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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환기 / 한국미의 근원을 노래한 작가

박영택

수화(樹話) 김환기(金煥基, 1913~74)는 1913년 전남 신안군 기좌도 읍동리에서 일남 사녀 중 넷째로 태어났다. 이후 고향을 떠난 서울 중동 중학교에 들어갔으나 중퇴하고 일본 동경의 니시기시 중학을 나오게 된다. 그는 일본대학교 예술학부를 졸업한 뒤 동 대학 연구과에 2년간 머무르면서 화단에 첫발을 딛게 된다. 일본 동경(1933-37)에서의 작품들은 당시 일본에서 유행하던 서구 전위미술, 이른바 추상미술의 영향을 받아 대상을 요약하고 단순화시켜가는 추상화의 의지와 면과 면, 면과 선의 상호작용에 의한 평면화의 밀도를 추구하는 것들이었다. 일본에서의 활동을 마치고 고국에 돌아온 후 그는 자신의 미술에 대한 본질적인 고민에 봉착하게 된다. 사실 식민지 모더니즘 미술은 두 가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는 고전 취향 및 심미 취향이고 다른 하나는 순수 조형 유희 및 관념 유희라고 하겠다. 따라서 김환기와 같이 일본에서 서구 전위미술, 모더니즘 미술을 공부하고 돌아온 작가들은 이후 일본을 통해 수용한 서구모더니즘의 그 뿌리 없음에 대한 반성을 하게 되었으며 자연스레 이의 극복을 동양 전통미술, 나아가 조선시대 미술에서 찾게 되었다. 그에 따라 김환기는 일본을 통한 서구의 현대 미술을 따르는 대신에 조선조 미술, 한국 전통미술과 자연을 따르기 시작한다. 그때가 1930년대 후반이었고 그런 학습과 체험을 거쳐 본격적인 작품이 나오게 된 시기는 1940년대 중반 이후부터다. 당시 김환기의 조선적인, 동양적인 작품 형성에 큰 영향을 끼친 이는 그와 절친했던 김용준과 이태준의 영향이 컸으며 특히 1930년대『문장』지의 이태준과의 교우관계는 결정적이었다. 특히 김환기는 이태준으로부터 조선 전통미술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공받았으며 당시 조선의 그림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제시받았던 것으로 여겨진다. 이태준과 문장이 내건 상고주의를 통해 김환기는 특히 조선시대 사대부문인들이 미적 세계에 관심을 기울였고 ‘조선적인 것’을 찾기 위해 노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일본에서 서구모더니즘을 받아들인 그가 유화물감이 지닌 독특한 질감처리와 함께 모더니즘 미술이 내건 평면성의 논리, 그리고 사실적 재현에서 벗어나 대상을 단순화시켜나가는 방법론을 통해 백자 등을 그려나가게 되었다. 이는 서구모더니즘을 수용하기에는 뿌리 없는 한국적 상황에서 나름의 정당성을 찾기 위한 혹은 우리 전통미술과 서구모더니즘을 접목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그는 일본을 통해 받아들인 모더니즘의 틀 안에 조선 미술의 미의식을 결합시켜내는 것을 자신의 예술의 과제로 삼았고 그것이 진정한 의미에서 한국적인 서양화, 한국적 모더니즘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김환기에 있어 궁극적인 미의 양식은 조선조 백자와 목기와 같은 우리의 문화유산 속에서 다시금 찾아진 것이었다. 가장 한국적인 대상들을 찾아내어 자기의 예술세계로 정착시켜나가고자 했던 그는 동양 그림과 글씨, 조선시대의 도자기와 목공예를 수집, 완상하면서 이후 자연스레 작품에 그 백자나 목기와 같은 문화유산이란 구체적 소재가 다루어졌다. 