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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의 미학 - 채색주의자들의 감각

박영택

 겹이란 넓고 얇은 물건이 포개진 것을 말한다. 또는 사물이 거듭된 상태를 말하기도 한다. 사전적으로 그렇다는 것이다. 최소한 겹이란 단수가 아닌 복수, 하나가 아닌 여럿의 개념이 깃들어 있는 단어다. 동시대 동양화작가들 몇몇이 모여 ‘겹의 미학’이란 타이틀을 내걸고 전시를 한다. 그것이 단체의 이름인지 혹은 이들이 지향하는 미술관을 대변하는지는 불분명하다. 그래도 이 이름 안에는 여러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듯하다. 우선 겹의 미학이라고 했으니 단일한 것이 아닌 여럿의 미학이란 뜻이기도 하겠다. 좀 단순히 말한다면 무수한 붓질, 그로인해 축적된 색 층이 자아내는 미감의 의미가 있는 것 같다. 그것은 결국 시간의 층이나 두께를 말한다. 오랜 시간의 결들이 자아내는 미감이란 무엇을 말하는 걸까? 삭히고 삭아진 것들, 바래고 바래진 것들, 축적되어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것들이 지닌 얼굴을 기억해본다. 아마도 그림을 그리는 이들이라면 그런 깊음에서 빚어져 나오는 것들에 대한 동경이 있을 것이다. 예술은 모종의 깊음을 갈망하는 일이다. 그러나 깊음은 납작하고 평평한 화면과는 상충되는 영역이다. 화면은 단면이기에 그것은 깊이를 갖지 않는다. 수평만이 있는 세계다. 그것은 수직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림은 수평에 수직을 세우고 깊이를 파고 무한히 횡단하는 일이다. 다시 말해 그림은 그 얇은 표면에 엄청난 깊이를 파는 일이고 날카로운 감각을 새기는 일이다. 평면은 분명 그림의 실존적 조건이자 제한된 공간이다. 그 평면에 감각의 줄을 긋는 일, 깊이를 만드는 일이 그림그리기다. 특히나 채색화 작업은 매우 얇은 종이의 피부에 무수한 시간을 집어넣어 두툼한 두께를 만든다. 시간은 물감과 모필을 통해 쌓이고 쌓인다. 보이지 않는 시간이란 현상이 물감과 모필의 흔적, 우연적인 손의 사건에 힘입어 가시적 존재로 표면에 나타난다. 그 피부위에 축적되고 머문다. 그 흔적을 통해 비로소 흐르는, 소멸되는 시간을 응고시킨 자취를 만난다. 아울러 채색화는 여러 번 반복하고 오랫동안 쌓인 색이 어떤 상태인가를 증거 하고 있다. 그것은 결코 일회성으로 완결되는 게 아니라 가능한 무수한 반복(노동, 경험)으로 인해서만 가능해지는 색의 세계를 안긴다. 표면을 뒤덮고 있는 얄팍한 표피층이 아니라 장지의 내부로 스며들어가 그것과 일체를 이룬 색의 상태는 언어를 무력화시키는 편이다. 그것을 어떤 색이라고 기술하기는 어렵다. 색은 심리적이기도 한데 따라서 그 깊고 삭고 어질한 색 층을 기존 색채를 지시하는 단어로 기술되기는 곤란하다. 다만 감각적으로 알아차릴 뿐이다. 그래서 색은 감각적인 회화에 관여한다. 윤곽을 지닌 확고한 외곽선에 의해 지탱되는 그림은 기하학이나 이성에 관여한다면 아울러 이미 선험적인 코드에 의해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라면 색은 감정과 감각을 우선하면서 세계를 몸으로 반응해 받아들이고 내뱉는다. 알다시피 예술은 감각의 구현이다. 그러니 예술가는 감각을 통해 사유한다.

