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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요와 빈곤 속에 선 충북의 미술

김종근


1. 들어가는 말 

 이 글은 충북 현대미술의 과거와 그들의 세계를 살펴보고 미래의 한 방향성을 가늠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리고 그 대상은 작고작가로 한정하며 그들의 작품세계를 자료를 바탕으로 조명하고자 한다. 그러나 필자가 이곳 출신이기는 하지만 당시의 많은 작가들을 직접 만나거나 하지 못한 채 자료로만 그들을 접하여서 작가세계의 완벽한조명은 불가능하다는 한계가 있음을 밝혀둔다. 특히 이러한 사정이 있음에도 특히 자료의 체계적인 수집도 전무하다는데 충북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조망하는데 걸림돌이 된다. 그래도 이러한 세미나와 전시 작업을 통하여 자료를 발굴하고, 한국미술 속의 충북미술을 검증하는 것은 미술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을 간과 할 수 없다.   

  
 필자는 충북미술을 정의 함에 있어 일단 “무성격의 성격ㅡ충북미술”이라고 보고 싶다. 물론 한 지역의 미술을 특정한 경향이나 관점에서 바라보는 문제점이나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충북미술은 김복진의 조각에서 볼 때 선구자적 경향의 현대성, 유영교의 구상성 그리고 윤형근이나 정창섭등에서 보여지는 미니멀적이며 모더니즘적인 현대작업 .하동철에게서 발견되는 독자적인 옵티컬 아트, 변상봉의 상징적 형태의 한국화 작업등에서 그러한 일단의 다양함과 성격 없음을 발견 할 수 있다. 이 다양함은 결국 어떠한 화파나 사조를 안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한 특색은 이어지는 예술과 정신 2부 작가들에게도 공통적으로 드러난다. 다만 더 많은 작가들이 언급되어야 할 수도 있고 좀 더 구체적으로 작가별 평론이 이루어져야 하지만, 수집된 작가들의 개략적인 도판과 단편적인 글들을 토대로 해서 작가들을 검토 , 전개하고자 한다. 따라서 작가들의 연보에 관한 세세한 것들에 관한 각주를 생략하는 점 양해를 구한다. 특히 더 훌륭한 작품을 남긴 작가들에 관한 조명이 좀 더 이루어져야하나 글의 성격상 그 부분은 차후에 다른 기회를 통해서 연구 발표 하기를 희망한다.



2. 충북의 현대 작가들  
다른 장르에 비해 충북미술의 특징 가운데 하나는 유독 조각 분야가 강한 편이라는 점이다. 아마도 김복진의 영향인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 활동하는 작가로 볼 때도 그렇다는 것이다. 유영교를 비롯한 현대 생존작가들에서 그 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 중에 우선적으로 돋보이는 작가가 김봉구이다. 청주조각가협회 이사장을 역임 한 바 있는 김봉구는 서울대학교 미술대학과 동국대학교 행정대학원을 졸업해 1971년부터 2004년까지 이화여자대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재직했었다. 상파울루 비엔날레 출품, 아시아국제미술전 등 주목 할 만한 국내외 전시회에서 독특한 작품세계를 선보여 주목을 받았다. 그는 초기부터 인간의 삶과 존재, 아름다움 표현에 집중해 왔으며 입체의 조형적 요소들에 관심을 갖고 미적 절대적 감성에 만족을 줄 수 있는 절대적 형태미를 추구해 왔다. 

김봉구 조각의 중요한 특징은 아무래도 상징적인 요소에 있다. 1960년대 초 조각가로 시작한 이후, 그는 줄곧 자연과 생명을 상징하는 형태에 주목했다. 조각이 갖는 존재의 가장 근본적인 관계인 물성, 즉 재료나 나무 돌 등을 재료로 하여 이른바 한국적 모더니즘의 세계를 보여 준 것이다. 당시 조각작품의 경향이 비정형적인 유기체의 형태를 다룬 작품이 주류를 이루고 있어 <희망>으로 불리는 그의 작품의 생명력은 아무래도 인간의 형태를 빌린 구상과 반추상화, 형태를 생략 단순화하는 생명의 과정 자체를 나타내려 한 것이다. 부드러운 타원형의 형상과 기하학적 형태의 만남이나 교차에서 자유로운 기하학적, 미니멀적 정신도 공유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그의 작품에 생명의 순간을 형태로 탄생시키는 작가정신이 눈길을 끈다. 


