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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명희 / 내면을 비추는 새와 꽃

박영택

선인들은 화조이미지를 빌어 음양의 조화, 사랑과 행복을 찬미했다. 나뭇가지에 앉은 한 쌍의 새와 활짝 핀 매화나 도화는 지상에서 본 이상형이자 지극한 열락이 구현된 풍경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산수화가 상징하는 유토피아와 동일한 맥락에서 화조화도 그려진 셈이다. 민화에서 엿보는 화조화는 부부금슬과 부귀영화를 의미하는데 이처럼 인간적인 생의 욕망과 간절한 희구가 그림 속에 오롯이 스며들어 있는 것이 우리네 전통회화다. 그런데 그런 삶의 욕망에 대한 진솔한 이미지화는 역설적으로 현실계에서 그 욕망이 실현되기 어렵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유한하고 남루한 생에서 사람들은 저마다 오래살고 변치 않는 사랑을 꿈꾸고 늘상 부귀영화를 누리며 행복하고자 다짐했던 것이다. 어쩌면 현실에서 이루지 못한, 이루기 어려운 그 욕망을 이미지의 힘을 빌어 눈앞에 구현하고 소원하게 되었을 것이다. 또한 덧없고 슬픈 생을 이미지의 화려함으로 치장하는 한편 궁극적으로는 지상에서의 삶이 안겨주는 연민과 상처를 치유하려 했을 것이다. 따라서 산수화나 화조화는 일종의 주술적인 이미지이자 기복신앙적인 도상에 해당한다. 아니 우리네 전통미술이라고 불리는 모든 것이 그로부터 자유로운 것은 거의 없다. 순수한 장식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전통미술에서의 장식은 공간을 무의미하게 채워나가는 선과 색채의 증식이 아니라 무수한 의미와 상징을 지닌 서사들이 촘촘히 박혀있는 언어이자 텍스트이다. 그러나 근대 이후 미술은 이제 그런 도상과 주술성에서 풀려나 순수한 미나 장식, 관념으로 몸을 바꾸었다. 현대미술이라 불리는 것들이 그런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그러나 여전히 미술은 한 개인이 꿈꾸는 유토피아나 인간적인 생의 욕망을 투영하고 반사한다. 그로부터 무관하기가 어려운 것이다. 결국 미술은 한 인간이 겪어내는 삶에 대한 하나의 반응이자 그에 대한 진술의 성격을 지닌다. 오명희의 그림도 그런 맥락에서 자리하고 있다는 생각이다.

오명희는 캔버스에 유채로 나뭇가지와 새, 꽃을 그렸다. 이른바 화조화인 셈이다. 무한한 자연을 암시하듯 단일한 색채로 마감된 배경과 현실풍경이 사진으로 프린트되어 자리한 화면이 공존한다. 색채추상처럼 단색으로 도포된 화면과 구체적인 정보를 전달하는 사진이미지가 올려진 화면이다. 그 위에 한결같이 나무와 새, 꽃의 형상이 눈이나 비가 내리듯이 가득하다. 새는 매우 정치하게 묘사했고 꽃의 형상은 얇은 자개를 오려 부착했다. 자개의 모양은 저마다 조금씩 다르고 약간의 채색을 얹혀서 변화를 주었다. 꽃의 아름다움과 매혹을 자개라는 재료의 물성으로 극대화하고 있다.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빛이 수렴된다. 이 얇은 자개의 피부는 캔버스의 표면위에 약간의 높이를 부여하면서 촉각적으로 굳어있어서 그려진 이미지와 조화를 이루면서도 하나의 물질로 자존한다. 이미지와 물질, 수공의 그림과 인공의 재료, 묘사와 빛, 회화와 조각, 사진 등이 서로 얽혀있다. 자개의 물성은 배경을 조금은 뒤로 하고 앞으로 돌출하면서 화면을 이중적인 구조로 만드는 편이다. 특히 옛건물이나 작가의 일상에서 취한 흑백의 풍경사진위에 부착된 자개/꽃은 아득하게 사라지는 빛바랜 지난 시간을 아련하게 추억하게 하는 심리적, 정신적 거리를 부여한다. 더욱이 조명을 받으면 빛을 발산하는 자개는 그려진 그림과 슬그머니 분리되면서 앞으로 더욱 나아간다. 그 자개 꽃은 발처럼 걸려서 후경과 나뉘고 바탕색을 등지며 돌출한다. 그로인해 꽃의 존재감이 무척 강렬하게 부감되는 것이다. 아울러 작은 꽃들의 이 무한한 양은 화면을 전체적으로 통어하면서 단일하고 평면적으로 이끌어간다. 그 모습은 꽃이 피었다기 보다는 무너지듯 내리거나 패턴처럼 가득 채우고 있다. 따라서 그림이 전체적으로 과잉된 이미지와 색채, 화려함으로 가득하다는 인상이다. 전통적인 채색화와는 재료가 다르지만 여전히 소재나 구성에 있어서는 매우 유사한 느낌을 주는 한편 조선시대 민화, 자개장, 그리고 일본미술에서 엿보는 장식성도 혼재되어 있다. 사실 이 작업은 일정한 시간의 경과와 그로인해 겪는 퇴락과 마모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엔틱’에서 풍기는 것과 동질의 격과 잔해에서 전이되는 미감이 묻어 있을 것이고 따라서 분명 우리네 조상들이 쓰던 오래된 자개장의 표면을 닮아있을 것이다.

작가의 이전 작업을 떠올려보면 꽃밭이나 들판 위로 항상 스카프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어디론가 부유하고 비상하는 그 가벼운 존재에서 연상되는 휘발성 강한 영혼이나 고독한 자아, 또는 무척이나 호젓하고 낭만적인 정서가 배어있는 그림이었는데 근작에서는 그 스카프 대신에 온갖 꽃이 가득 피어 있는 곳에 작가의 또 다른 분신으로 새가 나앉아있다는 생각이다. 잠시 가벼운 몸을 나뭇가지에 의탁해 지저귀다가 ‘포로롱’ 하고 느닷없이 날아가 버리는 새의 모습이나 이내 져서 떨어지는 꽃의 자태는 사실 무척 유사하다. 그래서 이 그림 역시 더없이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그 이면에는 어딘지 쓸쓸하고 덧없는 비애감 같은 것이 스며들어있다. 꽃이나 새는 일시적이고 찰나적인 존재들이다. 봄날, 그토록 화려하게 핀 꽃들은 며칠이 지나면 이내 저버리고 새 역시 나뭇가지에 잠시 앉아있다 순식간에 날아가 버린다. 사람들은 그 모습에서 유한한 목숨과 덧없는 생과 모든 것이 무로 돌아가 버리는 극단적인 허무감을 보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저 화려함 속에 잠긴 것은 정작 고독과 쓸쓸함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따라서 오명희의 근작은 마치 하이쿠의 한 대목처럼 더없이 ‘아쌀’하고 그지없이 함축적인 장면으로 유한하고 찰나적인 생에서 접하는, 짧지만 더없이 강렬한 생명체의 환희와 화려함을 순간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문득 자신의 내면을 물끄러미 마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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