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웁스양의 랙이 걸린 이미지

박영택

웁쓰양의 그림은 이른바 재현주의 회화라고 볼 수 있다. 외형적으로 그렇다. 주어진 모델을 닮게 그리거나 특정 상황을 연출해 이를 사실적으로 묘사한다. 작가는 실제 한국 사회에서 일어난 갖가지 사건들(불행한 사건들)을 모티브로 삼아 그렸고 지인들을 모델로 사용해서 그렸는데 그들 역시 어딘지 불안하고 흔들리는 존재의 초상이다. 그 그림의 원본은 이미 이 세상에 있다. 사람들이 있고 그들이 저지른 사건들이 있고 상황설정이 무대처럼 전개되어 있으며 그것을 재현한 이미지, 사진도 있다. 아니 있어도 너무 많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살고 있는 작은 방 안에서도 이 세상의 모든 일들을 그 이미지를 통해 바라본다. 알고 있다. 따라서 세상, 현실은, 실은 없으면서도 과잉으로 있다는 기이한 역설이 자리한다. 이른바 대중매체를 통해 우리는 과잉된 현실의 이미지를 과도하게 주입받고 있다. 물론 그것은 의사현실이고 가짜이기도 하다. 허구이자 환영으로서의 현실이자 세계인 셈이다. 잘 실감나지 않는 세상이 영상을 통해, 사진이미지를 통해 다가오고 사라지기를 반복한다. 그러나 그것이 부재하다고, 없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실재감은 잘 감촉되지 않는다. 아니 어떤 것이 진실이고 사실인지 헷갈리는 것이다. 우리가 매일 신문이나 텔레비전에서 무수한 뉴스와 그곳에서 전하는 다양한 소식들을 접하면서도 기실 그것이 어디까지 진실인지 마냥 헷갈리기만 하다. 모든 뉴스는 허구이자 환영 같기도 하다. 그러나 그 속에서 엄청난 일들은 분명 벌어지고 누군가는 죽고 누군가는 거짓을 말하고 어떤 이는 악질이고 또 어떤 이는 선량해 보인다. 물론 정의가 무엇인지, 진실이 어떤 것인지 가늠하기는 무척 어렵다. 그래서 답답하고 불안하고 나아가 우울하기도 하다. 
하여간 이 세상일들이, 그 온갖 별별 일들은 실시간으로 다가온다. 신문과 텔레비전, 인터넷을 통해 받아들이는 현실은 한결같이 끔찍하고 추악하고 말도 안되는가 하면 슬프고 비극적이고 더러 지겹다. 왜 세상은 이 모양이고 이 꼬라지일까 하는 온갖 회환들이 밀려든다. 그래서 오늘날 뉴스를 보는 일은 무척 두려운 일이 되었다. 끔찍하고 괴이하고 도저히 이해가 안 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매일 온갖 일들을 접하며 산다. 뉴스 없이는 살 수가 없다. 대중매체에서 쏟아져 나오는 온갖 소리와 영상에 휩쓸려 지내며 매일 같이 상당한 강도의 사건들을 만나 충격에 빠지기를 거듭한다. 웁쓰양은 그렇게 접한 온갖 사건들에 주목했다. 본인이 직접 관심이 가는 사건을 취재하고 정보를 수집하고 그 사건의 주인공들의 입장에서 재구성해보기도 했다. 그렇다고 그녀가 탐정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자도 아니다. 호기심이 많은 화가일 따름이다. 그렇게 해서 대한민국에서 벌어진 여러 사건들 중 몇 개를 골라 그림으로 그렸다. 불공평한 사건이고 불행한 것에 관심을 갖는 차원에서 걸려든 것들이다. 그녀는 사소한 사건 속에서 사람들이 겪는 일, 이야기에 주목하고 이를 접수했다. 그렇게 이야기 구조가 있는 것을 그림으로 그렸다. 그렇다면 그 그림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일까? 