 한국화에서는 가장 전통적인 한국화가로 알려진 이재호(1927~2008)는 청원군 내수읍 북이면 용계리에서 태어났다. 일제 강점기 청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해방 후 홍익대학교 미술학교를 졸업한 그는 정통 한국화를 배운 엘리트 화가로 불린다. 소암 이재호는 한국화의 대가이자 산수화의 거장인 청전 이상범의 제자로 산수화에 정진했지만 결코 그 화법이나 필법에 머물거나 흉내내지 않고 독자적으로 독립 자기 세계를 구축한 작가로 알려져 있다. 미술평론가 이구열이 지적했듯이 “예술적 회화성이 풍부하고 독창성이 우수하다” 라는 평가가 이를 잘 말해준다. 그는 해방 이후 화단의 호기일적이고 천편일률적인 수묵 산수화의 흐름을 자신만의 독창적인 방법으로 표현하려는 시도로 이 고장의 모습인 <미호천>이나 <보선폭포> 등을 그렸다. 기본적으로는 수묵에 채색을 곁들인 대표적인 수채화 기법인 수묵 채색법에 근거하여 표현한 것이 특징이다.


 비교적 크지 않은 이 풍경 작품들은 그의 자유로운 붓터치와 채색의 패턴을 볼 수 있는 작품이다. 그 특징을 잘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 중에는 가을 주색 속리산 풍경의 작품들도 손꼽힌다. 이 작품에도 언뜻 특히 수평과 수직으로 이루어진 구도와 혼재된 필법이 보이는데 그 점이 이 작가의 특징으로 평가되고 있다. 엄재원(1927~2013)은 청주에서 출생한 그는 1947년 청주사범학교를 졸업하고 40여 년간 청주와 서울지역의 초·중·고교에서 미술교사를 역임하다 1993년 교장으로 정년퇴임한 미술교육자로서 더 알려져 있다. 그는 교직에 몸담으면서도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해왔고 퇴임 후에도 여러 차례 전시회에 참여했다. 유화, 수채화, 스케치 등 다양하게 작업한 그의 회화는 사실적이면서 구상성이 가미된 자연주의적인 화풍과 색채로 인상파적인 특성을 보여 주었다. 주제도 인물 풍경, 정물 초상화, 정물 바닷가 풍경까지 폭넓게 관심을 보여 주제의 선택에 있어서도 다양성을 가지고 있으며 , 어떤 특정한 형식 없으나 작품의 특징은 풍경화에서 가장 잘 드러난다. 그의 작품은 마치 “박수근 씨가 진실을 그림 속에 담고 싶어 했던 것처럼 자연 속에 담겨져 있는 보이지 않는 진실을 담고 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이와는 다르게 한국 최고의 인상파 화가로 꼽히는 색채주의 화가가 임직순(1921~1996)이다. 1921년 충북 괴산 출신으로 일본 미술학교를 나온 임직순은 자연주의적 테마로 회화의 강렬한 색채로 인상파 화풍을 추구하며 독특한 한국적 구상화풍을 정립한 작가이다. 그는 한국 현대미술이 온통 추상으로 쏠리는 유행에서도 자신의 세계를 고집한 흔치 않는 한국적 인상파의 자연주의 화가로 주목 받았다. 특히 꽃의 아름다움에 빠져 ‘꽃과 여인’,을 많이 다루었으며, 시골 마을의 평화가 느껴지는 ‘농가의 시정’ 등에서 보듯 향토적인 소재와 열정적인 색채로 전형적 한국 구상회화의 정취를 살린 대표적 화가이다. 그는 1957년 대한민국 국전에서 실내 의자에 앉은 여학생을 그린 ‘좌상’으로 대통령상을 받은 이후, 국전에 연이어 특선,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했으며 조선대 미대에서 후학을 가르치면서 호남화단의 구상화에 오지호와 함께 절대적 영향을 끼친 화가이다. 주제는 풍경과 인물, 정물 등 서양화의 전통적 양식을 일본의 인상파에서 영향을 받았다. 투박한 거친 필치와 원색적인 색채로 임직순만의 화풍을 구축한 한국 구상화단에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보통 임직순 회화의 주제는 자연 풍경의 4계절, 화실 풍경이나 서재를 그린 실내풍경, 꽃 항아리를 그린 정물화 등으로 요약되며 대중의 인기를 끌었다. 미술평론가 이경성은 “미술사 속에 끼어서 평범하게 자라가지만 날이 갈수록 보석처럼 빛나는 사람”이라고 극찬 할 정도이다. 그의 작품은 “색채의 풍부함, 필치의 무게와 생동감 등이 충만하다”(이구열)고 말했다. 1957년 국전에서 대통령상을 수상한 후 남도화단을 이끈 대표적 화가로 오지호 이후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고 있다.

