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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왈종 작가에 관한 궁금한 7가지

김종근



1. 이왈종은 누구인가? 

“ 나는 1945년 해방 전에 태어났어요. 그래서 잘 먹지도 못하고 병약했고, 우리 부모님이 내 작은 손을 보시면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을 거라 했어요. 그래서 난 그림을 그리지 않았으면 죽었을 거예요. 어렸을 때 아버님하고 외삼촌이 서예를 하셔서 매일 묵노(묵을 가는 시중)를 했었어요.아버님이 글을 쓰다 쉬면 종이 가져다 놓고 베끼는 게 일이었죠. 덕분에 어려서부터 국전에도 자주 갔었고......... 어려서부터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해서 미제 구호물품을 받을 때도 초콜렛이나 과자가 걸리면 나는 친구들과 크레파스로 바꾸어 쓰곤 했어요. 그때 우리나라 남산크레용이나 지구크레용은 그리면 양초만 나와서 질이 좋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제주의 아이들에게 그림을 가르쳐요.“ 이왈종 선생님과 나누었던 어린 시절 그가 회상한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정말 아름다운 풍경의 제주 서귀포 정방폭포 입구, 영국의 유명한 조각가 안토리 곰리의 조각이 사람들을 반기는 <이왈종 미술관> 정원에는 사시사철 이름 모를 꽃들이 앞 다투어 핀다. 그가 서울을 버리고 제주 서귀포에 마음과 몸을 놓은 지 어언 24년,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화가이지만 더 이상 서울의 화가가 아닌 ‘제주의 화가’ 이다. 한국화를 고집하는 화가가 아닌 작가 이왈종. 원래 그의 이름은 이우종(李禹鍾)이었다. 아주 오래전 그는 한 점만 출품해야 하는 국전에 욕심을 내어 작품을 한 점 더 내기 위해 스승의 조언을 듣고 ‘이왈종’과 ‘이우종’으로 두 점을 출품했고, 묘하게도  ‘이왈종’으로 출품한 작품만 입상을 하여 하루아침에 그의 이름 우종은 왈종이 되어 버렸다. 생애의 기막힌 개명의 변신을 그는 거부하지 않고 받아 들였다. 아마도 그가 평생의 운명적인 '생활 속의 중도'를 받아들였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1945년, 경기도 화성에서 태어나 서라벌 예대, 지금의 중앙대학교 회화과를 졸업하고 건국대학교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그는 국내외에서 대작들을 중심으로 25번의 개인전을 가졌다. 1974년, 그는 지금의 대한민국 미술대전인 국전에 문화공보부장관상을 수상하면서 화단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이후 미술기자상(1985), 한국미술작가상(1991)을, 제5회 월전미술상(2000년)을 비롯, 서귀포 시민상 , 교육공로상, 한국미술문화대상 등을 수상 했고 화집과 저서만도 12권의 방대한 책들을 펴냈다. 아무래도 그의 화가로서의 제2전성기는 1979년부터 90년까지 재직했던 대학교수를 그만두면서 부터일 것이다. 추계예술대학에 갈 때 만 해도 교수는 딱 5년만하고 그만 두겠다던 약속을 그는 11년이나 하고나서야 평생 화가로서 그리고 싶은 그림이나 실컷 그리다 죽겠다는 결연한 의지를 가지면서 대학교를 떠났다. 그가 길도 낯설고 물도 낯설은 제주에 간 이유는 이렇게 분명했고 아주 명료했다. 서울에서 교수로 살면서 수 없이 열리는 동료와 제자들 전시, 애경사 그리고 이런 저런 모임과 회의에서 벗어날 수 있는 유일한 길이 서울을 버리는 일이었다. 그는 진정 욕심 부리지 않고 죽을 때 까지 그림만 그리기를 진심으로 목말라 했고 갈망했다. 일찍이 가정에 무관심 했던 부친의 삶에 힘들어 했던 어린 시절, 그에게 한 집안의 가장으로서 오로지 작품을 위해 불확실한 전업 작가로서 그가 선택한 제주행은 죽기 살기를 건 인생 최고의 모험적인 순간이었다. “스스로를 고립시켜 승부를 걸고 싶었어. 뭐든지 몰입하지 않으면 안 돼. 치열해야 해. 그때 판단이 옳았던 거야.” 라고 그는 그 순간을 종종 회상한다. 그러나 제주에서의 생활은 그리 녹록하지 않았다. 



