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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민욱 / 경계에 위치한 뱀과 개의 풍경

박영택

개와 뱀이 여러 생명체와 얽혀있는 ‘그로테스크’한 풍경이다. 비단에 배채기법으로 정교하게 묘사한 채색화다. 사실적인 그림이면서도 어딘지 환상적이고 초현실적이기도 하다. 환상성을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관자의 불안감 혹은 머뭇거림에 있다. 즉 작품에 재현된 사건, 상황이 자연적인 것인지 초자연적인 것인지 판단 내리길 주저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 그림은 구체적인 대상을 무척이나 낯설고 당혹스러운 상황을 안긴다. 한 몸에서 여러 개의 다른 머리가 붙어있고 서로가 서로에 맞물려있으면서 엉켜있다. 기형적이고 왜곡된 상이다. 그 사이로 풀과 꽃들이 드물게 피어난다. 이 풍경은 구체적인 자연계, 생태계의 한 장면을 연상시켜주지만 동시에 무척 이질적이며 이상한 풍경이다. 친숙하고 아는 대상이지만 불현듯 낯설고 기이하게 다가오는 것, 이른바 ‘언캐니’한 그림이다. 이 단어는 한편으로는 ’가정적인, 친숙한, 다정한, 쾌활한, 편안한, 친밀함‘을 의미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친숙하지 않은, 불편한, 낯선, 이질적인‘이라는 의미를 갖는다. 기이함의 의미는 바로 이 두 의미론적 층위의 결함에 의해 형성된다. 프로이트에 의하면“기이한 것은 현실 속에서의 전혀 새롭고 이질적인 것이 아니라, 마음속에 형성된 오래되고 친숙한 것이, 단지 억압과정을 통해 마음으로부터 소외되는 어떤 것이다. 그것은 무의식의 투사에 다름 아니다”

진민욱의 그림은 또한 기괴함, 그로테스크, 애브젝션(Abjection)의 요소도 묻어 있다. 이는 정체성, 제도, 질서와 같은 총체적. 균질적 개념에 대한 공격을 의미한다. 그것들은 무엇보다도 경계, 위상, 규칙을 존중하지 않고 대신 중간적인 것, 애매한 것, 혼합적인 것을 내세운 다는 점에서 전복적인 힘을 내재하고 있다고 한다. 사실 미술은 있을 수 있는 상황, 가능성을 다룬다는 점에서 애초에 환상이다. 그것은 불경스러운 욕망이기도 하다. 환상이란 미메시스로부터의 일탈이요, 나아가 리얼리즘으로부터의 일탈이다. 돌이켜보면 결국 예술은 유희적이자 현실 도피적 기능 및 기존질서를 파괴하는 기능 내지는 그것을 비판하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일견 황당해 보이지만 근본적으로 주어진 현실을 지속적으로 비판하고 틈과 사이를 벌리고 상처를 낸다. 이로써 기존하는 것은 균열을 일으키고 주어진 여건에 합당한 또 다른 대안이 생겨난다. 미술은 두 가지 충동의 산물일텐데 우선 모방하고 싶고, 사건들, 사람들, 상황, 그리고 대상을 묘사하고 싶은 욕망인 미메시스, 그리고 주어진 것을 바꾸고, 현실을 변형시키고 싶은 욕망인 환상이 있다. 환상의 기원은 실제 대상이 부재할 때 발생한다. 그것은 욕망의 환각적인 충족에 위치한다. 그러니까 가장 근본적인 환상은 욕망의 충족과 해소라는 최초의 경험과 관련된 대상을 환각적으로 회복하려고 할 때 문득 나타난다. 그러니까 환상의 세계는 실재와는 전혀 다른 정신적 세계가 아니라, 실재적이면서도 비 실재적이고, 현실적이면서도 상상적인 영역이라는 것이다. 있음과 없음이라는 이분법적 구도 속에서는 잡히지 않은 그런 세계다. 그래서 정신분석학적 시각에서 볼 때, 환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공상이나 망상이라기 보다는 현실과 상상 사이의 그 어디쯤에서 찾아야 한다. 결국 환상미술은 미술적 억압이 야기하는 결핍을 보상하려는 욕망의 미술이다. 어쩌면 환상미술의 상상적 세계는 ‘실재적인 것’과 ‘비 실재적인 것’사이에서 비결정적으로 자리 매김 된 ‘틈새공간’이자 ‘주체/반 주체’, ‘내적/외적’,‘과거/현재/미래’ 사이의 경계적 영토 혹은 사이공간이라고 말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실재적인 것’도 ‘비 실재적인 것’도 아니며 그 둘 사이 어딘가에 자리한다. 죽은 것도 살아있는 것도 아닌 유령처럼 환상미술은 실제적인 것을 취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깨뜨린다. 사실주의적 관습에 의존하여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면서도, 그 다음에 비 실재적인 것을 통해 이러한 사실적인 전제들을 부정하는 것이다.