 서양화에서 임직순이라 하면 한국화에서는 한국화단에 훌륭한 족적을 남긴 작가가 운보 김기창이다. 김기창은 1913년 2월 18일 서울시 종로구 운니동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났으나 7살 때 장티푸스에 걸려 농아가 되었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배운 말도 모두 잊어버려 말을 듣지도 하지도 못하는 벙어리가 되었는데 그의 어머니는 고심 끝에 화가로 키우겠다는 결심으로 당대 한국화 최고의 대가인 이당 김은호 화백을 찾아가 그림공부를 배우면서 한국화와 인연을 맺게 되었다. 성동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후에 그는 늦게 세종대학을 졸업, 대학교 교수로 오랫동안 학생들을 지도하였다. 

 그의 화려한 경력을 보면 1962년 서울문화상, 1977년 은관문화훈장, 1981년 국민훈장 모란장, 1986년에는 당시 최고의 명예인 5.16 민족상을 수상, 1987년에는 색동회상을, 1993년에는 예술의 전당에서 8순 대회고전을 개최 혁신적인 파격과 대형 붓의 작업으로 화단을 놀라게 했다. 청각 장애인임에도 불구하고 운보 김기창은 예술원 정회원으로 활동하였고 저서로는 <『침묵과 함께 예술과 함께』>가 있고, 만원권, 천원권 화폐의 세종대왕과 이황 초상을 그렸다. 
 충북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은 1984년에 청원군 내수읍 형동리 428-2 번지에 운보의 집 미술관을 짓고 거주하면서 부터이다. 여기는 그의 어머니 고향이기도 하며 여기서 17년을 기거하다 2001년 1월 23일 화가로서 일생을 마치게 된다. 다만 스승 김은호 화백과 함께 친일파 화가로 지탄을 받아 어려움을 받기도 하였다. 1942년 김기창은 친일 미술단체인 조선미술관협회에 참가하는데 당시 조선미술전람회는 일본 군국주의 찬양과 조선민족의 사상 순화를 목적으로 열렸는데 여기서 김기창은 추천작가로 선정되었다. 이와는 다르게 그는 청각 장애를 극복한 천재 화가이며, 동시에 박래현과 더불어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던 동양 화단에 전설적인 작가이다. 


김종현은 1920년 1월 21일 청주시 남주동에서 태어나 1971년까지 활동을 하였는데 청주상업고등학교를 제1회로 졸업하고 미술에 대한 꿈을 품고 일본 동경 보통미술학교에 하였으나 경제적 여건 및 주위 환경이 여의치 않아 학업을 마치지 못한 채 귀국, 산업 회사에서 근무하다 1955년부터 청주상고에 근무한 청주의 원로작가 였다. 이 고장 미술교육에 정열을 바쳤는데 그 제자로는 이화여대 교수이자 조각가인 김봉구, 공주대학교 한국화가 이석구 교수, 청주교육대학 정해일 교수, 보리 작가 박영대, 문화방송 이봉원 등이 있다. 기라성 같은 수많은 제자와 작가를 배출한 것으로 교육자로 평가 받고 있다. 미술 교육자로서 학교의 발전에 기여한 업적으로 청주 상고 학교장으로 장례를 치른 일은 청주상고 설립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할 정도이다. 특히 무엇보다 제자를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남달라 어려운 생활 가운데서도 미술 재료를 사비로 구입하여 제자에게 나눠 주는 등 수많은 아름다운 미담을 가진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그림은 마치 수채화를 보듯이 부드럽고 연한 색채로 원근법을 사용하여 봄날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잘 표현하고 있다. 유화이면서 수채화의 얼룩 분위기를 유감없이 살려내어 시골 논밭의 풍경을 담백하게 담아내는 것이 특징이다.

 박석호(1919~1994,)는 옥천군 이원면 건진리 143번지에서 태어나 우리 시대의 풍경을 독특한 필치로 그려낸 작가이다. 그는 어느 파에도 속하지 않은 독특한 화풍을 구축하여 진솔하게 자기 시대를 살다 간 작가로 전해진다. 
 거리의 시장이나 풍경을 소박한 붓 터치와 회색의 색감과 담담한 필치로 표현했는데 1996년 국립현대미술관 근대 미술 작가 회고전으로 인해 다시 주목을 받은 작가이다. 홍익대학교 교수와 제1회 대한민국 미술대전 심사위원을 역임했다. 박석호가 옥천 사회에 알려져 있지 않은 것은 그가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타향에서 생활했기 때문으로 알려져 있다.
1994년 75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살아 생전에는 그다지 미술계의 주목을 받지 못한 불운 화가였다.  
 그가 미술 수업의 길로 들어선 이후 화단의 주목을 받은 것은 1946년 스물여덟 살 때 앙데팡당전에 유화 두 점을 출품하여 최고상인 미술협회상을 수상하면서 부터이다. 바다와는 거리가 먼 지역에서 태어났음에도 그의 회화적 주제는 의외로 태풍이나 폭우 등 바다를 소재로 한 것이 절대적으로 많다. 그러한 이유인지 그의 미술은 살아생전보다 타계한 후에 오히려 각광을 받는 형국이 되었다. 박석호가 오히려 본 고장에서는 주목 받지 못하고 중앙에서 재평가 받아온 것은 충북미술계의 현주소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지적된다. 


