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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한국의 피카소 , 하반영

김종근


 우리나라의 근현대 화단에도 서양의 미술사 못지않게 전설적인 스토리를 가진 화가들이 적지 않다. 거슬러 올라가 스스로 눈을 찌른 최북화가며 요절한 권진규, 화백 박수근 이중섭, 김흥수 화백이며 그 가운데 예술가의 삶과 인생으로 볼 때 풍운의 화가 김구풍을 빠뜨릴 수 없다. 피카소가 4살에 붓을 잡았다고 하지만, 일곱 살에 서당에서 서예와 수묵화를 붓을 잡기 시작하여 철모르는 나이 13세 때 금릉 김영창(1910-1988) 선생의 강력한 추천과 권유로 그는 조선총독부미술전람회(약칭 선전鮮展)에 ‘나팔꽃이 있는 정물’이란 유화작품을 익명으로 출품했다. 



 결과는 놀랍게도 선전의 최고상인 조선총독상 수상이었다. 그러나 김구풍의 파란만장한 예술가의 인생은 만석꾼의 아들로 태어난 그에게 다르게 시작되었다. 양반가문의 집안에서 장손으로 태어난 그에게 “환쟁이”는 용납 할 수 없는 사건이었고 일찍이 서당의 훈장 선생님도 그의 천부적인 재능을 알아봤고, 군산 보통학교 시절 도게 모이치 교장 선생도 특별히 다른 수업시간에 그림을 그릴 수 있게 배려하는 등 특혜를 받을 만큼 그의 예술적 감성은 단연 돋보였다. 심지어 미술교사였던 이노우에 사이키 선생은 일본에 까지 데려가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가풍을 중시하는 양반 집안에서 환쟁이는 ‘아랫것들이나 하는 상스러운 짓’으로 매도당했다. “너는 이제 우리 자식이 아니다”라는 역정 끝에 그는 그림을 버릴 수 없어 집을 떠나 가출했다.  열네 살에 집을 나온 그는 “바람과 구름을 벗 삼아 대만 티벳,만주 등지를 떠돌았다” 만석꾼 부자 집 아들에서 그는 남의 집 머슴살이, 부두 선창가의 막노동자, 간판 집 허드렛일을 하는 환쟁이가 된 것이다. 나중에 그의 집안에서 김구풍을 찾는다는 소문이 무성하자 아예 그는 성과 이름을 ‘하반영’으로 바꿔 버렸다. 이는 그림을 반대하는 집에 다시는 돌아가지 않겠다는 결연한 의지의 저항인 것이다. 


 “제 원래 이름은 김구풍이에요. ‘하반영’은 ‘냇가 논 반마지기에 어룽거리는 그림자’라는 뜻입니다.  가난한 화가의 길을 걷고 있으니 이 이름이 잘 어울린다 싶어 제가 그렇게 지었죠.” 일제 강점기, 그의 나이 20대 초반.그는 그림을 그릴 물감과 화구를 마련하기 위해 닥치는 대로 잡역 일을 해야 했고 대전, 대구, 여수, 부산 등 전국을 돌며 극장의 간판을 그렸다. 그가 받은 돈은 2원. 마네킹 하나를 그려주고는 3-5원으로 한 달 수입이 45원 정도로 이렇게 하여 미제 물감이나 붓을 구입 하면서 그림을 그렸다. 그의 예술은 파란만장한 인생처럼 그를 모든 장르에 걸쳐 호기심을 가졌고 그것은 그대로 그의 화폭에 모든 미술형식으로 나타났다. 초기부터 그는 자연의 풍경이나 정물 등을 사실적으로 그리기도 하고 때로는 구상화풍으로 표현했다. 40대이후 중년에는 그의 사상과 철학을 담긴 초현실주의 화풍으로 옮겨갔고 그러다 70년대에는 초기 그림에서 벗어나 더 추상화 되고 변화된 모습의 미래의 염원과 기원이 담긴 절대적인 추상회화의 세계로 옮겨갔다. 이렇게 그는 구상회화와 초현실주의를 바탕으로 착실히 거쳐야만 이러한 세계를 바탕으로 자신의 생각과 혼이 담긴 진정한 추상화를 그릴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풍경  정물 누드( 인물은 일부러 피함) 등을 거침없이 짓이기거나 나이프로 긁어내면서 내면의 불타오르는 모든 열정을 표현 쟝르나 형식에 구애 받지 않고 모두 화폭에 담아냈다. 



