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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찬란한, 그러나 미치도록 슬펐던 화가 -천경자

김종근


<미인도> 
'기구하여라. 너의 운명, 
이 세상에 “아름다운 여인”이라는 그림으로 태어나 
그것이 마치 죄가 되어 이리 찢기고 저리 찢겨 
이제는 한 많은 어머니의 여린 가슴에 못을 박고 떠나 
저자거리에 미친년처럼 싸구려로 떠돌다 
이제는 아무런 진실도 없이 진짜처럼 상처만 남기고 떠난
그대 ! 참 틀린 말 없네 미인! 박명하여라. 
금분을 두르지 않아 빛나지도 않고, 슬프지도 않은 미인,
머리에 두른 종이 꽃, 나비조차도 너의 이름으로 불려 
폭폭한 가슴에 못을 박더니 
이제는 스스로 돌이킬 수 없어
미인도에 스러지네, 미인 참 기구하여라.'

 얼마 전 나는 선생님을 생각하며 이렇게 섰었다. 1986년 중반 선생님은 점심을 하러 혹은 커피를 마시러 종종 내가 일하는 현대백화점에 들렀다. 내 나이 30대 초반 그곳 백화점미술관 관장으로 있을 때 선생님과 카페에 앉아 이런 저런 그림 이야기를 나누거나 중국집에서 자장면을 얻어먹기도 했다. 그 때마다 선생님은 언제나 소박한 식사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피워 물고 소녀처럼 부끄러워했다. 선생님의 나이 67. 그분은 언제나 쑥스럽고 겸연쩍어 했다. 그러나 이제 그러한 선생님의 모습을 다시는 볼 수 없다는 것이 한스럽기까지 하다.

천경자는 누구인가? 그와 아주 가까웠던 소설가 박경리 선생은 천경자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화가 천경자는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멀리할 수도 없다...... 어딘지 나른해 보지만 분명하지 않을 때는 없었고 그의 언어를 시적이라 한다면 속된 표현 아찔하게 감각적이다. 마음만큼 행동하는 그는 들쑥날쑥 매끄러운 사람들 속에서 세월의 찬바람은 더욱 매웠을 것이다. 꿈은 화폭에 있고 시름은 담배에 있고 용기 있는 자유주의자 정직한 생애 그러나 그는 좀 고약한 예술가다. 

박경리 詩 「천경자」그렇다. 이 짧은 시 안에 그녀의 일생이 느껴질 정도로 선생님은 단호하고 아주 그림에 관한 한 분명했다. 시처럼 그는 원색처럼 화려하게 그러나 쓸쓸하게 인생과 예술을 짊어진 숙명적인 예술가의 모습으로 일생을 살았다. 그러나 “좀 고약한 예술가”라는 그의 시구는 수정되어야 한다. “그는 가장 예술가다운 예술가”라고 말이다. 이런 저런 이유로 나는 김흥수, 권옥연 , 운보 김기창 , 변종하 화백등과 가까웠지만 천경자 선생님만큼 작품을 끔찍이 사랑 한분은 없는 것 같다. 물론 장르가 달라 그러기도 했지만 . 선생님은 단 한 번도 그림을 돈으로 바꾸려 하지도 않았고 , 부자가 되길 꿈조차 꾸지 않았다. 


그러기에 나는 선생님의 그 순결하고 청렴 했던 작업과 삶의 순간들을 회상하는 것이 고통스럽다. 내게 있어 천경자 예술을 기억하고 회상한다는 것은 비장한 쓰림과 추억을 같이한다. 1991년 4월 어느 날 저녁 다짜고짜 나에게 전화를 걸어와 압구정동 한양 아파트로 급히 올 수 있냐고 했다. 나는 보았다. 거기서 어쩌면 영원히 있지 못 할 안타까운 순간들을. 선생님은 내 가짜그림이 이렇게 진짜그림으로 둔갑하여 다닌다며 속칭 “미인도”란 불리는 포스터를 앞에 두고 격노 하셨다. 아마도 그때 선생님 곁에는 홍대 동양화과 제자로 기억하는 홍 모작가가 있었다. 그때 본 그의 눈빛이 이렇게 오랫동안 선생님에게 비수가 되어 불행의 씨앗이 싹틀 줄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선생님은  “내 작품은 내 혼이 담겨있는 핏줄이나 다름없어요. 자기 자식인지 아닌지 모르는 부모가 어디 있어요? 나는 결코 그 그림을 그린 적이 없습니다.” 단호한 어조로 다른 잡지 표지의 그림들을 모두 내보이며 견딜 수 없어 하셨다. 