작가는 대부분 사람들을 그렸다. 인물화가 주를 이룬다. 특정인의 초상이 단독으로 설정되어 있거나 둘 혹은 여러 명의 사람들이 모종의 행위를 하고 있다는 느낌을 주는 그림이다. 얼핏 봐서는 텔레비전 뉴스나 신문에서 흔하게 접하는 사건을 촬영한 사진이미지를 재현하고 있다는 느낌이다. 어디선가 분명 접하고 보고 들었던 사건들이 연상된다. 자신의 마음을 짓누르는 불편한 뉴스를 접하면서 드는 여러 생각들로부터 그녀의 그림은 기원한다. 그녀는 말하기를 그 모든 사건을 이해해 보고 싶었다고 한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무엇이 어떻게 잘못된 걸까'(웁쓰양) 그녀가 주목한 사회적 사건은 엄마를 죽인 아들, 신생아를 버린 20대부모, 동급생을 성폭행한 10대, 노사문제의 부당함, 그리고 한국 사회에서 벌어지는 천태만상의 사건들이다. 작가는 순백의 착한 사람들이 어떤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을 벌였을까를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는 그것은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면서 그 모든 사건들을 이해하고 싶었다고 한다. 따라서 그녀가 특정 사건을 대중매체에 의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직접 취재해서 가능한 객관적 시각으로 그 사건을 본 후에 비로소 이해한 것을 그림으로 그려 넣고자 했다. 그러니 그녀의 그림은 이데올로기에 의해 현혹되거나 언론이 조작이나 왜곡, 억측 등에서 벗어나 가능한 진실을 가늠해보고 그 개별 존재들을 이해하면서 우리 사회에서 빚어지는 사건들, 상처들을 치유하고자 했다고 한다. ‘힐링’은 요즈음 화두가 되었다. 그만큼 상처가 많다는 증거다. 많은 사람들이 위안 받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힐링을 원하고 이를 요구하고 외친다. 그러나 현실적 모순의 본질을 건드리지 않고 이를 심리적 차원으로만 환원시키려는 얄팍한 전략이 또한 힐링이기도 하다. 어쨌든 웁쓰양은 저 끔찍하고 말되 않되는 온갖 사건들을 다시 정리하고 그리기를 통해 그들의 입장을 이해해보는 한편 우리에게 저 사건들이 배후에 주목시키려는 의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다. 다시말해 한결같이 행복하지 못한 상황들, 사건에 주목했고 또한 그러한 사건들을 다루는 이유는 그 각각의 ‘포지션’을 이해해 보고자 하는 바람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라 재현적 그림은 요구되었고 그 중간에 랙이 걸린 것처럼 사선을 그어 만든 장치가 요구되었던 것이다. 

그녀가 그린 그림들은 실제 사건의 사진이나 영상이미지를 차용한 것이 아니라 뉴스 텍스트만 읽고 그 사건을 상상해서 주변 지인들을 모델로 사건을 재구성한 것을 그린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실제 사건과 연관되기도 하지만 그와 무관하기도 하다. 실제이기도 하고 조금은 허구적이기도 하다. 그러나 그 사건, 인물들은 분명 실제 했던 것으로 부터 파생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집단 성폭행, 살인, 폭력, 정치적 사건 등을 비롯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갖가지 일들이 모티프가 되었다. 관념적으로 읽혔다 사라져버리고 마는 텍스트를 이미지로 전환해보려는 시도가 그녀의 작업이다. 하나의 장면으로 연출해 그린 후 그 어딘가에 우리가 흔히 ‘랙’걸렸다고 하는, 컴퓨터상의 오류로 인해 화면이 순간 멈추고 이미지에 사선이 그어지면서 흔들리는 듯한 상황을 얹혀놓았다. 그래서 그려진 그림을 보면서 마치 모니터나 텔레비전화면에 랙이 걸린 것을 보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지직’거리는 소음과 함께 동영상의 화면이 느닷없이 정지돼서 홀연 멈춰버린, 그 돌연한  적막감을 야기하는, 격렬한 외부의 폭력성 혹은 내부 시스템의 결정적 오류를 예감하게 하는 화면을 접했을 때의 묘한 긴장감이 화면을 덮고 있다. 물론 이것은 가짜이다. 실제 랙이 걸린 영상이미지가 아니라 정지된 캔버스 화면에 그려진 그림이다. 보통 랙이라고 불리는 컴퓨터 상의 오류들은 온라인 게임 중에도 심심치 않게 나타나는데 이를 버그 또는 에러라고 한다. 이런 현상은 그래픽 용량을 pc가 감당을 못해 벌어지는 것이라고 한다. 비율이 일그러지거나 앞뒤가 뒤 틀리거나 도트가 늘어지거나 또는 이전 상황이 그대로 붙어 다니거나 하는 다양한 형태로 글리치(glitch)가 일어나는 것을 말하는데 작가는 그 모습이 무척 우습게 보이기도 하고 애처롭게 보이기도 했다고 한다. 그 글리치기 보여주는 조형성이 웁스양에게는 기이하고 흥미롭게 보였던 것이다. 그런대 재미있는 것은 그 같은 그래픽 오류는 게임 이미지의 퀄리티가 좋아질수록 생길 확률이 높다고 한다. 정교한 이미지를 실행하기 위해 그 만큼 성능이 좋은 pc가 필요했기 때문에 그런 현상도 나오는 것이라는 얘기다. 정리하자면 렉은 컴퓨터 내부의 시스템의 결함으로 인한 것이고 그 오류는 에너지의 속도를 방해하거나 극단적으로 중지시킨다. 웁쓰양이 그리는 사건들은 이 사회라는 구조 안에서 벌어지는 오류들이다. 그것 또한 랙과도 같은 이치다. 그것이 인간의 탓인지 구조의 탓인지를 정확하게 말하기는 무척 어렵다. 하여간 웁쓰양은 사회구조 안에서 존재하는 인간에 주목한다. 인간은 사회 구조 안에서 에너지를 교환하고 전달한다. 그렇게 시스템속의 부품처럼 자리하다가 순간 오류를 일으키고 랙이 걸렸다. 그것이 사건들이다. 그렇게 그 둘은 연관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웁쓰양의 그림은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그 사건들을 다시 주목하게 하는 것일까 혹은 화면의 어느 부위에 느닷없이 랙이 걸린 듯한 표현을 통해 평범한 그림에 돌연 강조점을 부여하고 모종의 불안감을 조성하게 하려는 것일까? 그 끔찍하고 잔인한 사건들 또한 컴퓨터 내부의 시스템 에러로 인한 랙과 같은 오류에 의해 일어난 사건들임을 은유하고자 하는 것일까?    