진민욱의 그림 또한 비현실적인 상상/환상의 장면을 마치 현실적인 것 인냥 뒤섞어 놓은 것이다. 작가에게 있어 환상적인 화면을 구성하는 개나 뱀, 도마뱀, 곤충, 잎이 진 해당화 같은 것들은 일종의 상징들인 셈이다. 자연물을 빌어 자신의 내면을 대리하고 투사한다는 것은 동양미술에서 오랜 전통이었다. 사실 예술이란 인간을 둘러싼 저 자연계를 자신의 의식과 육체 안으로 부단히 불러들여 그와 하나가 되는 경지를 꿈꾸거나 그로부터 연원하는 소회 속에서 새삼 자기 존재의 근원을 성찰하는 것이다. 진민욱은 동물과 자연의 기이한 결합과 배치를 통해 “자신의 고립, 열등감, 자아분열 등의 체험을 극복하는 내적 성찰”을 치유하려고 한다고 말한다. 여기서 특별히 개와 뱀은 자신과 동일시되는 존재로 다가온다. 아울러 그것들은 타자들과 연루된 일상의 관계를 암시한다. 인생은 사건의 연속이다. 나는 나 아닌 것들과의 부단한 상호작용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나, 즉 자아는 결국 타자들과의 접촉과 만남으로 인해 생성되는 개념이다. 자기 아닌 것을 타자라고 할 때 타자들과 영향을 주고받는 관계를 ‘대타적’이라 하고 그러한 대타적인 관계를 통해 자기에게 형성된 것을 ‘대타성’이라고 한다. 결국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자신의 존재를 유지하는 것은 결국 자신(자성)과 대타성의 관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얘기다. 결국 나란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는 부재하고 그 자리에 자아/타자간의 지속적인 관계, 갈등이 있다. 전민욱에게 머리가 여러 개인 뱀과 개는 그런 복수적이고 혼재된 자아상을 암시한다.

생각해보면 개는 네 다리로 서있으면서 늘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혀를 내밀고 불안과 경계의 눈빛을 감추지 않는다. 나아가 작가에 의해 탄생한 다두견은 여러 개의 머리를 한 몸에 지닌 체 그 불안과 경계를 더욱 고조시키는 형국을 연출한다. 작가에 의하면 이 다두견, 다두사(머리가 여러 개인 뱀)는 ‘방향상실, 삶의 목적을 상실한 무기력증’도 표현한단다. 동시에 이 두 동물은 신화 속에서도 빈번하게 등장하는 의미 있는 상징체들이다. 작가는 특별히 이 두 존재를 선과 악, 죽음과 삶, 시간과 공간, 현실과 환상을 가로지르는 경계에 선 상징물로 이해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이 생명체는 그런 상징적 언어의 관계망 속에서 무수하게 재현되어 왔다. 전통적인 도상을 빌어 오늘날 자신의 일상에서 연유하는 감정을 발화하는 선에서 새롭게 재현, 배치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색채 구사 또한 고대 동양화에서 색채란 것이 그 상징적 도상과 마찬가지고 눈에 비친 색의 단순한 재현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상징성을 갖춘 것이기에 작가 역시도 일상에서 받은 영감을 최대한 시각화하려는 맥락에서 색채를 구사하고 있다. 희미하고 부드럽고 은은한 색채는 비현실적인 느낌을 자아낸다.
어쩌면 작가 자신의 삶과 의식은 이 세계가 규정하고 있는 완강한 현실적 틀과 그로부터 유유히 일탈하고자 하는 비현실적 세계(유토피아/디스토피아) 사이에서 부유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따라서 작가가 설정한 이 풍경, 상황은 그 두 세계의 경계에 위치한 자신의 내면 풍경이기도 한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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