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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길래 / 익숙하고도 낯설은 소나무

박영택

 충북 괴산에 위치한 작가의 작업실은 한적하고 깊은 시골이다. 아늑한 동네는 마냥 고요하고 더운 날씨에 메마른 나무와 풀들만이 가득하다. 그의 작업실 마당에도 나무들이 버티고 서있다. 금속성을 잘게 나눈 것들을 일일이 용접해 붙여 만든 유사나무다. 실제 나무를 재현하거나 모방한 것도 있지만 실은 나무의 형상과 인간의 형상이 뒤섞인 듯한 기이한 형태들이기도 하다. 나무인간이라고나 할까. 어쩌면 이길래는 나무와 인간을 결국 같은 존재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외형적으로는 상이해보이지만 본질적으로는 동일한 생명체인 것이다. 좀 더 나가면 이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생명체의 기본 구조는 결국 동일할 것이다. 그래서인지 이길래의 작업은 동일한 구조의 동銅을 이어 붙여서 소나무를 만들고 알 수 없는 형상을 제작한다. 반원형이나 짧은 직선의 꼴을 지닌 동은 일종의 세포이미지에 해당할 것이다. 그것들이 모이고 응집되어 생명체를 보여준다. 식물이고 나무들이다. 그것은 공간에 직립하기도 하고 벽에 붙어나가면서 회화처럼 자리한다. 공간과 벽에 동을 용접해서 그림을 그려나가고 있다는 느낌이다.

 

 그것은 조각적 충동이라기보다는 회화적 충동에 더 가깝다. 이길래의 조각은 조각의 기본적인 요소인 물성이나 질량, 공간을 채워나가는 구조의 문제를 기본으로 하지만 그것보다는  작은 물질의 단위들을 가지고 이를 하나씩 덧붙여-마치 연필소묘나 붓터치를 하듯이-그려나가는데 관심이 더 커 보인다. 물질을 채워나가거나 깎아내기보다는 선으로 이어나가고 있다. 덩어리를 다루기보다는 선을 만들고 있고 시간의 지속을 보여주면서 궁극적으로 표면에 주목시킨다. 그의 조각은 동으로 형성된 자연의 피부, 그 표면을 이루는 낱낱의 개별적 존재들을 응시하게 하고 그것들이 모이고 번지고 퍼져나가면서 이루어지는 생명체를 닮은 형상에 주의를 집중시키고자 한다. 동시에 그 조각은 보는 이의 시선을 투과시킨다. 물질의 내부를 관통시켜 형상 너머로 나가게 한다. 따라서 나무와 나무인간의 형상을 한 것들은 시선을 받으면서도 동시에 그 시선을 자기 내부로 흘려버려 그 너머의 것들과 조우시킨다. 공간과 부단히 통하고 바깥의 공기가 수시로 이 존재 속으로 파고들고 나가기를 거듭한다. 바람과 기운이 넘나든다. 기氣가 통한다. 생명이 가능하려면 이러한 기의 소통, 호흡이 요구될 것이다. 또한 내부가 이처럼 비어있는 조각은 자신의 존재를 한 눈, 한 시점에 투명하게 비춘다.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한 시선에 내주면서 그 전체의 모습과 그것을 이루는 단위들을 동시에 공존시킨다. 작은 단위(세포)와 그것이 이룬 전체가 동일시되는 것이다. 이 평등함은 부분이 전체를 위해서 희생되거나 소멸되는 것을 막는다. 그러니 이 조각은 부분과 전체가 동일하고 공평하다. 작고 작은 단위들이 없다면 커다란 나무는 불가능하다. 그 작은 단위들이 일정한 시간동안 자라야 그 다음 것이 가능하다는 얘기다. 그러한 자연과 생명체의 마땅한 순리가 결코 생략되거나 간과될 수 없다는 메시지다. 나는 그렇게 읽어본다. 

