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병상에서 쏟아진 축복의 노래 –생명

김종근



 때때로 예술가의 상처, 트라우마는 예술가에게 혁명적인 예술과 삶의 전환점을 가져다준다. 엄격한 어머니, 아버지의 방탕, 가정의 파산 등을 겪으며 암울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쿠사마 야요이가 그 대표적인 작가이다. 환청에서 시작된 정신분열 증상 그 자신의 편집적 강박증을 그대로 작업 속에 끊임없이 반복되는 물방울무늬를 통해 그는 독특한 자기만의 예술세계를 완성하였다. 우리는 이목일 화가에게서 그러한 예술적인 트라우마를 2011년 그의 병상의 일기에서 발견한다.  <나는 쓰러졌다. 눈을 뜨니 세상이다. 죽음에서 귀환했다......... 내 그림은 병상에서 재탄생 했다. 무거운 짐을 벗어 버리고 돌아온 후 그림 그리기를 좋아 한 아이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뇌경색으로 쓰러진 이목일에게 이런 트라우마는 그의 예술세계를 결정적으로 자연에서 생명으로 송두리째 바꿔 놓았다. 건강했던 시절 이목일 회화의 예술세계는 한국의 어떤 화가보다도 예술적인 이념과 형식에 사로잡히지 않은 가장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보헤미안 화가였다. 함양에서 태어나 일본으로 미국으로 강화도로 그리고 그의 고향 함양 창작 예술촌 촌장이 되기까지 그는 한순간도  유랑과 방랑을 주저하지 않았던 삶 이었다.  그래서 이목일의 예술세계는 연대기적으로  나눌 수도 있겠지만  뇌경색으로 쓰러진 2011년 이전과 그 이후로 구별 되어야 할지 모른다. 먼저 이전 그의 회화세계는 한없이 자유로운 일상적이며 서정적 풍경을 담아낸 낭만의 시대였다. 그 배경은 청년기 미술수업에서 찾아진다. 1980년대 서라벌 예대 현, 중앙대학교에서 미술공부를 한 후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다. 동경의 창형미술대학교에서 3년 동안 판화를 수학했다. 귀국해서는 왕성하게 다섯 차례의 개인전을 가지면서 그는 화가로서 뿐만 아니라 일본에서 익힌 동판화 화가로서의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그의 이런 판화 작업에 창의적인 감성과 표현에 자유스러움은 일본 유학이 커다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전히 자유분방한 그의 기질과 감성 표현은 1984년 관훈미술관에서 가진 에로틱 아트라는 뜨거운 이슈의 전시를 열면서 이목일 만이 할 수 있는 거침없는 내뱉기의 존재감을 확인 해 주었다. 다소 보수적인 우리 화단에서 이미 이런 전시를 개최 한 것만으로  이목일은 전형적인 돈키호테 스타일의 화가였다. 어느 한곳에 머무르거나 안주하는 정체성을 거부한 화가. 이처럼 천부적으로 타고 태어난 도전적이며 패기 넘치는 야망에 목마름을 채우기에 한국의 화단은 너무 좁았다. 그를 다시 현대미술의 메카 뉴욕으로 가게 한 이유였다. 그는 뉴욕의 아트 스튜던트 리그에서 보다 풍부하고 다양한 유화와 판화작업으로 주제와 표현의 깊이를 더해갔고 그의 모든 그림은 좀 더 모던해지고 테마에서 세련미를 가져왔다. 1987년의 아쿼틴트 작품인 <창통의 철학>과 드라이 포인트 작품들은 그의 선적 감각이 전성기에 달한 듯<정>과 같은 작품에서는 수려한 선과 색채에서 마티스적인 야성을 드러냈다. 일상적인 풍경과 서정적인 자연의 단면들을 감칠 맛나게 묘사했고, 구성에서 색채에서 누구도 넘기 힘든 자유분방한 색채의 해방감을 여지없이 본색을 보였다.
이것이 그가 세계화단의 출발인 뉴욕에서 얻은 결과였고 2003년 다시 호랑이를 가지고 뉴욕에 갈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귀국하여 북가좌동에서 응암동으로 거쳐 오면서 1993년 그는 첫 번째 유화 개인전을 롯데갤러리에서 가졌다. 이어서 다시 고양시 원당동 마을 회관으로의 정착은 그에게 자신의 삶속에서 자연을 다시 돌아보게 하는 결정적인 분기점이 되었다. 이 시기 그는 열정적으로 무수히 많은 작품을 제작했고 해마다 개인전을 발표하는 등 치열한 창작열로 이목일의 예술가적 광기를 유감없이 보였다.  