 “나는 절대 머리 결을 새카맣게 개칠하듯 그리지 않아요. 머리 위의 꽃이나 어깨 위의 나비 모양도 내 것과는 달라요. 작품 사인과 표시 연도도 내 것이 아니에요.” 당시 68세의 선생님은 그 어떤 명예도 필요 없을 정도로 유명하셨고 .기억력도 또렷 하셨다. 세상과 화단을 향해 애타게 선생님은 그 그림이 내 자식이 아니라고 흐느꼈고 울부짖었다. “자기가 낳지도 않은 자식을 남들이 당신 자식이라고 윽박지른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시며 그는 꽤 오랫동안 식음을 전폐하고 술만 마시면서 괴로워했다. 이 사건이 있은 후 1991년 4월 선생님은 결국 너무나도 괴로워 그림을 못 그리겠다고 하소연했지만 미술계는 냉정하게 외면했고, 이 그림의 소장자와 출처가 권력자라서 작품을 부인하는 것이라는 분위기로 몰아갔다. 선생님은 무수한 화랑에서 작품 달라는 주문을 받았지만 1년에 100호 하나 10호 서너 점 밖에 할 수 없는 작품 제작 때문에 많은 화상들로부터 섭섭함을 주고 있었다.
 

살아생전 선생님과 미주알고주알 모든 이야기를 나눴던 고바우 김성환 화백의 인터뷰가 이때의 분위기가 어땠는가를 잘 말해준다. 이러한 세태에 더욱 속상해 하던 차에 경향신문에 정모 기자는 이것을  “절필 선언”으로 증폭 시켰다. “붓을 들기 두렵다. 창작자의 증언을 무시한 채 가짜를 진짜로 우기는 풍토에서는 더 이상 그림을 그리고 싶지 않다.” 는 선생님은 그렇게 마지막 말을 남긴 채, 예술원에 회원직 사퇴서를 내고 미국으로 떠났다. 그러나 얼마 전에서야 나는 선생님이 그 해 1991년 6월 뉴욕에서 가까웠던 조선일보의 김기자와 정기자에게 5장의 장문의 편지와 그림엽서를 통하여 심경을 전했다. “이 불행한 사건에도 불구하고 건강이 허락하는 한 남은 생명을 불태워 차원 높은 그림을 그리겠다”는 결연한 의지와 각오를 담았다. 파리에 가 있는 나의 안부를 물으면서......
 

 그리고는 지난 1995년 리움에서 마지막 회고전을 가지며 , 1998년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림〈생태>,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환상여행><황혼의 통곡> 등 자신의 대표작 57점과 드로잉 36점 모두 93점을 섭섭했던 국립현대미술관이 아닌 서울시립미술관에 기증 했다. 저작권 및 그림 도구들과 함께. 그리고는 큰딸이 살고 있는 뉴욕으로 훌쩍 떠났다. 이후 우리는 아무도 그의 생사와 안부를 몰랐고 그 이후 그림이 어땠는지 궁금했다. 다만 2013년 세 점의 그림이 새롭게 A 에셋의 하대표를 통해서 받은 이미지를 여기에 처음 공개한다. 특유의 아프리카 풍경과 여인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다.


천경자(千鏡子), 아니 본명은 천옥자이다. 선생님은 1924년 전남 고흥 아름다운 시골마을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어린 시절 주로 외할아버지 아래에서 천자문을 배웠으며 그림에 특별한 소질을 보였다고 한다. 외할아버지가 읽어주는 소설에 슬픈 대목이 나오면 무릎을 베고 있다가도 엉엉 소리 내어 울 정도로 감수성 또한 유난히 남달랐다고 한다. 일곱 살 때 그녀는 집이 가난하여 소록도 나병원 간호부가 되어 동생들 공부를 돌봐주던 “순결한 눈망울, 뾰로통한 처녀 특유의 표정이 매혹적”인 “길례언니”를 만난다. 이후 그녀는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여인처럼 불리지만 사실 길례언니는 어린 시절 어느 여름의 축제날 노란 원피스에 하얀 챙이 달린 모자를 쓴 여인으로 그녀의 회상 속에서 아름답고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원한 처녀일 뿐이다. 광주로 유학하여 광주공립여자고등학교(현 전남여고)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하라는 부친의 권고를 뿌리치고 꽃다운 나이 16살, 1940년 일본의 동경여자 미술대학에 유학길에 올랐다. 이미 거기에는 나중에 운보 김기창의 부인인 우향 박래현이 먼저 유학 와 있었다. 이 때부터 그는 “鏡子”라는 이름을 썼다. 당시 일본에는 인상주의 이후 입체파와 야수파가 화단을 풍미하던 시기로 섬세하고 고운 채색화의 여성적인 일본화의 화풍에 그녀는 더 매료당했다.