 

 이들은 장지에 모필과 채색을 통해 회화를 만든다. 그것은 있는 세계를 재현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의 감각으로 세계를 세우는 일이다. 기존 동양화라는 코드를 부단히 벗어나거나 갱신하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이 결코 전통적인 동양화로부터의 탈피를 뜻하지는 않는다. 이들은 여전히 전통적인 재료에 충실하고 그로부터 빚어 나온 모필의 선 맛과 마냥 깊이 있는 색의 세계를 감각적으로 구현한다. 그러나 그것이 그려내는 것은, 감각으로 떠내는 것은 더 이상 전통적인 동양화의 소재에 저당 잡혀있는 게 아니라 자신들의 현실에서 취한 것들이다. 아울러 관습적인 동양화 작업의 상투적인 틀에서 벗어나려는 시도 및 동시대의 소비자본주의가 강제하는 상품미학에 따른 키치적 미감이나 장식성과는 거리를 두려는 것 같다. 개인적 삶에서 연유하는 풍경을 그리는 강석문, 임만혁, 이동환과 이구용, 하용주, 그리고 자연에 대한 감각적인 반응은 김선두, 백진숙, 장현주의 그림에서 엿보인다. 이길우는 전통과 현대와 같은 서로 다른 두 개념의 충돌을 선보인다. 공통적으로 이들은 모두 철저한 아날로그 언어로서의 회화를 지향한다. 여전히 자신들의 감각과 전통적 재료를 통해 장지의 표면에 깊이를 새긴다. 감각의 줄질을 한다. 그래서 장지위로는 감각의 묘선들, 혼잡한 감각들이 이룬 묘선들이 지나가고 얹힌다. 이들 손에 의한 그 같은 표시들은 무수한 시간의 두께를 지닌 색 층과 그 위로 지나가는 선들의 공존 속에 얽혀있다. 이들에게 세계는 빈틈이 전혀 없는 색덩어리요 색의 유기체다. 따라서 세계를 깊이 있게 그리려면 당연히 색으로부터 데생이 나와야 한다고 본다. 그런데 이 같은 생각은 이미 세잔이 했던 생각이다.

 

 채색주의자들은 색들이 이루는 가변적인 관계에 모든 것을 의존하는 화가를 말한다. 색들이 관계 속으로 들어가고 색들이 색상 관계를 이루는 것이다. 색들 사이의 이질성과 긴장감이 매번 변하는 팽창과 수축의 두 리듬을 낳으며 이 가변적인 관계에 그림의 모든 것이 의존하게 되는 것, 그것을 채색주의자들의 그림, 채색화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면 기존 동양화의 채색 작업을 다시 생각해보아야 한다. 지금처럼 채색화라는 것이 색을 많이 쓰거나 화려한 색상을 가득 품고 있는 식으로 제한되게 이해해서 꽃이나 단청, 화려한 복식 혹은 전통적인 기물의 표면을 장식한 채색을 공들여 그리는 차원 내지는 화려한 색상을 화면 가득 칠해놓은 물리적 상태를 채색화라고 일컫는 것은  곤란하다. 그것은 채색화가 아니고 다만 채색을 사용한 그림에 머문다. 우리가 진정으로 채색화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은 세계를 색으로 이해하고 반응하며 이미 익숙한 코드에 따라 선으로 제한하는 그림에 저항하고 색들이 자아내는 감각의 층과 관계를 고려해서 화면을 만드는 일이다. 그로인해 색으로 이루어진 그림은 보는 이의 눈에 촉각적으로 다가온다. 들뢰즈에 따르면 눈은 두 개의 기능을 갖는다. 즉 눈으로 보는 것을 뜻하는 ‘시각적 기능’과 눈으로 만지는 것을 뜻하는 ‘촉각적 기능’ 이 그것이다. 채색주의는 눈으로 만지는 기능을 부추킨다. 채색은 단지 윤곽선으로 이루어진 내부를 채우거나 장식하는 차원이 아니라 그 자체로 순수 상태의 회화적 사실을 구현해낸다. 내어야 한다. 망막에만 호소하는 것이 아니라 감각에 관여하고 아득한 시간의 깊이를 체득하고 경험하게 해주며 모든 언어와 문자가 망실된 자라에 색으로 이루어진 감각의 세계를 펼쳐놓으면서 그렇게 밖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이 세계와 존재를 감각으로 재현하는 것이다. 그것이 그림이다. 이 겹의 미학 구성원들이 공통적으로 사용하는 장지와 채색물감, 그리고 모필이 그렇게 얽히고 횡단하고 깊이를 파고 감각의 줄을 새기면서 이룬 그림들이 말하고자 하는 것도 그와 아주 무관하지는 않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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