 1만마리의 호랑이를 그리면서 한 때  '호랑이 화가'로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이목일은 백두산 호랑이로부터 지리산 호랑이를 등장시키며 보이지 않은 것에 대한 세계를 기운생동으로 풀어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2000년부터 호랑이 그림에 심취하여 2년 만에 1만 마리의 호랑이를 그려 주목을 받았고 드디어 2003년 3월에는 미국 뉴욕의 엠파이어스테이트빌딩 필드갤러리에서 '호랑이 만 마리 초대전'을 가지면서 돈키호테 이목일은 또 다른 닉네임인 '호랑이 화가'로 이름을 날렸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리는 북경에서 호랑이 전시회를 , 호랑이 해인 2010년 1월 서울예술의전당에서 다시 호랑이 전시를 가지면서 그는 이제 한국적 민화를 이목일 스타일로 펼쳐낸 최고의 <타이거 아티스트>가 되었다. 그러다 2011년 1월 뇌경색으로 쓰러지면서 그의 화폭에는 그 이전에 볼 수 없었던 새로운 화두가 등장하는데 그것이 캔버스 위에 피어난 영원한 생명에 관한 노래였다.  


 그의 <병상일기-생명의 기쁨>은 어쩌면 위대한 예술가에게 주어지는 운명적인 트라우마 혹은 형벌 같은 것 이었다. 
그의 간절한 병상의 일기와 고백은 그가 당시 얼마나 절절 했는가를 웅변하고 있다. <틀어진 몸으로 다시 붓을 잡을 수 없을까봐 무서웠다. 다시 그림을 그릴 수 없을까봐 매일 눈물을 흘렸다. 이번 전시가 마지막> 이라는 생각으로 그는 생명에 대한 고귀함과 존엄함에 그의 예술적 영혼을 모두 실어 보냈다. 그 뿌리의 중심에 언제나 생명을 두었고 이 생명은 그에게 바로 판도라의 상자 같은 하나의 희망을 의미했다. 그것은 예술가로서 표현해야 할 전부를 맞바꾼 부채 같은 것이었고 , 고통스러운 병마를 이겨내고 죽음에서 다시 돌아온 이목일의 의지와 병상에서 투병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메시지이었다.


 벼락처럼 닥쳐온 그의 불행은 이러한 배경을 지나면서 이전의 작품들과는 그림이 무엇인가라는 근원적 질문을 가져다주었고 주제와 테마에서 현저하게 다른 변화를 가져왔다. 먼저 가족을 테마로 한 온화하고 따뜻하면서도 원색의 강렬한 야수파 풍의 색채가 그것이었다. 그 주제는 감사와 기쁨 그리고 '희망' 이었다. 이목일 회화세계에서 생명에 대한 사유와 철학은 또 다른 가치와 의미를 지닌다. 왜냐하면 그것은 고통과 맞바꾼   '생명의 기쁨“에서 절정을 보인 작품들이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는 모든 사물에서 생명을 느끼고 모든 사물에서 존재의 의미를 느꼈을 것이다. 그의  회화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소심한 자연 풍경은 사실 그의 고향에 대한 무한한 동경과 애정, 그리고  가족을 향한 애틋한 노스탤지어 이었다. 이 풍경들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모티브들이 <종달새의 지저귐 , 화폭 어느 쯤에 자리 잡은 강물에 비친 달과 별자리, 그리고 물고기>들이다. 어린 시절 마을에서 보아왔던 풍경들이며 삶의 흔적들이다. 그는 그가 스쳐간 시절의 흔적들을 빠지지 않고 화폭에 담았다. 그가 말하는 <유배의 땅 강화도의 화실에서 보고 느낀 것과 총총한 은하수에 흐르는 밤하늘의 정경을 보며 달 속에 있는 토끼와 계수나무 그리고 하얀 쪽배는 우리의 소박한 삶의 조화와 사랑을 전하는 메시지> 로 평가 되었다. 이러한 모든 그림속의 풍경들에 등장하는 형상들은  모두 그에 모든 삶의 여정이었다.


