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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준 / 경계에 서서 내려다 본 풍경

박영택

시인 이상은 식민지 도시 경성을 거닐다 문득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서서 경성 시가지를 우울하게 내려다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정오사이렌이 울리고 “사람들은 모두 네 활개를 펴고 닭처럼 푸드득거리는 것 같고 온갖 유리와 강철과 대리석과 지폐와 잉크가 부글부글 끓고 수선을 떨고” 하는 그 찰나, 그야말로 현란을 극한 정오에 문득 겨드랑이에서 가려움을 느끼자 이렇게 외친다.“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한번만 더 날자꾸나”그는 경성시가지를 내려다보면서 기이한 환시에 시달린다. 그는 날고자 하지만, 주저 앉는다. 결코 날 수 없는 자신을 본다. 안준의 사진을 보다가 문득 이상의 소설 <날개>를 떠올렸다.
안준의 사진은 도시를 내려다 본 조감의 시선을 보여준다. 새의 시선이자 하늘의 시선이다. 높은 곳에서 도시를 내려다 본 풍경사진인데 유사한 맥락에서 임선영과 이득영의 조감의 시선으로 포착한 도시풍경이 연상되었다. 그들은 비행선이나 헬리콥터를 이용해 도시를 정보적으로 기록한다면 안준은 건물 꼭대기까지 직접 올라가 자기 몸으로 굽어본 장면, 그러니까 옥상에 올라가 카메라를 고정시키고 경계에 자신의 자리를 만든 후 촬영했다. 거친 바람의 먹먹한 소리, 지상으로부터 너무 멀리 벗어난 느낌이 드는 자리에 서서 혹은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순간 거칠게 부는 바람에 흔들리며 불안한 현실적 몸과 환상적으로 펼쳐지는 저 도시의 풍경, 그 경계 사이에서 균형을 잡으려는 자신의 몸을 의식했을 것이다.

고개를 숙여서 발 아래 펼쳐지는 도시의 모습을 찍었기에 사진 속에는 무릎 아래 부위가 작가를 대신해서 주체화되어있다. 작가의 신체 일부가 풍경과 관여하고 있는 모종의 상황이 연출된, 일종의 자화상이다. 대부분 얼굴이 부재하고 표정은 사라지고 몸의 일부만이 겨우 드러난다. 마치 벼랑 끝에 서 있거나 자살하기위해 마지막으로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 따라서 이 사진은 보는 이들을 어떤 경계, 모서리로 내몬다. 은연중 불안하고 공포스러운 느낌이 드는 것이다. 화려하고 멋진 도시의 장관이 갑자기 어지럼증을 동반하고 두렵고 불길하게 발 아래, 시선 밑으로 펼쳐진다. 고소공포증을 동반하는 이 풏경은 다소 ‘언캐니’하다. 벼랑 같은 건물 옥상에서 발아래 펼쳐진 까마득한 땅의 풍경을 보여주는 안진의 사진은 현실 속에서 불현듯 마주치는 죽음에의 충동일 수도 있고 환상적인 도시풍경과 현실적으로는 가닿을 수 없는, 너무 먼 그래서 결국 육체의 죽음을 요구하는 어떤 순간을 대면시킨다. 그것은 현실과 환상,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기이하고 날 선 경계의 풍경이다. 그런가하면 아마도 과감히 생을 끊기 위해 서 있는 이들이 마지막으로 보는 풍경일 것이다. 최후로 보고 갈 풍경말이다. 이미 죽은 자들만이 보고 느꼈을 그 풍경을 새삼 산 자들의 시선에 안긴다. 산 자들을 죽은 자의 자리의 뒤늦게 서게 하거나 너무 이른 죽음의 자리를 현실의 시간대로 잡아당겨주는 것이다.