김환기는 특히 백자의 흐름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견했으며, 그러한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 고유한 미의 원형을 탐구해갔다. 비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꽉 차 있는 이 ‘불가사의한 형태’에서 한국의 미가 지향한 어느 완숙의 경지를 새삼 목격한 것이다. 김환기의 작품세계와 미의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것은 다름아닌 조선의 전통미술이었고 그중에서도 조선백자가 으뜸이었다. 그의 대표작 역시 백자 그림을 손꼽을 수 있다. 이처럼 김환기 그림의 정신적, 조형적 배경은 우리 전통 공예미, 그중에서도 백자 항아리에 있었다. 백자는 무엇보다도 단순한 색조와 형체, 대범함 선의 변화에서 그 아름다움을 찾을 수 있다. 한국 미술의 기본적인 특징은 단순간결성에 있다. 그것은 기능에 충실해서 군더더기가 없어진 결과이다. 기능과 자연 이외에는 아무런 인위적인 것을 가하지 않은 것을 김환기는 보았다. 그가 한국의 조형을 도자기에서, 목기에서, 그리고 민예품에서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와 같은 간결하고 소박한 우리의 미에 심취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김환기는 백자의 흰색에도 깊이 매료된다. 조선시대 선비들의 사상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의 하나가 바로 흰색에 대한 호상(好尙)인데 그 당시 생활에서 우러나온 백색의 호상과 백색의 세련미가 그릇에 적용된 것이 바로 백자다. 백자는 흰색 하나만으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데 이런 경지를 흔히 선경(禪境) 혹은 열반(涅槃)의 경지라고 한다.

 “ 우리나라 사람들은 순결을 좋아합니다. 깨끗하고 단순한 것을 좋아합니다. 그러기에 백의민족이라 부르도록 흰빛을 사랑하고 흰옷을 많이 입습니다. 푸른 하늘, 푸른 바다에 사는 우리들은 푸른 자기 청자를 만들었고, 간결을 사랑하고, 흰 옷을 입는 우리들은 흰 자기, 저 아름다운 백자를 만들었습니다.”라는 김환기의 언급은 백자의 흰색에 대한 그의 기호를 반영한다. 또한 그는 백자의 백색은 원만하고 너그러운 보름달이 떠오를 때처럼 큰 맛이 있고, 시대에 따라 변하는 온갖 것을 포용하는 깊은 맛을 이해했다. 따라서 김환기의 그림에 등장하는 백자들은 흰색이 아니라 조금씩 다른, 섬세한 차이를 지니고 있는 백색계통의 색조로 무한한 변주를 거듭한다. 그의 백자 항아리 그림은 조선조 항아리의 독특한 특징을 간결하게 표현했을 뿐만 아니라 조금씩 변형시키고 특징을 과장하여 재구성하고 있다. 김환기는 백자의 포름에서 아름다움의 극치를 발견했으며, 그러한 아름다움을 통해 우리 고유한 미의 원형을 탐구해갔다. ‘비어 있으면서도 동시에 꽉 차 있는 이 불가사의한 형태’에서 한국의 전통미가 지향한 어느 완숙의 경지를 홀연 목격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항상 조형과 미와 민족을 우리 도자기에게서 배웠다고 당당하게 말해왔다. 조형의 미와 민족을 도자기에서 배웠으며 자신의 교과서는 바로 우리 도자기라고 말하며 그의 그림은 결국 모두는 도자기에서 오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는 조선 백자에서 지고의 아름다움을 만났고 그 자연스러운 미감, 무기교적인 미가 궁극적으로 한국적인 미의 특성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서 우리 고유한 정서를 만났고 이를 조형화하고자 했다.