 

 그의 조각은 물리적 공간을 체적화 하는 기존 조각적 방법론보다는 실제 식물이 자라나고 생장하는 과정과 그 시간적 추이를 유사하게 닮아가는 형국이다. 아마도 작가는 자연계에서 생명체의 생장과 변화과정을 주밀하게 관찰하고 이를 조각적으로 응용해보고 있는 것이리라. 그것은 이곳 괴산으로 내려온 10여년의 세월로 인해 가능한 것이다. 그러니까 자연대상을 모방의 대상으로 삼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자연의 생리랄까, 생명법칙을 순응해나가는 과정이 그의 작업이라고 본다. 따라서 그의 조각 역시 자연계에 존재하는 무수한 생명체처럼, 나무처럼 시간의 추이에 따라 서서히 성장하고 번식되어 나간다. 작은 동 조각을 용접해 붙여나가는 그 지루하고 힘든 시간을 견뎌내는 과정이 그대로 식물의 생장주기와 유사하고 작은 단위(세포) 하나하나가 그토록 소중하게 다루어진다. 그렇게 작가는 엄청난 숫자의 동 파이프 단면들과 조각들을 연결해 소나무를 만들었고 기이한 생명체를 연상시키는 형상을 제작했다. 특히 소나무를 선택한 이유를 작가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한국을 대표하는 나무이자 우리 문화의 고고성뿐만 아니라 친근한 매력에 이르기까지 예술과 생활을 아우르는 대상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소나무를 좋아하고, 정신적으로는 사유의 대상이자 서민들에게는 놀이터의 역할까지 겸하는 매우 중층적인 상징의 고리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우리의 역사성도 깃들어 있고, 자유분방한 형태, 한 그루 나무에서 우러나오는 여러 색감, 세월의 풍화를 머금고 있는 듯한 표피 껍질 등등 많은 조형적 매력을 지니고 있다. ”(작가노트)

 

 장황 할 정도로 소나무는 많은 의미망을 열매처럼 매달고 있다. 한국인에게 소나무는 유별한 나무다. 생활주변에 흔하게 자리한 소나무와 함께 해온 생애가 한국인의 삶이다. 그가 이곳 시골로 내려오면서 유독 많은 소나무를 접했을 것이고 특히 소나무의 표면, 두껍고 거칠며 마구 일어나는 껍질은 조각가인 그의 창작충동을 건드려주었을 것이다. 그는 그 소나무를 입체로 재현했다. 아울러 동선을 연결해서 부조 작업도 했다. 벽에 걸리는 순간 그것은 그림처럼 자리한다. 꿈틀거리며 솟구친 나무줄기며 사방으로 활짝 펼쳐진 솔잎, 굵고 거친 소나무 껍질의 느낌을 잘게 자른 금속으로 이룬 선들이 재현하고 있다. 소박한 재현이지만 그려진 것이 아니라 작은 동 조각들이 모여 이룬 부조작업이라고 깨닫는 순간의 어떤 낯설음이 있다. 나로서는 이 부분에서 좀 더 강력한 형상, 상상력이 요구되었으면 한다.
실제 소나무를 닮은 이 의사소나무는 동이 지닌 색감과 물성에 힘입어 실감나게 다가온다. 강인하며 불멸하는 존재로 말이다. 어쩌면 이길래는 동 조각을 가지고 소나무를 만들어 특정 전시공간에 식수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살아있는 소나무에 비하진 못하지만 우리는 이길래가 만든 이 낯선 소나무를 통해 소나무란 존재에 대해, 식물성의 존재에 대해 새삼스런 인식의 시간을 가져볼 수도 있을 것이다. 나아가 그것으로부터 변형되어 다채로운 형상으로 번식해나가는 여러 이종과도 같은 또 다른 형상을 만나면서 소나무가 인간과 대등한 생명체임을 다소 불안하고 기이하게 깨닫게 될 지도 모르겠다. 무릇 생명을 지닌 존재의 구조와 생김새, 그것의 본원적인 욕망을 떠올려보게 한다. 나아가 이내 죽어 사라질 나란 존재를 넘어서서 까마득한 시간을 살아가는 저 소나무의 존재를 통해 소멸될 유한한 목숨들의 한낱 연극 같은 이 우스꽝스러운 삶을 비루하게 만드는 반성의 시간을 가져보게 하는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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