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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영숙 / 밥 속에서 피어나는 꽃

박영택

삶은 결국 먹고 사는 일이다. 우리는 따뜻한 밥 한 그릇에서 생을 만나고 다음 생으로 이어지는 길고 긴 길을 본다. 한자 기(氣)는 따뜻한 밥에서 나는 모락거리는 김을 상형한 문자라고 한다. 옛사람들에게 생명을 가능하게 하며 저마다의 정기를 보존 하게 하는 핵심적 존재로 거론되는 기는 결국 밥이기도 하다는 얘기다. 삶을 삶이게 하며 생명의 근원적 자리가 다름 아닌 한 그릇 밥인 것이다. 기’ 란 결국 그렇게 구체적인 밥에서 나온다고 여겼던 것 같다. 그래서 인지 우리는 흔히 “밥 힘으로 산다”는 말을 자주 한다. 또한 어른들은 자주 말씀하신다. 밥이 최고의 보약이라고, 그러니 매끼 한 그릇 잘 먹고 다녀야 한다고 말이다. 그래서일까 우리네 아침 인사가 “진지잡수셨어요?”였고 매번 “식사는 하셨어요?”라고 묻는다.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의 인사말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농경사회에서 밥이 중요했고 그 밥을 먹는 일이 또 그만큼 절실했음을 방증한다.
19세기 이 땅에 들어온 프랑스 선교사들이 당시 조선의 풍습을 보고 놀란 점이 한 두 가지 아니었는데 그중에 하나가 바로 밥 먹는 장면이었다고 한다. 그들이 남긴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들은 엄청난 대식가들이다. 커다란 그릇에 봉분처럼 솟아 오른 밥을 보고 무척이나 놀랐었다고 한다. 따뜻한 쌀밥 한 그릇 푸짐하게 먹는 하루가 사는 일이었고 그 기운으로 힘든 농사일을 마다하지 않았었던 조상들이다. 그러나 그 쌀밥 한 그릇 먹는 일도 무척이나 요원해서 대개는 보리밥으로, 잡곡밥으로 대체하는가 하면 굶주림도 다반사였을 것이다. 식량을 자급하기 시작한 것도 따지고 보면 근자의 일이다. 70년대만 해도 혼.분식 장려와 함께 쌀의 증산에 대한 치열한 노력들이 있어왔다. 그러나 지금은 쌀이 남아돌고 이제 쌀밥보다도 다른 음식이 한국인의 식생활을 바꿔놓고 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밥 힘으로 살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인에게 쌀과 밥이 지워지리라고 보지는 않는다. 아니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한국인인 이상 여전히 김이 모락거리는 따뜻한 쌀밥과 김치, 된장찌개를 먹을 것이며 그 힘으로 에너지를 얻어 생을 영위할 것이다.

