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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원선 / 자연과 흰색의 조화

박영택

백원선의 작업은 옥양목 천에 먹을 삼투시켜 어둡고 깊은 배경을 만들고 그 위에 움직이는 인간의 형태나 동물의 형상을 멈춰 놓았다. 번지고 퍼져나가는 먹/물의 흐름에 순간 정지된 생명체의 활력이 공존하는 풍경이다. 그리고는 한지, 순지 혹은 물에 불려서 펴낸 얇은 닥나무 껍질을 화면위에 콜라주했다. 얇은 명주 같은 순지를 겹겹이 바르고 바탕을 덮어나가면서 화면을 부분적으로 가리고/ 보여준다. 마치 그려진 이미지에 옷을 입히거나 천으로 베일링 한 듯하다. 이 천, 종이의 개입은 평면의 화면을 부조적, 촉각적으로 감싸면서 또 다른 차원으로 몰고 간다. 그것이 묘한 깊이감이나 은은한 비침의 미학을 자아낸다. 마치 창호문으로 스미는 아련한 빛을 감촉하게 하거나 얼핏 드러나는 속살을 고혹적으로 감싸는 한복의 옷감을 연상시킨다. 그러한 연상을 자아내는 이런 장치가 한국의 전통복식이나 건축물, 백자와 한지 등의 재질과 물성, 색채감각에서 연유하는 것임을 작가는 숨기지 않는다.

백원선의 작업은 그리기와 함께 만들고 오리고 붙이는 일련의 수작업으로 형성된다. 그리기와 만들기, 모필의 체험과 수작업이 공존하고 검은 먹색과 하얀 색의 종이, 닥나무껍질이 조응한다. 검은 색상과 흰 색상의 섬세한 차이가 노정되고 다양한 상황이 펼쳐진다. 단순하고 절제되어있으면서도 그 안에 풍성한 편차를 대비시켜놓았다. 평면 안으로 들어가 깊이를 만든 표면위로 정제되지 않고 보풀처럼 일어나고 다소 거칠게 부풀어 달라붙은 순지, 닥나무껍질이 그 표면을 뒤로 하고 또 다른 차원으로 나아간다. 그로인해 화면은 몇 겹의 깊이를 지닌 공간이 되었다. 이 심층적인 화면은 보는 이들을 정서적으로 감싸준다. 천 사이로 스며들어 이룬 먹의 자취는 고스란히 자연법칙에 순응한 결과이고 그 위로 붙여진 닥나무껍질, 순지 역시 자연물에서 취한 소재들이다. 자연에서 취한 재료들이 자연스럽게 모여 자연에서 접하는 순박한 미감을 자아낸다.

작가는 자신의 작업이 우리 복식과 자수에서 비롯되었다고 말한다. 작가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타원의 곡선이나 7:3의 비례, 그리고 베틀의 좁은 폭을 잘 응용하야 옷감을 잇대어 만든 흔적을 연결선으로 살리거나 천의 물성과 재질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한편 구획된 면구성이 절묘하며 투명한 비침이 은은한 모시 속적삼을 연상시키는 화면 등이 모두 한복의 디자인, 재단, 봉제법에서 연유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한복에서 접하는 가림과 노출의 조화를 작업으로 끌어들이고 자연스러운 선과 색채를 또한 응용하고자 한다. 이때 한복과 긴밀하게 만나는 것이 바로 한지의 백색이고 물성이다. 작가는 한지의 자연색에 매료되었고 특히 재료마다 조금씩 다른 색상의 미묘한 차이에 주목한다. 작업에는 한지와 명주, 닥나무껍질을 조심스레 펴서 그려진 화면위에 붙인다. 완벽하게 감싸지 않고 종이의 단면의 자연스럽게 형성된 절단면을 그대로 살리면서 바탕을 얼핏얼핏 보여준다. 그것이 그대로 투명하게 비치는 창호문이나 흰색의 한복을 연상시키는 것이다. 한국현대미술에서 이 한지와 백색을 한국미술의 전통으로 삼아 구현한 사례는 헤아릴 수 없다. 전통의 물신주의나 소재로 국한된 정체성 논의로 제한된 측면도 있지만 여전히 많은 작가들은 그 재료와 색상이 주는 자연스러운 미감에 매료되어 있다. 백원선 역시 한지와 백색에서 아름다움을 추출하고 그것을 활용해 ‘한국적인 그림’을 만들고자 한다. 한국적 또는 전통적인 것은 사실 부재하다. 그것은 현재가 과거에 씌운 프레임이다. 실체가 없는 것에 과도한 의미가 부여되는 것은 위험하다. 그러나 현재에 이르기까지 이 땅에서 살아온 이들이 그 오랜 세월동안 형성한 삶의 지혜와 미의식, 문화는 허상만은 아닐 것이다.

백원선은 흰색과 한지를 사용해서 작업을 한다. 말, 닭, 개 등의 동물 형상이 한가하게 거닐고 있거나 춤추는 사람들의 힘찬 동세가 어른거린다. 그려진 흔적 위로 또 다른 실루엣이 얹혀지고 다시 닥나무껍질이나 한지가 부착되어 있다. 모두 흰색을 지닌 물질이다. 여기서 흰색은 색이 없는 무색이 아니라 자연의 바탕색인 소색을 말한다. 소색(素色)이란 옥양목이나 비단, 광목의 색처럼 재질에 따라 다양한 뉘앙스의 색감을 드러내는 자연의 바탕색을 지칭한다. 그러니까 닥나무 껍질로 만든 흰색의 종이처럼, 염색 따위의 가공을 하지 않고 바탕색을 살려서 이룬 것을 말한다. 우리만의 이 소색의 아름다움은 무명이나 모시로부터 창과 문에 바른 한지, 벽에 바른 흰석회, 백자항아리 등에서 빛을 발한다. 소색인 백색은 빛을 흡수하는 듯한 은은한 빛깔로 자욱하다. 다분히 격이 있고 깊이가 있다. 한지의 색, 모시나 삼베, 옥양목이나 광목 같은 옷감의 색, 백자의 색을 단지 백색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 미묘한 뉘앙스를 지닌 기이한 백색들이다. 그리고 그 색들은 내부로부터 빛을 내고 생기의 미감을 발산한다. 아마도 백원선은 그런 색, 빛을 만들고 싶어할 것이다. 그래서 그토록 백색과 한지에 매혹되어 그 재료들을 하염없이 매만지고 다듬고 뜯어 붙이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재료의 구사와 활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모여 어떻게 시각적으로 놀라운 회화를 만들어내느냐가 더욱 중요한 문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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