스무 살 되던 해 그는 유학을 마치고 귀국하던 길에 첫 남편을 만났다. 귀국선 표를 못 구해 발을 동동 구르고 있을 때 도와주었던 친절한 그 남자와 결혼했다. 그러나 그의 결혼 생활은 그 다음의 결혼도 길지도 순탄하지도 않은 사연 많은 인생이었다. 20대의 힘겨운 언제나 손해 보는 사랑, 그리고 행복하지 못했던 결혼과 아끼던 동생의 죽음. 그러한 삶의 시련은 그를 더욱 그림 속으로 몰아갔다. 대표적인 작품들이 <내 슬픈 전설의 22페이지> 이었다. 천경자의 자화상으로, 54세의 작가가 22살의 자신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면서 그린 작품이다. 
‘내 슬픈 전설’이라는 말이 왠지 좋았다는 작가는 ‘꽃이니 뱀이니 머리에 얹은 것도 한’이 많아서라고 했다. 또한 여인의 머리를 둘러싼 뱀은 고통스럽던 시절 자신을 지켜주었던 수호신 같은 존재라고 했다. 또 다른 작품은 뱀을 떼로 그린 <생태> 이었다. 부산 피난시절 다방에서 전시할 때 보였다고 하나 그림이 너무 쎄서 전시하지 않았는데 소설가 공초 오상순선생이 소문을 내서 더욱 유명해진 그림이라 소문이다. 

 <생태>는 자신의 존재를 화단에 각인시킨 출세작인 동시에 뱀 작가라는 트레이드마크를 가져다 준 작품이었다. 1951년에 그린 ‘생태’는 35마리의 독사가 한데 엉켜 우글거리는 그림으로 무려 스물다섯번이나 광주의 뱀집으로 달려가 그렸고, 사랑하는 뱀띠 남자의 나이만큼 그려놓은 작품이었다.
그 자신이 가장 고통스러운 시절에 그린 그림으로 인생과 예술의 한 껍질을 깨뜨렸다고 할 정도였다. 그녀는 “나는 무섭고 징그러워 뱀을 참 싫어한다. 그러나 가난, 동생의 죽음, 불안 등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뱀을 그렸다. 징그러워 몸서리치며 뱀집 앞에서 스케치를 했고, 그러면서 겨우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때부터 뱀띠 남자가 바란다면 말도 타고 춤도 추고 공중그네라도 타고 그가 하라는 대로 말을 잘 들어 주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그는 사랑했다. 그리고 그 환상이 다리가 되면 먼 무지개 넘어 세계로 사라지게 된다면 나도 같이 나비가 되고 싶었다고 할 정도로 아픈 사랑이었다. 1944년 만난 첫 남편 이철식씨와의 사이에서 첫딸과 첫아들을 얻었지만 결혼생활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고 금방 이별을 고해야 했다. 

 1950년에는 동생 옥희씨가 폐병으로 이른 나이에 사망했다. 의지할 곳을 찾다 두 번째 남편 김남중씨를 만나 둘째 딸과 둘째 아들을 낳았지만, 그는 가정이 있는 , 여러 여자를 거느린 유부남이었다. 이 시기 개인적 고통이 응축된 것으로 평가되는 작품이 바로 ‘생태’ 이었다. 그의 그림은 모든 사연이 그림마다 있을 정도로 독특했다. 수십 번을 색을 올려야 완성될 정도로 발색이 힘들기도 했지만 ,땅바닥에 펼쳐놓고 하는 작업이라 시간도 많이 걸렸다. 그래서 무엇보다 그는 그림을 목숨보다 더 귀하게 생각했고, 피붙이 아들 딸 자식처럼 생각했다. 그러한 이유로 그녀는 그림을 팔 때마다 꼭 자식을 팔아먹는 부모의 심정이라며 도저히 그림을 쉽게 넘겨주지 않으려 해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어떤 경우는 그림을 팔았다가 그 그림 때문에 밤새 한잠도 못 잤다며 돈을 돌려주기를 부탁할 정도였고 아파트 문 앞에 돈 다발을 놓고 갔어도 그는 그림을 주지 않았다. 어느 땐 가는 부부가 크리스털 잔 세트를 선물로 가져와 그림을 달라고 했는데도 안주어 부부가 펑펑 울고 갔다고도 했다.(고바우 인터뷰)   

한 점에 수천만 원 하는 당대 최고의 인기작가 이었던 그녀가 돈 모으길 원했다면 그는 누구보다도 풍부한 부와 사치를 부리며 기사 두고 빌딩도 살 만큼 살 수 있었다. 그는 영혼의 실린 그 그림들을 결코 돈으로 생각하지도 또한 바꾸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한 때는 여동생이 폐결핵으로 죽을 때는 영양제를 살 돈이 없어 몸을 파는 창부가 되어서라도 돈을 원했건만 선생님은 그렇게라도 하지 못한 것을 두고두고 괴로워했다. 마땅한 작업복이나 홈드레스 없이 후들후들한 셔츠 차림으로 그는 십 수 년을 그렇게 작업했고 뿐만 아니라 그는 웃 묵에 짜놓은 걸레가 얼어붙는 좁고 추운 셋방에서 조차 결코 화필을 놓은 적이 없다고 했다. 그와 가끔 교류가 있었던 화상 L씨는 우리나라 원로화가 중에 자가용 없이 택시 타고 볼 일 보러 다니는 사람은 천선생님 한 분 밖에 없다고 했으니 그녀의 검소함은 절제 그것이었다. 