 심향 박승무(1893~1980)는 우리 시대 한국화의 거목 중에 한 사람이다. 그는 옥천읍 하계리 삼실에서 태어나 어려서 양자로 입양되면서 옥천을 떠났는데, 미술계와 어떤 인연도 맺지 않고 철저하게 야인 화가로 지내며 제자를 양성하지 않은 것도 조명이 늦어진 이유로 논의 된다. 부유한 집안 덕분에 혼란한 시대에도 미국 유학을 목표로 공부를 하던 중 소림 조석진의 문하에서 그림을 배우던 그는 김창완의 영향으로 묵화를 시작했고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 군사독재시절의 시대를 살아가며 심향은 철저하게 초야에 묻히는 길을 선택했다. 그는 가평, 목포, 광주, 옥천 등 국내뿐만 아니라 상해와 만주 등지를 돌아다니면서 유랑작가처럼 작업을 했다. “낭만적인 방관자적 기질을 갖춘 예술가, 집이 좋고 대단, 어떤 것으로 회자되는 박승무는 말년에 서울신문사에서 기획한 한국화 육대가 전에 초대되면서 국민 화가의 반열에 오르지만 이미 그이 나이에 79세 때 일이다”. 라는 그에 관한 평가가 말년에 이루어졌음을 이 설명이 잘 말해준다.
그는 설경의 모습을 가장 실감나게 그렸으며 경쾌한 필치로 눈에 덮인 시골의 풍경을 가장 서정적으로 담아낸 대표적인 작가이다. 화가로서의 60년 예술 인생 대부분을 철저하게 야인 화가로 살며 화단에 서는 것을 거부했으나, 후에 동양화적인 정취와 감칠 맛 나는 시골 정경의 묘사로 크게 주목을 받았다. 그리하여 의제 허백련, 이당 김은호, 청전 이상범, 심산 노수현, 소정 변관식 등과 함께 한국화 6대가로 선정되어 한국 화단에 주목할 만한 작가로 평가받았다.

 왕철수(1934~2004)는 괴산군 증평에서 태어나 증평초등학교와 증평중학교를 졸업했는데 그림을 즐겨 그리기 시작한 것은 증평중학교를 다닐 때부터 였다. 1950년 청주사범학교에 입학해서 다니다 한국전쟁을 맞아 청주사범학교를 중퇴하고 대전사범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거기서 은사 이동훈 선생을 만나 그림을 배우게 되고 그 분의 지도를 받아 화가의 길을 걷게 된 그는  미술교사로 근무하면서도 현대미술의 흐름을 알아야 한다는 취지로 서울을 오르내리면서 꾸준히 미술 공부를 계속 하였는데 그때 교류한 당시의 화가가 김서봉, 최쌍중 같은 당시 유명한 작가들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주로 충주댐 수몰지역 풍경화전으로 화집을 발행하여 후대에 전하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가 그린 단양의 <도담삼봉. 은 물속에 비친 삼봉의 모습을 사실적인 풍경으로 그려낸 대작으로 그의 숨어있는 저력을 충실하게 보여주고 있다. 이 외에도 다양한 빛에 의한 백두산 천지 풍경의 변화를 그린 여러 작품을 남기고 있다. 풍경에서도 사실적인 형태의 시원한 필치로 사계절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화폭에 담아냈다.  비교적 다른 화가들에 비해 묘사력이나 표현력이 두드러져 더 뛰어난 그림을 그릴 수 있는 역량을 가진 작가인데 그의 의지만큼 새롭고 훌륭한 작품들을 남기지 못한 아쉬움을 준다. 
그는 세광중·고등학교에 근무하면서 승진할 기회를 포기하고 화가로 남고 싶다고 할 만큼 그림에 대한 애착과 화가로서 긍지가 대단하고 후배에게 모범을 보이는 작가로 알려진다. 2004년 간암으로 작고했다.