웁쓰양이 캔버스에 유화물감으로 그린 이 그림은 전형적인 구상화다. 비교적 묘사력이 좋고 물감의 두툼한 살(질감)과 붓질의 맛이 감촉되는 그런 회화다. 그림그리기를 좋아하고 열심히 그림을 그리는데서 즐거움을 찾아가는 작가들의 손맛을 접한다. 그림은 우선 물질을 통해 무엇인가를 구체적으로 만들어가는 성형과 창조의 놀라움으로부터 기인한다. 텅 빈 캔버스에 물감이 붓질과 함께 올라가 붙어가면서 인지 가능한 형상을 환각적으로 안겨주는 것이다. 이미지는 일루젼이다. 그 환영은 언제나 놀라움과 신기함을 동반하면서 다가온다. 하긴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일루젼이다. 환영 아닌 삶이 없다. 좀 극단적으로 보자면 이 목숨도 이 세계도 오로지 환영이다. 그래서 인생은 비극이다. 온통 허구이고 허깨비뿐이니 말이다. 다만 그 비극과 환영의 제요소들을 아름다움으로 승화시키거나 이른바 해탈이랄까, 깨달음이랄까 하는 것을 획득하면서 견뎌내는 수밖에는 없을 것도 같다. 생각해보면 그 모든 것은 비극이나 환영과의 타협이자 절충이고 나아가 위안이다.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사회 현실 역시 무수한 환영에 의해 구성되어 있고 유지된다. 사람들은 그 환영에 속고 그러면서도 더 많은 환영을 욕망한다. 이미지에 속고 욕망에 속고 현실에 속는다. 아찔하고 치명적이며 위태롭기 그지없는 환영에 기대어 산다. 생각해보면 웁쓰양이 우리 사회에서 일어나는 다양한 사건들을 소재로 삼아 구상적 형식 안에 공들여 그리는 이유는 환영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도 내재되어 있는 것 같다. 자신의 눈으로 진실을 파악하고 싶다는 욕망이자 대중매체의 조작이나 왜곡과 거리를 두려는 의미도 있어 보인다. 그런 의미에서 선택된 소재들은 그래서 흥미롭다. 랙이 걸린 상황을 그림으로 연출한 것도 조금은 이해가 된다. 그러나 평범하고 지극히 무난한 구상적 그림의 어느 부위에 랙이 걸린 듯한 장치 하나로 그림이 의미를 갖는다고 말하기도 어렵다. 그래서 내 생각이지만 그녀의 그림이 좀 더 풍성한 회화적 맛으로 가득해지는 것이 더 요구되고 작가가 관심을 갖고 다루는 그 사건을 어떻게, 어떤 방법론으로 재현하는 것이 본인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좀 더 효과적일 수 있을까를 고민해보았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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