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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선희 / 동물원의 곰에 비친 현대인의 얼굴

박영택

옛사람들은 학과 말, 사슴 같은 동물에서 군자의 덕목과 행실을 찾아 즐겨 그렸다. 이른바 영모화 翎毛畵란 것이다. 산이나 물, 돌과 사군자와 같은 자연물은 말할 나위도 없다. 한결같이 자연계에 존재하는 생물, 무생물 모두에게서 인간이 지녀야할 가치와 진실을 찾았고 그것을 칭송하여 그림으로 그려 본받고자 열망했던 것이다. 따라서 인간이란 존재는 자연계의 무수한 존재를 소홀히 여겨 하찮게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낱 미물이라 할지라도 그 존재성에 깃든 미덕을 궁구하고 헤아리는 일이 요구되었다. 그것을 깨닫고 읽는 것이 인간의 도리이고 수양이며 학문 하는 일이고 예술 하는 일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선비들은 산수와 사군자뿐만 아니라 여러 동물들을 두루 그리면서 군자가 지녀야할 덕목을 찾았던 것이다. 다시 말해 자신의 내면과 정신세계 혹은 현재 자신이 세속과 거리를 두고 있는 지사적 존재를 상징하기 위해 그 동물이미지를 끌어들였던 것이다. 그러나 근대에 와서 이러한 영모화의 전통은 망실되었다. 그런 세계관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이제 동물은 단지 그림의 소재가 되거나 흥미로운 묘사의 대상으로 국한되었다. 그 존재에 깃든 의미망은 과학과 이성의 이름 아래 소거되었다. 더러 이전의 영모화의 전통을 애써 간직한 이들도 간혹 있었지만 현재 그러한 작가를 찾기는 어려워졌다.

박선희의 그림을 보았다. 우리 안에 갇힌 백곰이 그려진 그림이다. 조금은 생경하면서도 흥미롭다. 돌이켜보면 우리는 곰 토템민족이다. 단군신화는 그러한 사실을 잘 들려준다. 북방유목민족으로서의 정령 신앙적 존재가 곰이었고 그 곰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으로부터 우리 민족의 시원이 가능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작가는 동물원 우리에 갇혀 사는 곰들이 무리지어 있는 장면을, 암시적으로 그렸다. 같은 얼굴, 동일한 포즈이지만 약간의 기법적 차이를 주어 다르게 그렸다. 좀 무표정하고 어딘지 쓸쓸하고 가련해 보이기도 한다. 그 모습이 흡사 현대인들의 얼굴과 오버랩된다. 인간의 관상용으로 사육되고 있는 이 동물은 북극에서 이곳까지 왔다. 낯설고 불편한 공간에서 애써 목숨을 영위하고 있는 이 곰들은 왜, 무엇 때문에 동물원에서 집단 사육되어야 하는 것일까?
근대에 들어 인간의 기술과 과학의 발달은 야수성을 지닌 공포스러운 동물들을 완벽하게 포획하고 살생하고 장악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나아가 지식의 힘으로 그 모든 종들을 계통화, 체계화시키고 이를 인간의 지식 범주 속으로 소유하게 되었다. 그것이 일종의 도감이자 백과사전, 채집과 생물학 등이며 이를 실질적인 표본으로 제시한 게 바로 동물원이다. 동물원은 근대의 소산이다. 그것은 미술관, 도서관, 식물원과 동일한 시기, 동일한 목적 아래 출생했다. 19세기 근대자본주의 사회의 출현과 그에 따른 주말개념과 위락시설에 따라 생겨난 이 동물원은 인공의 자연이자 모조, 허구적인 자연이다. 그곳에 박제가 되어버린 동물들은 우리에 갇혀 인간의 눈요기가 되고 안쓰러운 생명을 연장해간다. 동물의 본능과 원초적 자연에의 향수와 기억은 지워져있다. 그저 마지못해 목숨을 영위해가고 있는 수동적인 존재들이 되어버린 것이다.

박선희의 그림은 동물원에 대한 일종의 비평적 시선과 언급처럼 보인다. 인간은 왜 동물원을 만들었을까? 동물원의 기능과 그 공간 배치, 구조란 무엇인가? 그것은 사회현실과 권력, 그 공간의 배치, 분리와 통제, 차별과 배제, 감금과 훈육 등의 것과 너무도 유사하다. 우리들 인간 역시 이렇듯 특정한 우리 안에 갇혀 통제되고 훈육 받으며 한 사회가 요구하는 인간형으로 길들여지는 것은 아닌가? 그것은 또한 철저히 제도의 문제 아닌가? 제도와 권력의 관계망에서 자유로운 인간은 없다. 우리도 역시 이 곰과 크게 다를 바 없는 인간이다. 우리에 갇힌 곰은 자연에서 밀려난 약자이자 희생자인 동시에 사회적 약자들과 동일시된다. 생각해보니 그녀는 동물원의 곰에서 결국 자신을 보고 우리들의 초상을 본 것이다. 곰이 너무 많은 생각을 떠올려주는 매개가 된 것이다. 그래서 곰은, 그림의 소재가 되었다. 오늘날의 영모화란 생각이다.

곰들의 모습이 평면의 장지위에 수평선의 흘림, 번짐 등에 의해 포착되었다. 옆으로 번지고 어른거리는 이 선은 마치 영상이미지의 주사선을 연상시킨다. 수직에 반하는 이 수평은 옆으로 누워있는 곰들의 그 지리한 권태와 안락함, 무서운 무료함 등도 동반한다. 작가는 부드럽고 틀에 박힐 수 있는 모필에서 벗어나 막대기나 뾰족한 도구를 사용해 옆으로, 화면의 평면성을 강조하면서 긋는다. 긋고 손으로 문지르기를 반복한다. 먹의 질료성을 독특하게 보여주는 한편 그 ‘상처’는 곰의 재현이 아니라 현재 곰이 처한 현실에 대한 은유적 성격을 지닌다. 동시에 명료한 상을 안기는 게 아니라 잔상이자 여운처럼 흔들리면서 저 곰의 불안한 존재감을 희박하게 보여준다. 우리에 갇힌 곰들의 모습은 얼핏 편안해보이겠지만 그들은 적응하기 힘든 기후와 공간에서 무척 힘들게 삶을 영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파열음처럼 스치면서 끊어지고 이어지는 선들은 혹 그런 불안한 존재감의 시각적 효과에 조응하는 것은 아닐까? 먹 선이 지나가고 그 사이에 채색잉크가 묻어난다. 먹과 잉크가 조화롭게 묻어있다. 그렇듯 이미지와 여백도 균형을 지닌다. 장지의 표면이 적극적으로 드러나고 그 어디쯤에 이미지가 위치해있는 식이다. 여백을 살리고 그 사이 어딘가에 곰의 머리와 몸의 일부를 감추듯 보여준다. 더러 꽃과 식물이미지가 자리했다. 그 이미지는 갇힌 곰들에게 위안과 희망의 상징으로 비춰진다. 그들의 거주지였던 자연공간을 암시하는 단서 같은 이미지인 것이다. 아마도 작가는 그 곰들에게 꽃을 선사해주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실제 동물원에서 소재를 취해 그린 이 그림에 저 꽃은 작가의 허구적인 서사, 장치에 속한다. 그러나 그 꽃이 결국 이 그림의 핵심적인 주제로, 다소 아련하게 다가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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