이동호(1925~2003)는 1925년 3월 30일 충주시 가금면 하구암리 500번지에서 태어나 충주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홍익대학교에 입학하여 재학 중 한국전쟁을 만나 2학년 때 중퇴하였다.
전쟁의 혼란과 경제적 어려움 때문에 대학에 복귀하는 것을 포기하고 중학교 미술교사 자격 검정고시 응시에서 합격했다. 1962년까지 충주사범학교에서 수많은 제자를 길러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작가가 대한민국 미술대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바 있는 신범승이다. 1991년에는 중앙공무원학원장을 역임하면서 문화원장으로서 중원문화의 발굴 보전과 중원 문예 진흥을 위해 함께 노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충청북도 미술대전 초대작가로 추대되었고 미술교육 발전과 미술문화 창달에 크게 기여한 공로로 충주시 문화상을 수상했다. 일생을 붓을 놓지 않았으며 작품으로는 <백운 계곡>, <남한강변 계곡> 등 수 점을 제작하였다. 특히 수채화에 뛰어났고 <열정> 같은 작품에서 보이는 색채의 대비와 꽃의 특징을 잘 포착하여 드로잉에서도 탁월한 재능을 보여주었다. 2003년 78세 일기로 인생을 마쳤고 그는 특히 충주지역 미술인의 정신적 지주로 일관된 생애를 보냄으로서 청주의 안승각, 김종현과 더불어 충북 근대미술의 3대 선도자로 평가받고 있다.


 이상복(1929~1994)은 서예가로서 호는 우송으로 청원군 문의에서 출생하여 남일초등학교를 거쳐 청주상고를 졸업, 초등교사 검정 시험에 합격해서 문의 초등학교에서 근무했다. 1956년 중등 미술 서예 교사로 진천중학교에 초임 발령 받아 학생을 지도하면서 말년까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하였다. 국전에서 10여년을 입상 하였고 17회 국전에서 특선을 하였다. 수 많은 제자 중에는 백승면, 오신택 등이 있다. 지방보다는 중앙 무대와 국제전이 활동 무대였고 개성이 강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했으며 특히 서예에서 초서에 능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4년 67세를 일기로 생애를 마쳤으며 후대에 남긴 작품이 수 없이 많은데 그 중에도 단재 신채호 비문이 대표작이다. 


임상묵(1933~1998)은 1933년 8월 충청남도 연기군 조치원에서 출생하여 초등학교 졸업하고 초등학교와 천안농고를 졸업하고 서울대학교 응용미술과에 입학한 후 충남의 중·고등학교에서 학생을 지도했다. 1976년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디자인 교육 담당교수로 학생들을 지도하다 1998년 작고 하였다.
개인전을 3회 하면서 교수 작품 초대전에 출품하는 등 그의 작품은 전통적인 도자기의 형태에 새로운 색감과 질감으로 현대적인 도자기의 모던함을 동시에 추구했다. 
자신이 전공한 일반 평면디자인 작품을 보여주기 보다는 대학 졸업 후 개인적으로 기법을 공부하여 연구한 공예 도자기 작품을 위주로 제작한 특이한 경우이다. 평상시에도 도자기에 대한 매력과 한국적인 예술적 작품성에 대하여 강조했는데, 이것이 도자기에 대한 그의 깊은 애정을 잘 말해준다. 
아울러 그는 미술작품 창작 이외에도 이 고장 미술 관련 단체 업무, 미술 교육자로서 활동 하였는데 특히 충북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에서 훌륭한 제자를 많이 길러냈다.


최재섭(1945~1991)은 비교적 짧은 생애를 살다간 비운의 작가로 보인다. 영동군 영동읍 계산리에서 출생하여 영동중·고등학교를 나와 서라벌예술대학을 졸업했다. 대학 2학년이던 1965년 학생의 신분으로 제14회 국전에 <계곡>이라는 작품을 출품하여 입선하는 등 일찍부터 탁월한 예술적 재능을 보이기 시작했고, 1967년 4학년 때는 국전에 입선하는 등 학생시절부터 왕성한 창작력을 불태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68년 대학을 졸업하고 군 복무 후 교육자로 들어섰으나 1972년 2월 당시로는 어려웠던 개인전을 가지는 등 두각을 보여주었다.
중앙고등학교 미술과 교사로서 어려움을 극복하고 학생들을 지도하다 1991년 급성 심장마비 등으로 절명했다. 그의 나이 46세라는 젊은 나이에 유명을 달리하여 미술인들을 애석하게 했다. 
그의 작품은 비구상작업을 보여주었고 <살아가는 이야기>에서 보이듯 형상을 갖지 않으며, 선과 색채로 이미지를 완성하는 독자적 세계를 구축했다. 마치 잭슨 폴락의 드리핑 회화처럼 중첩된 물감들로 화면을 완성하는 패턴을 보여준 재능을 피우지 못하고 간 비운의 작가였다. 