임영숙은 밥을 그린다. 아니 밥에 핀 꽃, 생명을 그린다. 밥과 꽃은 하나로 얽혀있고 둘은 분리되지 않는다. 밥 먹는 일이 사는 일이고 생명을 피워내는 일이자 희망을 보듬는 일이다. 마치 밥이 꽃을 피워내고 있거나 꽃들이 밥을 대지 삼아 뿌리를 내리는 기세다. 작가는 어느 날 커다란 밥, 밥그릇을 그렸다. 누군가에게 밥을, 생명을 헌사하고자 했다. 자잘한 밥알을 한 알 한 알 세어가면서 그 많은 밥알들을 그렸다. 누군가의 얼굴을 떠올리고 생을 추억하고 죽음을 상기하면서 말이다. 마치 쌀농사를 짓는 것처럼 수많은 손길을 더해 그린 것이다. 하얀 밥그릇은 백자사발처럼 눈부시게 빛난다. 그 백설 같은 그릇위로 봉분처럼 소복하게 부풀어 오른 쌀밥이 담겨있다. 이전에는 그 밥 위에 팥이나 콩을 얹혀 그리기도 하고 혹은 이런 저런 것들을 올려놓았는데 근작에는 커다란 꽃이 터질듯이 피어있고 더러 집과 새, 나비들이 올라와있다. 우리네 조상들은 신에게 치성을 드리거나 간절한 기원을 할 때, 또는 죽은 이를 기릴 때 뜨거운 밥 한 그릇을 바쳤다. 간절하고 절박한 마음으로 밥 한 그릇을 지어 바친 것이다. 그 밥은 한 인간이 다른 생명에게 보내는 지극한 마음이자 정성이고 희생이다. 한국인에게 사랑을 대신하는 말은 밥 먹었냐라는 물음인 것이다.
작가는 누군가를 떠올리며 밥을 그렸다. 그리고 꽃을 피웠다. 밥과 꽃을 선물로 준 것이다. 더불어 매일 같이 식구들을 위해 밥을 하면서 새삼 식구에 대해 생각해보았다고 한다. 식구란 함께 밥 먹는 사람을 일컫는다. 함께 식사하는 공동체가 가족이다. 함께 식사한다는 것은 목숨을 공유한다는 말이다. 가족 구성원은 매일 일정한 시간에 밥상에 모여 다음 생을 기약하고 도모한다. 김이 모락거리는 흰 쌀밥을 목구멍에 밀어 넣으면서 가족들이 오늘도 배고프지 않고 무사히 살아있음을 확인하고 앞으로도 변함없이 함께 살고자 결의한다. 옛사람들이 가장 듣기 좋은 소리는 새끼 목구멍에 밥 들어가는 소리였다고 한다. 자식들의 목에 밥을 밀어 넣어주는 이가 부모다. 가족들은 그렇게 매일 끼니를 같이 하며 생을 꾸려간다. 한 끼에서 다음 한 끼가 고비인 그런 삶을 헤쳐 나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밥 한 그릇을 먹을 때마다 그렇게 가슴 속에 보다 나은 삶의 희망과 희망을 키워나갈 것이다. 분명 그 밥으로 보다 나은 삶을 희구할 것이다. 그러니까 식탁은 사뭇 비장한 결의가 이루어지는 공간인 셈이다. 밥을 먹어야 다음 생이 보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한 그릇 밥은 우리 앞에 내일을 여는 길이고 한 생이 다음 생으로 이전되는 통로이다. 그래서일까 작가의 밥 그림에는 집이 있고 길이 있고 바글거리는 생이 있다.

그림을 보니 커다란 그릇에 담긴 쌀밥이 풍경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밥을 절대적인 그 무엇으로 만들었다. 기념비적인 밥이자 오로지 밥이다. 장지에 동양화 채색물감과 먹으로 그려진 그림이고 오랜 시간 공들여 그린 그림이다. 정교한 채색화가 보여주는 깊이 있는 색감과 정치한 묘사 아래 민화적 전통의 자취가 어른거린다.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커다란 목단과 음양의 조화를 뜻하는 한 쌍의 새처럼 민화에서 그려지던 도상들도 개입시킨 것이다. 그 밥과 연관될 만한 다양한 곡류나 식물이미지도 더러 함께 그려 넣었다. 밥과 함께 그토록 간절했던 인간적 소망의 대상들이다. 문득 그 부푼 밥의 모습이 흡사 봉분 같아 보인다. 무덤의 모습이 밥과 함께 겹쳐지는 순간 삶과 죽음이 결국 하나임을 생각해본다. 밥 한 그릇 먹는 일에 생사가 달렸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에너지란 결국 이 밥에 있다. 작가는 자잘한 밥알을 하나씩 세어가면서 그렸는데 그 밥알 하나하나를 목구멍으로 밀어 넣으며 사는 인간의 삶, 목숨이 무엇일까를 새삼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무엇보다도 근작에서는 활짝 핀 꽃들이 얼굴처럼 다가온다. 그것은 식물성의 존재감에 그치지 않고 목숨 있는 모든 존재의 육체로 환하게 부풀어 오른다. 식물의 성기인 꽃이 이토록 화려하고 탐스럽게 피어나 뒤척인다. 밥 속에서 자라나는 저 커다란 꽃, 생명이 사뭇 감동스러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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