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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원의 사진 - 그림자의 자리

박영택

 사진은 실재가 아니라 흔적이다. 존재했던 것의 안타까운 뒤쫓음과 부질없는 상기와도 같은 자리이다. 그러니 모든 사진의 표면에는 이미 사라져 헛된 부재의 도래가 얼어있다. 그것은 이미 없어진 존재에 대한 향수와 일어났던 사건의 뒤늦은 목도에 따른 상실감, 비애 같은 정서의 세계를 호출한다. 그래서 사진은 조금은 감상적이고 노스탤지어이자 더러 신파다. 우리가 지난날을 추억할 때 자꾸만 감상적이 되는 이유도 그렇다. 그래서 사진은 일종의 ‘드라마’가 좀 강하게 드리워지는 편이다. 아마도 그것은 일회적인 삶을 사는 인간의 숙명일 것이다. 반복될 수 없는 찰나의 순간을 기적적으로 스쳐지나가며 사는 인생에서 목도하는 모든 것들은 다시는 지금 이 순간과 동일하게 경험될 수 없기에 그것을 아는 인간은 그 장면 하나하나가 비애적일 수밖에 없다.


 사진은 외부세계를 재현하지만 사실은 순간의 시간을 찍는 것이다. 그것은 거의 찰나의 시간을 고정시키는 시스템이다. 그러므로 순간의 이미지를 그대로 화상으로 기록해 버리는 사진은 인간의 경험과 표현의 세계와는 다른 차원에서의 객관성을 지니고 있다고 볼 수 있다.시간은 사진 속에 담겨지고 사진 속에서 시간은 재현될 수 있다. 사진은 시간을 분명하게 잘라낸 한 조각이라 사진을 찍는 다는 것은 변모해 가는 시간 속의 존재를 기록, 기억하는 일이다. 그래서 사진이란 모두 ‘죽어버린 순간’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사진은 허구화된 현재이며, 부재의 증거이기도 하다. 아울러 사진 속에서 잘려져 있는 시간의 한 부분은 결코 흐르지 않는다. 그것은 고정되어 있다. 영원한 침묵 속에 봉인되어 있다. 그 속에 우리가, 세계가 함께 공존해 있던 순간만이 기억되어 있으며, 모든 사물이 소멸되어도 사진에서는 그때의 현실이 불변한 채 남아있게 된다. 그러니까 시간과 공간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는 사진은 시간과 공간을 시각화시킨 하나의 또 다른 세계인 것이다.


 박상원은 자신이 마주한 일상의 풍경을 사진으로 담았다.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마주한 대상을 기억하고 저장했다. 사진의 힘은 기록이다. 오늘날 현대사진이 사진에 대한 존재론적 질문을 던지거나 개념으로만 치달아가는 한편 사진장르 자체를 문제시하고 타장르와 이종교배를 하거나 혹은 기존 사진에 달라붙은 고정관념을 불식시키는 여러 차원의 시도를 감행하고 있지만 박상원은 여전히 사진의 기록적 특성, 다큐멘터리의 힘을 간직하고 있다. 그의 사진 찍기는 일상의 동선에 따라 이루어지며 그 순간순간 사라지고 흘러가는 시간에 대한 저장과 매 순간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는 차원에서 시도되고 있다는 생각이다. 항상 카메라를 갖고 다니면서 기어이 보고야 만 것을, 그 시간에 있었던 사건을 기록했다. 그것은 풍경사진이 아니라 산책자의 시선, 노마드적으로 떠도는, 일회적 삶을 사는 인간의 눈에 들어온 이 덧없는 세계에 대한 연민의 시선으로 가득하다. 그가 주목한 사건은 허공을 나는 새, 거리에 길게 드리워진 인간의 그림자, 허공을 가르는 전선줄, 차창에 떨어진 벚꽃, 벽에 드리워진 나무그림자, 수면에 비치는 나무와 하늘, 물위에 어른거리는 새떼의 유영 등이다. 그 모두 어떤 사연들을 줄줄이 매달고 있어 보인다. ‘낭만적이고 아름답다’는 상투적 수사가 떠오른다. 나로서는 이 사진이 상당히 문학적이라고 생각했다. 그 문학성은 이야기를 담고 있다는 느낌에서 이다. 그는 풍경, 사건을 응시하면서 모종의 드라마를 떠올린다. 다양한 날씨와 기후, 시간대에 따른 광선과 그림자의 변화, 그 순간 매번 다르게 다가오는 대상들, 그로인해 떠오르는 단상들, 흘러 다니는 마음들을 수집한다. 사진은 그 수집의 일차적 행위다. 그는 대화중에 수시로 ‘배우의 시선’을 강조했다. 나는 이미지를 보면 문장이 떠오르는 이고 그는 연기를 상상하는 존재다. 하는 일에 따라 대상을 보는 안목이 이렇게 다르다. 그는 연기를 하는 배우의 입장에서 사물을 보고 그것에서 어떤 이야기를 상상하고 감정이입을 하듯 사진을 촬영했다. 마치 리허설을 하듯 말이다. 그러니 우리는 배우로서의 시선을 지닌 그가 세계를 어떻게 촬영하고 있는 가를 흥미롭게 만나볼 수 있다. 일반적인 사진작가들의 풍경사진과 크게 다르지는 않지만 주의해서 들여다보면 농도 짙은 서정성과 문학성(드라마)이랄까, 어떤 장면으로 인해 야기되는 감정의 파문이 비교적 크다. 배우란 연기를 통해 관자를 감정 이입시키는 존재다. 자기도취나 몰입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더 밀고 나아가 그것을 보는 이가 더 이상 관찰하는 이가 아니라, 시선의 거리감이 사라지면서 배우와 동일시되는 주술 같은 체험이 요구된다. 그래서일까 박상원의 사진은 감정의 유혹이 그만큼 크다. 사진 하나하나가 시와 수필, 아니 영화나 연극의 한 장면을 하나씩 거느리고 나오는 것만 같다. 그러니 그에게 사진 찍는 행위는 드라마 각본을 쓰거나 촬영장소 헌팅 또는 매순간 어느 특정한 공간에 있는 자신이 그 공간에서 무엇인가를 연기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편이다.