 그런 그의 화풍의 변화는 대략 10년을 주기로 해서 새로운 패턴으로 바뀌었고 이와 더불어 싸인도  20-40대엔 영어로 ‘banyong'을 , 50대엔 한자로 ’반영‘을 썼죠. 60대엔 다시 한자‘影영’으로 바뀌다가 지금은 한자 흘림체로 ‘영’이라는 사인을 남기고 있다. 그의 인생의 곡절만큼이나 그는 미술 작품에서 머무르거나 정체하길 강하게 거부했다. 그림 값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다작으로 문기 넘치는 수묵화와 문인화를 그렸는가하면 담채에 채색뿐만 아니라 1985년 가을에는 프랑스에서 돌아와 가장 민족적인 것이 가장 한국적인 것이라는 좌우명으로 한국적 미를 탐구하기 위해 전국 방방곡곡을 방랑했다. 산수와 실경을 그리되 자연을 해석하는 독자적인 시각을 가지려 애썼고 기법도 유화뿐만 아니라, 수채화‧서예‧ 도예‧수묵화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장르를 넘나들며 작가로서의 변신을 쉬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하반영화백은 어느 그물에도 걸리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바람 같은 화가였다. 그는 화가 중에 가장 따뜻한 사랑을 가진 휴머니스트 화가로 이미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자기의 영혼을 바친 그림의 대부분을 가난한 사람들의 행복을 위한 자선이나 복지에 바쳤다. 병원은 물론 각종 사회 복지재단에 자신의 작품을 기부하여 이웃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40여 년 전부터 독거노인, 결식아동, 독립유자녀, 불치병 환자를 위해 써달라고 지금까지 수억대에 이르는 작품을 극비리에 부치면서 기증해 왔다. 



 최근 10년 전부터는 ‘반영미술상’과 ‘하반영 화백배 전국 론볼 대회’를 제정해 가난한 화가들과 장애우들을 돕고 있다고 한다. 자본주의가 휩쓰는 이 팍팍한 현실에 그는 “나는 화공畵工이에요. 화공은 그림으로, 노동자는 노동으로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이 당연한 거죠. 나는 종교는 없지만 그림으로 밥을 먹게 해준 조물주께 항상 감사해요. 그래서 그 보답으로 그림을 그려 사회에 이바지하는 것뿐이에요.” 라고 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선행이며 자선인가 ? 그런 인생만큼 그의 인맥 또한 이색적이고 각별하다. 우리나라 대표적인 영화감독 ‘이강천’과 ‘신상옥’은 그가 집을 뛰쳐나와 선창가, 간판 집 허드렛일을 할 때 함께 고생한 죽마고우이며. 이중섭과는 6.25때 일본에 살고 있는 아내와 자식들을 애타게 그리워하는 이중섭의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돈이 생기면 자갈치 시장에서 고기를  사다가 찌개를 끓여 함께 술을 마시곤 했다고 한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박정희 전 대통령과도 해방 전 만주 봉천 등지에서 자주 어울리던 사이로 그에게 프랑스로 가고 싶다’고 하여 그는 프랑스 유학을 가기도 했다. 그 외에도 노태우 대통령 측의 배려 ,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이 하반영의 예술에 깊이 감동한 일화들은 부지기수이다. 그의 일화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산가족에 각별한 관심을 보여 부모 잃은 전쟁고아를 일곱씩이나 자신의 호적에 입적시켜 뒷바라지할 정도였으니 그의 인간으로서의 면모 또한 존경스럽다. 비단 그가 다작과 여러 방면 관심을 가졌지만 그는 현실비판에 무관심하지 않고 메시지있는 작품을 제작했다. 