그 결과 해방 직후부터 1963년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그의 그림을 관통하는 중심 주제는 무엇보다도 도자기, 특히 조선의 백자 항아리였다. 그러다가 미국으로 건너가서는 특정한 소재, 백자이미지에서 벗어나 근원적인 자연과 정서로 확대되어 나간다. 그는 젊은 시절 식민지 조선을 떠나 일본에 가서 현대미술을 익혀 귀국했지만 남루한 한국의 화단에 절망한 후 진정한 모더니티의 미술현장을 갈망, 파리를 거쳐 뉴욕으로 이주했다. 바다를 건너 동경과 파리, 뉴욕에 가서 그가 꿈꾸던 미의 왕국, 모더니즘의 본고장을 순례했고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찾았을 것이다. 그 결과물은 역설적으로 어린 눈동자에 담아두었던 고향 섬마을의 바다색이자 우리네 쪽빛 하늘이고 저 창공에서 반짝이던 별빛이었다. 세계현대미술의 중심에 머문 이 불법체류자가 그곳에서 서구현대미술과 한국 전통미술, 변방에서 온 이방인으로서의 감수성이 혼재된 미술양식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러니까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구체적인 백자나 기물이 들어가는 대신 색채의 번짐과 반복적으로 찍어나가는 점이 이미지를 대신하고 두툼하고 촉각적인 화면질감(백자의 도기 표면이 지닌 그 견고한 살의 느낌을 보여주려고 했던 시도)이 지워진 자리에 흡사 화선지에 먹이 번져나가듯, 하늘과 바다의 색채가 투명하게 스며나가듯이 캔버스 천 사이로 물감이 적셔 들어가는 이른바 선염법으로 대체되기 시작한다. 이제 백자항아리가 자연으로 전이되었고 백색의 도자기 살이 투명한 하늘이나 바다로 선비들이 애완하던 백자와 사군자(매화), 기물이 먹빛과 먹의 번짐을 보여주던 모필의 흔적으로 바뀌었다. 그런 흔적으로 이루어진 그의 작품이 바로 한국현대미술을 대표하는 기념비적인 작품이 되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가 그것이다.
알다시피 그는 한국적인 것, 한국적인 아름다움을 타고난 직관력으로 포착하고 이를 아름답게 형상화시킨 작가로 알려져 있다. 유난히 큰 키에 마른 얼굴의 수화는 모던 보이처럼 항상 낭만과 이상을 꿈꾸며 멋을 키웠다고 한다. 비록 그리운 고국을 떠나 낯선 미국 땅까지 오게 되었지만 그는 늘상 자신의 유년을 꿈꾸었고 고향을 그리워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오로지 유년만이 모든 이의 왕국인 것이다. 어린 시절 섬에서 광막한 바다의 수평선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늘 미지의 세계, 뭍을 그리워 해대던 수화는 나이가 들어서도 어린 시절 바다와 별을 바라보며 환상을 키우던 그 꿈과 희망을 버리지 못하고 이를 단순화된 조형 언어로 찍고 바르고 칠해나갔던 것이다. 수평선을 늘상 접하고 사는 이들의 세계관, 시간관은 아마 그 너머의 세계, 경계 없는 세계를 하나의 근원과 희망, 유토피아로 지니고 사는 것 같다. 바다란 무한하고 가늠키 어려운 것이기에 마냥 숭고함을 불러일으키고 이를 바라보고 자라던 자들은 늘상 그 숭고의 대상에서 자유롭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결국 김환기의 그림은 ‘아름다운 자연’을 찾는 일이었고 그래서 항상 두고 온 고향땅을 그리워하면서 커다란 화면에 한 점,한 점 점을 찍어 나갔던 것이다. 무한을 상기시키는 청색조의 화면에는 무수한 점들이 찍히고 네모꼴의 헤아릴 수없는 필점들이 생동하고 있다. 그런데 그 단순화된 점들이 찍힌 그림은 흡사 수묵의 선염법처럼 화면 속으로, 캔버스 천 사이로 스며들고 번지면서 맑고 투명한 느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흡사 화선지에 그린 먹그림이 떠오른다. 더할 나위 없는 동양화 그림의 전형을 보는 것 같다. 이 그림 앞에서 보는 이들은 때묻지 않은 자연의 시정과 얼을 감촉할 수 있으며 깊은 명상에 은연중 끌려들어갈 것이다. 무수히 많은 점이 찍히고 옅은 물감의 얼룩이 수묵화처럼 스며들면서 화면은 이내 별처럼 빛나고 은하처럼 선회한다. 우주와 교감하는 예민한 화가 자신의 정신과 몸의 떨림이 있고 뒤척이는 청색 바닷물의 유동성과 질료성이 묻어 있으며 막막한 하늘의 무한성이 자리하고 있다. 수많은 별들의 반짝임이 있고 자연이 내는 온갖 소리들이 환청처럼 떠돈다. 또한 그 작은 점들은 조국과 고향을 떠올리면 추억되는 모든 것들을 부질없이 떠올려보는 수의 세계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 광막한 바다의 수평선과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며 늘 미지의 세계를 그리워하던 그는 동경과 서울, 파리와 뉴욕을 떠돌면서도 결코 그 고향의 바다와 별을 잊지 못했다.