 안영목(1923~2012)은 해방 후 한국 화단의 1세대에 속하는 원로 서양화가이다.
일찍이 20대 청년작가 시절 조선일보 현대작가 초대전에 초대, 추상화로 시작해서 구상화풍으로 옮겨간 아주 특이한 경우의 작가이다. 다분히 목우회 풍의 구상적 풍경으로 인상파적인 느낌을 강하게 주고 있다. 자연광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전형적인 자연주의나 인상파에 기초하고 있다. 작품 속에 화사한 색채와 꽉 짜인 구도, 노란색과 핑크색의 꽃의 대조적인 스타일이 눈길을 끈다. 특히 봄날의 풍경들에서 뛰어난 인상파풍으로 드물게 향토적 서정성을 주고 있다. 
한편 그는 설경, 바다 풍경 등에서도 고향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투박한 향토적 감각을 잘 보여준 작가로 불리고 있다.  
이서지(1934~2011)는 동양화풍을 바탕으로 한 우리나라의 흔치 않은  전통적인 풍속화의 대표적인 작가이다.
달력 그림으로 널리 알려진 풍속화가인 그는 전통적 일상의 삶의 풍경을 나타내는 작가로 이서지의 풍속화는 우리 시대 소중한 풍속의 모든 모습을 가장 익살스럽게 담아낸 작가로 유명하다. 
유머러스하고 재치 있고 거침없는 필력과 천부적 재능으로 잃어버린 풍속화의 전통을 가장 잘 살려낸 작가이다. 특히 아름답고 포근한 우리 풍속을 기록 남기고 싶은 것이 그의 소원이었다. 거의 기억할 수 없는 폭넓은 소재를 가지고 정확한 묘사로 재현해 낸 독특한 작가이다. 후에 그는 사라진 풍속화 전통을 가지고 자연의 모습을 재해석한 조형 작품을 제작하여 풍속화를 버리고 자신의 작품 속에 그 풍속의 모티브를 차용하여 현대적으로 승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았으며 미술관을 만들어 후학들에게 그의 작품세계를 보여주고 있다. 

청초(靑草) 이석우(1928~1987)는 청원에서 태어나 오랫동안 부산에서 활동한 한국 화가이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동양화과 1기 입학으로 경남 통영중학교교사로 근무하다 1953년 부산 미공보원에서 개인전 개최 이후에는 부산에서 꾸준히 작품 활동을 전개한 한국화가중 필법이 유려한 화가이다. 
특히 역사적 사건부터 서민의 삶까지 현실의 모습을 담담한 필치로 수려하게 묘사한 이석우는 부산 화단에 드물었던 동양화가이다. 
한국전통회화의 맥을 이은 작가로 불리는 그는 전통적인 문인화풍의 필치로 삶의 모습을 담아내어 인물에서 정물까지 두루 뛰어난 필력을 보여주었다. 농악과 풍물놀이 등 일상 풍경을 생략과 가녀린 필치로 공간을 아우르는 필력은 동양화단에서는 드문 기예를 가진 작가이다. 그는 전통 회화가 다루던 산수, 화조 등 소재의 관념성을 탈피하고 인물 풍속화를 현대적 시점에서 계승한 화가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전통에서 현대에 이르는 정서적인 세계를 구축한 화가이다.
 
월전 장우성은 1912년 충주에서 출생하여 김은호의 제자로 채색 공필 화법을 배우고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서 입상한 대표적인 전통 수묵화가이다. 해방 이후에는 한국 전통 수묵화를 일으키며 수묵의 사의성이 강조된 신문인화 운동을 이끌며 현대적이며 한국적인 수묵세계를 이룩하였다. 
1932년 제11회 조선미술전람회부터 1944년에 이르기까지 연속적으로 수상하였으며 1936년에는 백윤문, 김기창, 한유동, 조중현, 이석호, 이유태 등과 함께 이당 화숙인 후소회의 창립회원이 되었다. 1946년부터 1961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 교수를 역임하고 1949년 국전이 창설되자 초대작가, 심사위원으로 활동하였고 국전 추천작가, 초대작가, 심사위원을 역임하였다. 
1951년 종군화가로 중부전선에 종군하였으며 이충무공기념사업회 위촉으로 제작한 이순신 장군의 영정은 표준 영정으로 지정되었다. 이후 김유신, 권율, 정약용, 강감찬, 윤봉길, 정몽주 등의 영정을 제작하였다. 1961년에는 서울대학교 미술대를 사직하고 1963년 미국무성 초청으로 미국으로 건너가 워싱턴에서 개인전을 가지고 동양예술학원을 개설, 실기와 동양미술을 지도, 강의하였다.
그리고 1966년 3년여의 미국 체류를 끝내고 귀국, 1971년부터 1974년까지 홍익대학교 미술대 교수를 역임하였다. 1989년에는 월전미술문화재단 설립하고 1991년 4월에는 월전미술관을 개관하였으며 동방예술연구회를 조직하였다. 2005년 2월 28일 사망하였다.
<가을 부엉이>처럼 전형적인 문인화와 수묵담채화를 겸한 그의 필치는 수려하고 부드러워 당대에 가장 대중적인 인기를 누렸으며 말년에는 월전미술관을 만들어 후학들에게 많은 귀감이 되기도 했다. 