 ‘망향’이라는 작품은 가장 대표적인 작품으로 보인다. 명태 한 마리가 줄에 입이 꿴 채 바다로부터 하늘 높이 들려있는 주제야말로 실향민이 고향을 그리는 애틋한 심정이 아닐까 여겨진다. 아마도 그의 이러한 예술의 열정이 빛을 발한 것은 61세에 비로소 프랑스의 대표적인 국전인 ‘르 살롱’전과 ‘콩파레종’전에서 각각 금상을 수상함으로써 국제무대에서도 주목을 받았다. 1979년 말에서 1985년까지 머물면서 그는 400년 전통을 자랑하는 프랑스 국전 ‘르 살롱’ 공모전에 프랑스 교외의 바르비종의 가을 정취를 동양적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사유의 세계로 그려 금상을 수상했고, 또 ‘콩파레종’ 공모전엔 독수리 한 마리가 유유히 바르비종의 밀밭을 날고 있는 모습을 그려 금상을 수상했다. 이런 국제적인 수상과 평가는 그가 그림을 그리기 위해 충청도 화양동 계곡과 강원도 정선 산골로 들어가 텐트 속에서 4년이나 생활하면서 오직 그림에만 몰두하면서 500여점이나 되는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현실에도 눈감지 않았다. 1980년 광주 민중 항쟁의  체험을 바탕으로 캔버스에 옛 도자기, 명태 머리, 밧줄, 달걀들로 당시의  ‘처절했던 광주’를 상징하는 정물화를 남기고 있다. 이 내용들은 <한쪽 어깨가 쳐진 옛 도자기에 유방을 그려 넣고 보니 영락없이 만고풍상 다 겪은 여인, 이 도자기는 어머니를 상징하고, 술꾼들에 의해 흔히 내팽개치곤 하는 명태 머리는 신군부가 농락한 광주를, 밧줄은 구속을, 검은 색 배경은 어둔 시대를, 그리고 달걀 셋은 부활을 기다리는 광주의 아들딸들을 각각 상징하고 있다.> 고 평가 되었다. 



 물론 하반영 화백은 너무 많은 다작의 아쉬움은 있지만 작품의 구성력, 다양한 기법과 형식 등으로 단 한순간도 고여 있지 않고 새로운 세계를 위하여 창조적 변신을 해온 점은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97세로  100세를 바라보는 그는 지금까지 도예전 2회, 서예전 2회, 수묵화전 10회, 국제전 150회, 개인전 50회, 해외초대전 10회, 외국 스케치 여행 12회 거의 피카소의 12만점을 능가하는 작품으로 비교 되고 있다. 89세의 나이로 일본 `이과전에서 최우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거기다가 지난해에는 군산시에 작품 100점을 기증한 바 있다.언젠가 피`신의 손을 거친 작품들이라 찬사를 받는 사실주의 화풍의 정물화 및 풍경화, 그리고 말년에 이르러 꽃 피운 추상화 작품 등 60여 점이 선보일 예정이다.



 그가 살았던 시대적 아픔이 담겨있고 인생철학이 담겨있고 무엇보다도 자연을 거스르지 않는 인간성을 아우르고 있다. 그는 분명 피카소가 아니다.  피카소는 모든 작품을 바로셀로나 미술관과 파리의 피카소 미술관을 위해 기증 보관하고 있지만 그는 모든 것을 아낌없이 어려운 이웃에게 다주었다. 치열한 극기의 삶 속에서 배어난 소년 김구풍, 이것이 97세의 하반영의 예술가 정신인 것이다. 마지막까지 그는 백세전을 위하여 생성’, ‘착각’, ‘빛’ 시리즈 등의 대표작을 가지고 우리들에게 구상에서 정물, 풍경, 추상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과 인생을 보여줄 것이다.


 그가 금언처럼 마음에 두었던 이 말처럼 말이다.  (마지막으로 난  궁금하다, 그가 얼마나 많은 작품을 그리고 남겼는지 ?)  '나는 형식이나 기법이 한길로 가야한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내 작품이 세상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 선생을 두지 마라는 것도 바로 내 이야기를 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예요. 내 사상 내 길이 따로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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