 그와 가장 친했던 만화가 고바우 김성환, 천경자가 자기 애인이라고 능청을 부리셨던 권옥연, 소설가 박경리, 한말숙 등을 가까이 했지만 그 외에 그는 자식들과 그림으로 평생을 고독과 고통으로 지은 한이라는 집을 짊어지고 살았던 화가였다. 꿈과 사랑 그리고 모정 이것을 운명적으로 타고난 환쟁이였다고 했다.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면 목숨도 없었을 겁니다. 화가가 되었기에 구원을 받은 거지요.” 그러나 선생님도 처음부터 화가가 되고자 했던 것은 아니고 진짜 동경했던 것은 연극배우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콩나물처럼” 키가 크셨던 선생님은 키가 너무 커 학예회의 <리어왕>에 주연은 커녕 극중 문지기로 뽑혀 대사도 없이 몽둥이만 들고 연습했던 것을 그는 오랫동안 아쉬워했다. 그녀의 무수한 수필 속에 영화나 배우 이야기가 수없이 많이 나오고 그 영화배경의 무대를 찾아가 그림을 그린 것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그렇게 선생님은 화가가 되어 그림을 그렸고, 그토록 목숨처럼 아꼈던 주옥같은 그림들을 향해 이 그림들은 내 것이 아니라며 모든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미술관에 기증했다. 


“막상 기증하고 나니 내 인생을 모두 떼어준 것 같아 가슴이 텅 비고 서운하고 눈물이 많이 났다고 술회 했다. “나는 하루 종일 혼자 있어도 내 그림에 나오는 모델들과 대화도 하고 사랑도 나누니까 하루가 지루하지 않아요.” 모두가 그렇게 그렸던 그림들이었다.

‘영원한 나르시시스트 천경자’
나는 지금도 1991년 그 때를 후회한다. 혹시 내가 이렇게 일이 태풍처럼 커지기 전에 관계자들을 찾아서 정말 조용히 이런 것들을 처리 하지 못했던 것들을 ,아니 처리 할 수 없었던 그 시간들을. 그러나 그보다 더욱 마음이 아픈 것은 선생님께 그 어떤 진실도 가려지지 않은 채 타향에서 운명을 달리 하셨다는 것이다. 그림을 목숨처럼 자식처럼 생각하고, 팔린 그림에 가슴이 아프고 그리워 다시 그림을 돌려 달라고 했던 선생님. 세 점을 출품 전시하고는 딱 한 점만 팔도록 허락했던 선생님. 평소 작가는 ‘그림 속 여자는 결국 그린 사람의 분신‘이라고 말했던 그녀의 그림 속에는 모두 그녀가 숨겨져 있다. <자메이카의 여인의 곡예사> 같은 그림에서는 어릴 적부터 동경하던 곡예사의 모습과  여행지에서 만난 여인에게 자신의 꿈과 환상을 , <환상여행>에서는 턱을 괴고 길게 누운 인물과 고개를 숙여 엎드린 여인, 공중에서 힘없이 몸을 늘어뜨린 여인의 절망적인 모습 속에서는 말년의 고독과 쓸쓸함 등이 그림마다 눈물처럼 흘러내린다. 서울시립미술관에는 싸인이 되어 있지 않은 미완의 두 점의 대작이 있다. <환상여행>과 < 황혼의 통곡>이 그것이다. 


 이국에서 보내던 말년의 슬픔과 비애, 그리고 고독이 화면 전체에서 물씬 묻어나 보는 이들의 감정을 아프게 한다. 이승과 저승이 나누어진, 전면의 길게 누운 여인과 엎드리거나 웅크린 한없이 고독한 여인들의 모습. 선생님은 어쩌며 이 모든 운명을 마치 예감이라도 하듯 그림처럼 통곡의 고통스런 시간들을 <황혼의 통곡>속에서 보였다. 결코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았던 선생님은 이 미완의 두 작품 속에서 그녀가 그림이 어떻게 완성 되는지를 보여 주었다. 록 허드슨 배우를 너무나 좋아했던 천경자 ,그녀는 아무 말도 없이 유골이 되어 그녀가 낳아놓은 93점의 자식들을 둘러보고 정말 쓸쓸히 우리들 곁을 떠나갔다. 슬픔만 남긴 채 ........ 그녀의 유해가 허드슨 강가에 뿌려 졌다는 이야기가 들려 온 것은 그나마 다행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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