건물 안에서, 창밖을 통해 조망되는 도시의 풍경은 더없이 환상적이고 아름답지만 정작 그 풍경에 가닿을 수는 없다. 도시는 언제나 먼 거리 속에서, 이미지로만 화려하다. 그 풍경을 잡으려 문을 열고 나가는 순간 도시는 저 아래 펼쳐지고 그곳에 도달하려면 중력의 법칙에서 자유롭지 못한 인간의 몸은 죽음을 치뤄야 한다. 이때 현실적 풍경이 순간 허구로 태어난다. 그것은 찰나의 일어남이다. 결국 내 앞은 ‘텅 빈 허공이고 환상’이라는 얘기다.
작가의 몸과 저 도시 사이에는 허공이 있다. 이 공간은 무엇일까? 수시로 우리는 이 허공을 망각한다. 허공 저편에 신기루 같은 도시가 펼쳐진다. 그곳에 가기위해서는 이 허공을 거쳐야 한다. 그러나 그 허공을 가로질러 갈 수는 없다. 그 허공에 발을 딛는 순간 죽음이 덮칠 것이다. 따라서 그 허공은 저 신기루 같은 도시/환상을 보여주고 인식하기 위해서 불가피한 공간이다. 그것은 단지 무가 아니라 없으면서 있는 이상한 공간이다. 작가는 “허공은 누군가를 위해 남겨둔 여백이 아니라 현실에 찌든 우리들이 이상과 환상으로 빽빽하게 채우는 공간”이라고 말한다. 따라서 건물의 옥상이나 모서리에 서서 혹은 앉아서 아래를 내려다보는 작가의 시선, 몸은 경계에 걸쳐 있는 것이 된다. 갈 수 없는 환상/이미지에 바짝 근접해서 육박해보지만 저 환상은 결코 도달할 수 없는 거리와 공간속에서 자리한다. 경계에 처한 인간의 몸은 한없이 유약하지만 동시에 환희와 두려움, 긴장감으로 떤다. 작가는 “정신은 그 경계 너머를 간절히 원하지만 두려운 육체는 현실을 붙잡는다.”(작가노트) 라고 적는다.

안진은 그 현실과 환상 사이에 걸쳐있는 자신의 몸의 일부를 보여준다. 자신의 몸으로 그 상황을 연기한다. 작가의 발 아래로는 거대한 심연이고 도달하기 어려운 깊이로 가라앉아있는 도시가 깔려있다. 납작한 사진에 발생한 이 심도는 심리적 시선을 빨아들인다. 그것은 낭만적이면서도 무서운 장면이다. 작가의 발 아래로 펼쳐진 것은 대부분 고층의 빌딩과 도시의 랜드마크다. 작가가 위에서 포착한 건물들 사진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건물을 바라보는 방식과는 무척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다. 그로인해 건물은 일반적인 건물에 대해 인식하는 물리적인 구조와는 판이하게 다가오고 그로인해 건물 본래의 기능에서 벗어난 하나의 오브제가 되고 있다. 아울러 도시 전체를 한 눈에 수렴시키면서 그 스펙터클한 장관을 더욱 환상적으로 보여준다. 도시의 고층빌딩은 자본주의가 약속하는 현실을 환상적으로 자극하기 위해 디자인된 곳이다. 화려한 도시풍경은 결국 시각적 허상이다. 대중들에게 균형과 질서의 시각적 쾌락을 안겨준 대중적 장식의 스펙터클이 도시의 구성인데 이 도시장식은 자본주의적 경제체제가 열망하는 합리성의 미적 반영물이다. 시장의 화폐가 교환의 정량적 가치로 사물들의 세계를 동질화했듯이 건축가적 투시도적 시선 역시 기하학의 원리로 도시 공간을 물질화하였다. 무엇보다도 오늘날 도시 건축은 자본주의를 유지 및 촉진시키기 위해 끊임없이 건설되거나 파괴되는 순환반복의 구조 속에 편입되어 있으며 판타지적 꿈을 확장시키고 있다. 그래서 고층 건물들은 ‘자본주의 문화의 팔루스(phallus)’로서 존재한다고 지적된다. 이 팔루스는 제도와 권력을 상징하기도 혹은 우리 무의식 속의 욕망이 지향하는 ‘어떤’ 보이지 않는 권력 혹은 존재를 의미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결국 도시 건물은 하나의 상징적인 권력체가 되는 것이다. 작가는 그 고층빌딩의 꼭대기에 자기 몸을 올려놓았다. 마치 공중에 부양된 듯한 몸, 발을 보여준다. 그것은 실제이면서 동시에 무척 허구적으로 다가온다. 사진은 그런 허구와 현실을 뒤섞는 매력적인 매체가 된다. 작가는“세상이란 아득한 환상과 현실이 끊임없이 부딪치고 교차하는 곳”이라고 말하면서 바로 그런 그것을 포착하고 보여주기 위해서는 사진이야말로 적합하다고 생각하는데 그 이유는 사진이“환상을 온전히 현실로 가져올 수 있는 가장 적절한 매체”이기 때문이다. 결국 안진의 사진은 현실과 허구, 실제와 환상이라는 경계에서 사는 우리들의 생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그녀의 몸과 시선 역시 그 경계에서 위태롭고 불안하게 버티고 있는 것이다. 찰나의 긴장감을 칼날처럼 벼리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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