 화가에게 붓 사용하는 방법을 잊어 이쑤시개와 젓가락으로 그린다는 사실은 너무나도 참혹한 형벌이 아닌가 ? 
뒤틀린 몸으로 균형을 잡을 수 없어서 걷기도 서 있을 수도 없는 그 참담한 시절에 기록을 그는 눈물처럼 생명으로
풀어냈다. 그 상태가 어떠했는가는 왼쪽이 완전 마비되어 물감조차 짤 수가 없어 물감을 열 때 입으로 물고 짜 작업을 할 때면 얼굴이며 온몸에 물감 투성이 되었다는 고백에 다다르면 우리는 그의 작품들이 그림이 아니고 눈물로 만들어진 병든 조개가 품은 진주처럼 여겨진다. 이처럼 이목일의 회화는 온전히 그리움과 사랑의 결정체로 비쳐진다. 뜬금없이 빨래판 위에 그림을 그리면서 그는  “빨래판은 어머니이자 그리움의 대상”이라고 말한다. 이처럼 이목일에게 이제 그림은 지나간 기억의 되돌림이자 눈물로 얼룩진 추억인 것이다. 2012년 평창동과 2013년 갤러리 엠에서 가진 전시에 작품들은 “석화광중(石火光中)의 삶 속에서 아픈 몸을 가누지 못하면서도 혼을 다하여 쓰러져서 그린 주옥같은 그림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최근 그의 작품들은 정말 놀라울 정도로 자유롭고 야수성을 중후한 세련미와 자유로움으로 아우르고 있다. 


  2013년에 제작된 <동짓날의 추억>은 붉은 누드 작품으로 거의 마티스나  폴 고갱에게서 볼 수 있는 원시적 야성이 그대로 묻어나며 탐미적이고 아름다운 누드보다는 거칠고 강렬한 이미지를 환상적이며 대조적인 색채로 생동감 있게 표현했다. 마치 그가  '진실은 원색이다' 라고 화실에 써 붙인 좌우명처럼 말이다. <life 생명> 라는 작품 속에  구체적으로 등장하는 참새나 오리, 그리고 산, 강, 나비와 꽃 ,동물들도 이전의 오브제가 아닌 생명을 지닌 주인공으로 그림 속에 등장한다. 꽃그림도 전면에는 꽃과 나비가 그리고 배경에는 과감하게 거친 붓터치가 자리하면서 자연이 주는 고귀한 생명에 온전하게 몰입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강화도 <더리미 포구> 작품도 흥미롭다. 강화도에 삼년정도 살 때의 작품으로 스스로 처참했던 그 시절 횟집에 소주잔을 기울이며 정박 중인 어선들을 바라보며 스산한 마음을 달래본 그림 설명이 그의 삶의 고단한 여정을 애틋한 감성을 담아내고 있다.  


 둥근 보름달 그 달빛에 비친 <홍매화>의 꽃에 한 마리 나비도 작가의 존재처럼 겸손한 모습으로 자연 속에 어울린다. <초록풍경>도 자연풍경에 꽃과 백로 천년 꽃도 그가 자유스러운 구성과 색채로서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얼마나 진지했는가를 미인산의 모습처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나는 그의 이런 거침없는 회화작품이 좀 더 주목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동시에 이제 우리는 이목일이 보여주는 또 다른 입체 작품 <곰> 조형물 시리즈에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입체 속에 등장하는 사람과 꽃과 동물이 함께 하는 그의 또 다른 표현 방식이기 때문이며 이것은 이목일 예술의  또 다른 특징으로 유머러스하고 자연스럽고 거침없는 그의 회화성과 조형어법이 생명과 마나며 새로운 예술세계를 열어 보일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난해 '공허의 노래를 그리다'는 그러한 가족에 대한 그리움과 자연과 생명에 대한 뜨거움을 집약적으로 보여 주는 것에 그치지 않고 평면과 입체를 넘나들면서 그에게 숨겨지고 감춰진 진정한 파토스적인 생명의 열정이  이 작품들에서 절정을 이룰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 힘의 가운데에는 쿠사마 야요이 같은 트라우마가 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런 그의 작품들을 나는 병상에서 쏟아진 축복 같은 언어, 생명의 언어라고 부르는 것이다.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