고향 바다의 파득거리는 반짝임, 무한하고 광활한 자연, 바람소리와 별의 빛남, 황홀한 청색의 뉘앙스, 그리고 그 사이사이로 그리운 존재들이 부감되는 장면을 환각처럼 만난 그는 그 모든 것을 점으로 찍어나가고 습기로 적셔 들어갔다. 그렇게 해서 커다란 화면에 무수한 점들이 찍히고 스며든 그 작품이 탄생했다.

그러나 그 대표작을 그린 후 얼마 지나지 않은 1974년, 그는 뉴욕의 유나이티드 병원에서 뇌일혈로 사망했다. 김환기의 일생은 철저하게 멋과 미의 세계를 탐색한 여정이었다고 말해진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미술사가 최순우는 “멋이 죽었구나. 멋장이가 갔구나.”라는 말을 남겼다고 한다. 그만큼 김환기는 60평생을 한국의 멋을 폭넓게 창조해내고 멋으로 세상을 살다간 참다운 예술가였다. 봉건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도정에서 현대미술을 추구하면서 고결하게 살다가 죽은 그는 우리 작가로서는 최초의 대표적 추상화가로서 그 안에서 자신의 독자한 미의 세계를 추구해 나간 작가로 기억된다. 그의 그림은 서양의 재료로 그려진 그림이지만 그 정신이랄까 내면세계는 가장 한국적인, 동양적인 것으로 채워져 있다고 평가된다. 일찍이 한국을 떠나 세계를 떠돌며 서구미술과 한국적 정취를 하나로 묶기에 고심한 김환기는 우리 미술의 한 전형을 보여준 작가인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정서를 독자적 조형어법으로 구현시킨 대표적 화가로도 손꼽히고 있다. 그는 문장에도 뛰어나 많은 글을 남겼는데 우리는 그의 글을 어린 시절 교과서에서 만났을 것이다. 그가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던 것은 어느 면에서 그리움의 치유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림의 어원이 그리움이듯이 그의 그림의 근원 역시 이산과 유랑에 의한 향수에 기인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는 그 그리움의 정체에 자신의 삶을 걸면서 자연을 꿈꾸고 이를 형상화한 작가에 다름 아니다. 그리고 이는 결국 아름답고 자연스러운 동시에 가장 한국적인 그림의 전형으로 불거져 나온 것이다. 거기에는 자연에 대한 깊은 관조와 그리움이 적조하게 물들여진 세계가 놓여져 있다. 동시에 재료의 구사가 마음과 정서로 뭉개져 있음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오늘 우리가 그의 작업을 본다는 사실은 어느 의미에서는 그 연배의 예술가들에게나 가능했을 인문학적 감성, 뛰어난 한국 전통미술에 대한 감식안, 동양적 사상과 문기에 농후했을 그런 문화적 수준과 교양을 엿보는 일이고 동시에 어린 시절의 그 충만한 자연 체험을 배경으로 해서 한 위대한 예술, 자생적이며 세계적인 그림이 가능하다는 사실의 인식을 깨닫는 일일 수 있을 것이다. 아울러 격동의 지난한 시기를 살아내면서도 진정한 예술의 길을 추구해나가던 열정이 가득했던 화가다. 좋은 화가란 이처럼 가파른 현실 속에서 희망(별)을 노래하고 자기의 근원을 부단히 상기하는 이들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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