 황창배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하여 서울대학교와 동 대학원에서 회화를 전공하였다. 이화여자대학교와 동덕여자대학교에서 교편을 잡다가 2001년 애석하게 유명을 달리한 한국화단의 빛나는 작가였다. 
그는 천재성을 타고난 화가로 30살이라는 젊은 나이인 1977년 국전에서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함으로써 화단에 화제를 불러 일으켰고 당시 전통적인 산수화나 수묵화가 유행일 때 그는 혁신적인 비구상의 동양화 ‘秘(비)51’로 대통령상을 받으면서 혜성처럼 등장하여 화단의 부러움과 주목을 한 몸에 받았다. 
그는 “밀가루로는 빵만 만드는 게 아니라 국수나 수제비도 만든다.”는 수제비론에서 보여준 것처럼 그의 재료는 한국화로 보기 어려운 아크릴과 다양한 오브제들을 사용함은 물론 서양화 물감을 사용하여 한국 채색화의 반란과 혁신을 일궈냈다. 재료도 수묵과 채색과 종이는 기본이며, 마대는 물론 캔버스 위에 아크릴과 피그먼트, 파스텔, 흑연 등을 가리지 않고 두툼하게 발라 올리기도 했다. 
작품을 관습이나 형식에 연연하지 않고 “자기적 창의성”에 들어가 작가 스스로만의 독창적인 세계를 창조하고 구축 했다. 이러한 열정으로 그는 삼십대부터 이미 ‘황창배 신드롬’이라는 유행어를 낳을 만큼 ‘미술 애호가가 가장 좋아하는 한국작가’, ‘한국 화단에 반란을 일으킨 이단아’라는 찬사를 받으며 파격과 일탈의 세계로 생애를 마감했다.  
그의 작품세계는 1980년대 민화의 이미지를 차용했으며 한국화에서 보기 드문 비정형적 형태와 기호를 그렸는가 하면, 그림 속에 문자를 집어넣는 새로운 표현의 화면을 보여줌으로써 화단에 충격을 주기도 했다. 특히 대상을 해체시키는 변용의 파괴와 격렬한 필치의 제스처, 공격적인 붓놀림의 필법은 그의 회화에 진정한 힘을 보여주었다. 1980년대에 그는 전통과 현대를 아우르고, 1990년대에는 독특한 문자그림과 아크릴로, 죽음을 앞두고는 주제와 형식을 가리지 않는 대담한 미술 형식을 보여주기도 했다.
충북 출신은 아니지만 그의 작업실이 있던 충북 괴산군 청안면 백봉리의 야산에 잠들었다. 

우리가 또 다른 주목할 만한 작가가 월북 작가 김주경이다. 김주경(1902~1981)은 진천군 출신으로 고등보통학교 시절 설초 이종우(1899~1981)에게 데생을 배웠으며 1925년에는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도쿄미술학교를 졸업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춘곡 고희동을 비롯한 일본유학파들이 일본에 유학 후 인상파가 유행한 서양화풍을 그대로 수용한 것과는 다르게 그는 호남화단의 대부인 오지호(1905~1982)와 ‘한국적 인상주의’ 화풍을 정립한 작가로 1938년에는 오지호와 함께 한국 최초의 원색화집인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을 간행하는 등 한국 구상화단의 대부로 평가된다.
다만 주목할 만한 작품에도 불구하고 작품이 그다지 많이 남아 있지 않고 해방 이후 1947년 월북을 하였기 때문에 평가에 한계가 있다.
다행히도 <『오지호・김주경 2인 화집』>에 실린 원색 도판과 국립현대미술관 소장품을 통해 그의 생명력 넘치고 역동적인 힘찬 터치와 강렬한 화풍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현재 덕수궁 돌담길로 알려진 그 길을 붉은 양산을 쓰고 지나가는 여인의 모습이 인상적이다. 정동 일대에서 바라다본 풍경을 그린 ‘북악산을 뒤로 한 풍경’은 1929년 제8회 조선미술전람회(약칭 선전)에서 특선의 영광을 수상한 작품으로 남아있는 작품 중에 훌륭한 수작으로 평가된다. 1926년 <사양> 은 그의 야수파적인 색채와 필치를 잘 볼 수 있는 당시로서는 드문 걸작이다. 
청주시가 시립미술관을 건립할 때 작품을 보여주거나 소장할 만한 미술사적 가치가 높은 작가 중 한사람이다.

