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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보라 / 화장품으로 채워진 풍경

박영택

진보라-화장품으로 채워진 풍경



오늘날 우리는 사물의 시대에 살고 있다. 산업화된 체제 속에서 다양한 형태로 대량생산되어지는 공산품의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다. 사물에 둘러싸여 사물과 독대하며, 사물을 욕망하고, 사물을 탐닉하며 지극히 편애하는 삶에서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사물 없는 삶을 꿈꾸기 어렵고 소비할 수 없는 상품을 바라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것은 없다. 이렇게 너무 많은 사물, 상품들이 매장마다, 삶의 공간 이곳저곳 마다 흘러넘친다. 어느 날 진보라는 매장이나 화장대를 가득 채운 작은 화장품을 내려다보았다. 화장품에 대해 생각해보았으며 그 형태와 집적을 보면서 이런저런 상념을 길어 올렸다. 특정 공간을 가득 채운 이 화장품은 예쁘고 화려하며 아찔한 냄새를 치명적으로 안긴다. 백화점 1층에 들어서는 순간 사방에서 발산하는 그 화장품 향기에 취해보지 않는 이들은 없을 것이다. 그곳은 황홀하며 매력적인 낙원과도 같다. 동물성의 육체를 새로운 존재로 성형하며 탈취하고 탈색하는 화장품은 자신의 존재 근거를 부단히 바꾸라고 자꾸만 종용한다. 매혹적이자 동시에 공포스럽기도 하다. 이 양가적 감정이 싹트는 화장품 진열대가 진보라에게는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화장품은 소비사회의 대표적 공산품이다. 소비사회란 무엇인가? 산업자본은 부단한 생산과 소비를 통해서만 유지되는 체계이다. 그것은 시간의 차이를 이용해서 이윤을 남긴다. 산업자본은 잉여가치를 얻기 위해서 계속 상품을 만들고 그것을 팔아서 끊임없이 화폐를 회수, 그 화폐로 원료나 노동자를 사서 다시 상품을 만든다. 따라서 산업자본은 필요 이상으로 상품들을 사들일 만큼 소비자들을 끊임없이 유혹해야만 한다. 가장 효과적인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새로운 상품을 계속해서 시장에 내놓는 것이다. 새로운 상품이 상점에 들어오면 기존 상품들은 이내 낡은 상품이 되어버린다. 바로 여기서 유행(fashion)이 가능해진다. 타인으로부터 주목과 관심을 받고 인간의 욕망과 허영 같은 감정이 있기에 산업자본의 기호가치가 작동한다. 결국 소비사회는 필요 이상으로 상품을 구매하도록 하는 ‘환각의 체계’이다.
그 대표적 소비상품이 화장품이다. 여성들은 몸의 미세한 부위별로 화장품의 품목을 구비해야 한다. 그것은 색깔별로, 농도별로 혹은 톤에 따른 무수한 차이를 요구한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화장품은 과도한 미의 욕망을 창출하고 모종의 두려움과 강박을 심어준다. 소비사회가 창출하고 요구하는 미의 규범에서 도태되거나 배제되지 않기 위해 화장품 구입은 늘어나고 품목의 가짓수 역시 마냥 부푼다. 몸은 그렇게 분절되고 상품의 요구에 응해 관리되어야 한다. 그래서 화장은 제도다. 화장은 얼굴의 체계를 만들고 얼굴을 모델에 따라 대량 생산해낸다. 화장품은 성의 상품화와 소비사회의 강요된 미의 전형과 관련되며 또한 화장은 여자들의 일상과 불가분의 관계를 지니고 있으며 인공의 미를 대표하고 감각과 관능, 정형화된 미의식, 소비적인 아름다움의 욕망과도 연관되어 있다. 이른바 화장이라는 것은 이미지나 기호에 의해 표시된 것 즉 브랜드화된 것, 미의 기표가 계산되고 그 계산에 따라 구성된 미를 가공하는 것이다. 끊임없이 얼굴의 새로운 현실원칙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아름다움에 대한 종교적인 믿음과 갈망을 충족시켜 주는 구원 같은 상품들, 그것이 바로 화장품이다. 진보라가 보여주는, 화장품들이 늘어선 장면은 환상적이고 동시에 묘한 갈증과 두려움을 안긴다. 공간공포증을 야기하는 이 특정 공간을 가득 채운 화장품의 집적은 우리 시대의 욕망과 공포를 동시에 반영하고 있다.

