원리 또한 한 몸으로 껴안고 있다.

주도양의 사진은 온 몸으로 찍기다. 그는 외눈으로 세계를 바라보지 않는다. 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전신적인 행위이다. 몸으로 보는 것이다. 본다‘voir’는 것은 안다‘savoir’는 것이기도 하다. 다시 말해 무언가를 본다는 것은 전신적으로 그것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은 일종의 받아들임이다. 보는 것은 수동적인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그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것이다. 대상을 바라본 내 몸의 신체적 지각반응을 보여준다. 또한 내가 보고 있는 대상이란 고정되거나 완결된 형체가 아니다. 그것은 시간의 지배 속에서 유동하는 불연속적인 존재이자 가변적이고 모호한 어떤 상태로 남아 있다. 따라서 특정 대상의 진실이나 본 모습이란 것 역시도 시간의 지배를 받는다. 그렇다면 대상의 본래 모습, 참모습이란 사실 부재하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대상을 정확하게 재현하거나 완벽하게 묘사할 수 있다는 믿음은 부정된다. 사진은 외부세계를 재현하지만 사실은 어느 한 시간을 찍는 것이다. 그 시간에 따라 세계의 모습을 계속 바뀌고 지연된다. 사진을 보면서 실재하는 대상, 세계를 연상하고 동일시하지만 사실은 그것은 한 순간, 어느 특정 시간의 편린일 뿐이다.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지배 속에서 변화를 거듭한다. 따라서 시간은 재현의 체계화된 세계를 뒤흔드는 현기증이며, 원본이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엄청난 소용돌이다. 시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실체가 아니다. 때문에 ‘순간’도 없고 ‘영원’도 없다. 있다면 부단한 ‘차이화’가, 즉 차이를 발생시키며 나아가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무수한 시간 속에 잡힌 풍경이 계속 접속되고 분열되듯 나아가면서 원형으로 이어지면서 세계를 보여주는 주도양이 사진은 그런 차이를 드러낸다. 그 차이와 분열은 우리가 보는 대상을 끊임없이 회의하게 한다. 그 모든 익숙함을 흔든다. 생각해보면 미술행위란 당대의 보편적인 시각적 관습을 회의하면서 낯설게 보기, 감각의 교란과 익숙함의 흔들기를 시도해나가는 일에 다름아니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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