 사실 나는 ‘드라마’가 있는 사진은 꺼려한다. 대부분 그 드라마는 인습의 힘에 의해 작동하기에 그렇다. 일일드라마의 내용이 거의 획일적이듯이 일요사진작가나 아마추어 사진가들의 풍경사진도 역시 그렇다. 한결같이 아름답다고 믿고 있는 (그 확신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자연을 동일한 각도에서 똑같이 찍어내고 동일한 서정을 담고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시선과 감각의 힘이 아니라 학습된, 관습화된 것이다. 박상원의 사진은 익숙한 사진의 프레임을 지니고 있으면서 지금 이순간 자신이 접한 찰나적인 풍경에 대한 연민의 시선에서 어떤 차이를 만들어내고 있다. ‘픽쳐레스크’한 사진을 의도하기보다는 순간을 주목하고 이를 기록하면서 상상력을 필요로 하고 생각의 자리를 펼치는 사진이미지를 고려한다. 생각해보면 이 사진 속에 들어온 대상은 실재 대상은 아니다. 이미 그 대상은 사라지고 변화를 거듭해나갔을 것이다. 우리가 존재하고 있는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은 허공에 부유하다가 잠시 형상을 빌려 존재하고, 그러다가 이내 다시 미세한 먼지로 흩어지는 먼지에 불과하다. 영원히 고정된 것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사물 본래의 항구적인 모습이란 것도 가능하지 않다. 대상에 대한 재현을 통해 그 대상의 본질, 참모습을 구현하려는 시도는 그래서 모순이다. 이처럼 존재하는 모든 것들은 시간의 지배 속에서 변화를 거듭한다. 고정된 것은 없다. 따라서 시간은 재현의 체계화된 세계를 뒤흔드는 현기증이며, 원본이라는 우상을 파괴하는 엄청난 소용돌이다. 시간은 선험적으로 주어지는 실체가 아니다. 때문에 ‘순간’도 없고 ‘영원’도 없다. 있다면 부단한 ‘차이화’가, 즉 차이를 발생시키며 나아가는 시간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존재란 차이화의 산물인 동시에 시간의 산물이다. 정해진 자리가 없는 이른바 무위無位가 세계이고 공간이고 시간이자 사진이다. 그는 ‘그림자스러운 사진’이란 얘기를 했다. 그의 사진에도 유독 그림자가 많다. 그는 존재가 드리우는 허상인 그림자에 주목함으로서 자신의 시선이 결국 무를 응시하고 있음을 은연중 드러낸다.


 사진 찍는 행위는 자연이라는 존재들에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알다시피 사진이 현전시키는 대상 또한 대상 자체가 아니라 대상에 대한 ‘사진적 이미지’다. 작가의 관점에 의해 변형되지 않은 피사체는 존재하지 않으며, 사진이 예술일수 있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이 풍경 사진 역시 박상원의 시선으로 취택되고 절취된 자연이미지다. 그는 분명 섬세하고 아름다운 사진을 찍었다. 대상과 자신이 반응하는 감각들을 순간 응결시켰다. 사물은 의식이 자기를 비춰보는 거울이다. 사물은 의식을 비춰낼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질 때에만 비로소 사물일 수 있다. 그는 자신이 보고 있는 이 자연, 사물(대지, 구름, 바람, 나무, 벚꽃, 물, 그림자 등)에 영혼을 불어넣어 하나의 인격체로 격상시키고 있다. 그는 공간으로 이미지와 메시지를 만들 줄 아는 사진가이자 배우이다. 그래서 그의 사진들은 우리들을 다분히 명상과 사색의 장으로 끌고 간다. 따라서 사진은, 영상이미지는 하나의 매개이자 징검다리와 같다. 어쩌면 모든 이미지란 사실 그 같은 존재가 아닐까? 허구이면서 실재로 끝없이 나아가게 해주는 그 무엇으로서 말이다. 그의 사진 역시 그런 매개로 위치해있다. 그는 사진이미지와 배우의 역할을 통해 결국 같은 소리를 다른 입을 빌어 하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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