3. 충북미술을 위한 하나의 제언

한국 현대미술 속에서 바라다 본 충북미술은 미약하다. 그렇다면 충북출신 작가 혹은 충북에서 활동하는 작가들의 활동이 미약한 것이 문제인가라는 질문이 남는다. 
그러나 이것은 별개일 수도 있다. 분명히 김기창, 김봉구, 정창섭, 윤형근 등을 이어 임충섭, 김재관, 김경화, 이석구 등 훌륭한 작가들이 여전히 충북미술의 전통과 계보를 이끌어 오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의 충북미술은 여전히 불투명하다. 분명한 작가군도, 뚜렷한 경향도, 걸출한 작가도 손에 꼽기 어렵다.
그러기에 충북미술의 한 성격을 꼬집어 말한다면 무성격이 성격이라고 보는것도 큰 무리는 아니다. 
이렇게 볼 때 결과론적으로 한국 현대미술 속 충북미술의 힘은 넘쳐나는 것 같지만 막상 손꼽으려면 망설여지는 풍요 속의 빈곤으로 비쳐지는 것을 피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어떻게 본다면 충북미술은 훌륭한 자원을 가진 풍요로운 작가 군들을 많이 가지고 있는 듯하면서도, 실제적으로는 그다지 많은 작가들을 배출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특히 현재 충북지역의 대학에 많은 미술과가 있고 작가와 교수들이 있음에도 이렇게 미약해 보이는 것은 충북미술이 지닌 하나의 단점이자 기현상으로 보인다. 작품의 특징으로 볼 때도 대구화단이나 호남화단처럼 분명한 흐름이나 사조가 없이 무엇인가 성격이 없는, 즉 무성격의 성격이 충북미술의 한 특징으로 지목 될 수 있다. 
물론 개개인으로 볼때는 중요한 한국미술의 견인차 역할을 한작가가 적지 않다. 
이러한 배경에는 여러 가지 이유와 불가피한 문제가 있겠지만, 필자의 소견으로는 무엇보다 지역미술에 힘을 실어줄 수 있는 충북도내 작가들과 미술대학의 교수들의 결집력이 약하고 그것에 결정적인 문제가 있다고 보인다. 주목할 만한 전시도, 전시공간도, 화랑도 컬렉터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또 하나는 이러한 다양성에 힘을 실어 줄 만한 전시기획은 물론 비평적 기능이 충북도내의 미술행사에서나 미술관에서 조차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무엇보다 창작이 활성화 되려면 그 창작과 함께하는 미술비평이 건강하게 만나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렇게 충북미술이 풍요 속의 빈곤으로 무엇인가 있을 듯 하면서도 이루어지지 못하고 형성되지 못한 것은 향후 충북미술의 화두로 논의, 부각시킬 필요가 있다.
그나마 사립미술관이 5개 정도나 있어 지역과 중요한 전시미술문화가 유지되는 것은 다행스러운 일로 받아 들여진다.
비근한 예로 대구는 대구 미술만의 특징이 한국미술 속에 살아 현대미술과 구상미술의 특징이 남아 있다. 호남도 호남만이 가진 인상파풍의 구상과 호남화단만의 독특한 동양화 전통과 양식이 있는데 충북미술은 그런 좋은 토양과 작가들을 가지고 있음에도 더 걸출한 작가를 배출하지 못함은 매우 아쉽고 유감스러운 현실이다. 
더구나 2년마다 수십억씩 지출하여 이루어지는 국제공예비엔날레 같은 국제적인 행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타작가는 커녕 공예의 인프라나 미술관, 박물관, 공예시장 하나도 형성시키지 못하는 미술에 대한 투자는 심각하게 고려 성찰 할 필요가 있다. 

미술의 산실인 시립미술관이나 작가를 기리는 기념관조차 없는 것도 충북 미술의 한 현주소이자 현실이다.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가 있음에도 공예 박물관이나 미술관 하나 갖고 있지 못한 것은 반듯이 논의 해볼 여지가 있다. 
개인적으로는 분명 뛰어난 충북 출신의 작가들이 많음에도 불구하고 지역적으로 낙후 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는 현실이 안타깝다. 
청주의 시립미술관과 도립 미술관도 빨리 만들어지고 충북미술이 문화 융성과 함께 꽃피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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