진보라는 백화점이나 화장품 샵의 진열대, 화장대 등에 가득 늘어선, 배열된 각기 다른 형태, 크기, 디자인, 쓰임새 등을 지닌 화장품을 사진으로 수집해 이를 실크스크린기법으로 화면에 올린다. 화장품들이 놓인 자리, 배열과 배치, 크기와 각도를 컴퓨터 작업을 통해 인위적으로 조작한 후 이를 실크스크린으로 찍어 낸 것이다. 그러니까 작가는 사진정보를 컴퓨터에 넣어 이미지는 디지털 작업을 통해 왜곡, 단순화, 반전, 확대하거나 축소하는 등 원하는 형태로 조작한 후에 이를 바탕 삼아 최종적인 이미지를 실크스크린으로 찍었다. 그 과정에서 화장품 용기의 원래 색채 위에 다른 색채가 부가되기도 하고, 전혀 이질적인 색채로 대체되기도 한다. 외곽을 흩트리거나 단순화시키는 한편 리터치 된 붓질 자국으로 회화적인 효과를 강조하기도 하고 더러 사진이미지 특유의 망점을 살려 인쇄매체와 기계적인 프로세스의 특질을 드러내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무척 납작하고 단순화시켰지만 매우 스펙타클한 이미지가 되었다. 화장품이면서도 동시에 낯설면서도 강화된 존재로 다가오는 것이다. 화장품이란 상품 자체가 산업사회의 대량복제시대를 위한 것이고 미디어를 통해 강제되는 미의 유형과 틀을 반복, 복제하는 것인데 이러한 특성은 다분히 실크스크린 기법과의 유사성을 보여준다. 또한 작가는 빽빽하게 공간을 점유한 화장품을 내려다보면서 그 모습이 흡사 도시를 채운 건물과 유사함을 느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이 조감의 시선은 작고 하찮은 것들을 기념비적으로 보이게 하며 마치 대도시에 들어선 거대한 빌딩숲을 연상시킨다. 시선의 위상변화에 의해 사물은 낯설게 다가온다.
“무질서하게 늘어져 있는 화장품들의 모습 속에서 복잡한 도시의 형태를 발견할 수 있었 다. 고층건물이 빽빽하게 들어차있거나, 낮은 건물들의 모습들, 폐허가 된 건물과 쓰레기더미들...이 모습이 나의 화장대 안에 있다.”(작가노트)

물건을 수집하기를 좋아하는 개인적인 습관에서 발아한 이 작업은 화장품이라는 현대인의 일상소비용품의 존재를 질문하고 그것들이 무질서하게 늘어서 있는 모습에서 복잡한 도시의 형태를 발견, 도시와의 관련성을 또한 물어본다. 그래서 대량생산된 똑같은 화장품 용기들의 군집은 아파트의 형상과 슬그머니 겹쳐진다. 작가는 아파트라는 현대인의 주거공간 역시 화장품 용기와 마찬가지로 똑같은 틀에서 조금씩 다르게 살아가기를 강요한다고 생각한다. 상품과 건물은 둘 다 동일하게 소비사회가 요구하는 삶의 패턴을 강제하는 것이다. 그것은 안락과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주는 동시에 채워지지 않는 잉여의 갈증, 공포스럽고 두렵기까지 한 감정을 여전히 안긴다. 화려한 압도감과 개별성이 함몰된, 비인격적인 양상을 동시에 지닌 도시의 양면적인 삶의 방식과 화장품이 지닌 속성은 그렇게 동일시된다. 진보라는 진열된 수많은 화장품용기와 도시의 빌딩군을 겹쳐보았고 그 안에서 획일적인 삶을 살아가야만 하는 현대인의 운명을, 자신의 생애를 우울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다. 저렇게 반짝이고 화려하고 매혹스러운 사물들을 바라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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