2. 제주에 정착, 그러나 그는 천재화가가 아니었다. 

그는 한국의 잘나가는 인기 작가이지 결코 천재화가는 아니었다. 그는 정말 죽을힘을 다하여 그림을 그렸고 화가는 그렇게 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다. 무엇보다 작품 제작에만 몰입할 수 있었던 제주에서의 초기 이방인 생활은 그에게 오히려 쓸데없는 잡념을 불러 일으켰다. 그는 서울 생각이 너무나 간절해 잠을 이루지 못하는 불면의 긴날을 그림이라는 노동으로 몸을 혹사시켜 잡념들을 피해야만 잠을 이룰 수 있었다. 이제 20년이 넘어가니 이곳 제주 생활이 아주 편하다고 했다. 어떻게 서울에서 살았나 싶을 정도로. 그는 매우 규칙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 지금도 거의 어김없이 저녁 9시에 잠을 자고 새벽 3시에 일어나서 작품을 시작 한다. 제주도는 자연경관이 참 아름답다고 했다. 제주도를 알려면 태풍이나 일몰을 꼭 봐야 하는데 10월은 일몰이 정말 아름다울 때라고 했다. 일몰을 보면 가끔은 자살충동이 일어날 정도라고.


“난 일몰을 보려고 오후 4시쯤 나가서 일부러 서쪽해변을 따라 걸어가곤 해요. 태풍이나 일몰은 고정된 형태가 아니기 때문에 작업화하기 위해서 머리속에 입력을 시켜두어요. 사물을 보고 그것을 그대로 스케치 하는 것보다 머리 속에 일단 입력했다 재구성해 가는 것이 더 효과적이에요”.


그는 눈으로 스케치를 한다고 했다. 사실적으로 스케치하는 것보다 상상이나 확대의 공간이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난 일몰, 벼락 ,태풍 칠 때면 잠을 안자요. 항상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니까 놓치면 안 된다는 생각도 있고 순간적으로 일어나는 일에 의해 충격요법으로 그림을 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어요. 특히 태풍이 몰아닥칠 때는 긴장감도 있고, 어떤 뜨거움이 일어나는 것을 느껴요.” 그는 긴장감을 갖고 살고 싶어 했다. 제주도에 처음 내려올 90년대 초, 그는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서울 생활을 접을 때 열이면 열 사람이 다 만류를 했고 ..... 서울에 집이 2채 있었는데 그것을 팔면 5년은 먹고 살거라 생각하고 작업실을 제주도에 마련해 놓은 상태에서 5년만 실컷 그림 그리고 죽자는 극단적인 생각을 하고 내려온 것이다. 그런데 제주도의 사림살이는 너무나 외로웠다고 했다. 오죽하면 작업실에서 파리 한 마리가 날아다니는 것만 봐도 고맙고 반가워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고 하니 말이다. 


그가 초기 붓을 꺾고 장지로 부조 작업을 하거나 다시 환조로 입체 작품에 탐닉하면서 조각, 목판 ,그리고 향로, 대형 입체 조각, 판화 ,도판에 이르기까지 시작했던 그의 거침 없는 전방위적 예술 작업은 외로움이 가져다 준 눈물과 바꾼 선물이었다. 이러한 열정은 결코 파블로 피카소에 창작열과 뒤 떨어지지 않는다. 또한 흙으로 만든 둥글고 네모난 도판은 물론 아트 상품, 모자, 넥타이, 시계, 컵에 이르기까지 대중들의 절대적인 사랑을 받고 있는 미술관 입구 드롭 탑의 아트 콜라보레이션도 그의 그칠줄 모르는 열정의 다이아몬드 같은 것이다. 너무나 귀엽고 아름답고 장식적인 멋,금판에 새긴 춘화에서 골프공까지 그의 작품들은 마치 모든 예술의 결정판 같다. 샤갈이나 피카소가 마치 말년에 프랑스 남불 마두라에 내려가 도자기를 구운 것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사실 지금 우리는 그가 해놓은 10여 년 전의 돌조각과 엄청난 양의 미공개 대작들이 있음을 알지 못한다. 그리고 우리가 미처 보지 못한 채 기업에 소장된 작품도 적지 않다.혹은 <왈종 후연 미술문화재단>에 공개되지 않은 주옥같은 작품들의 숫자까지 하면 수 천점이 넘는다.   


이왈종 작가는 삶에 있어서도 정말 천성적으로 부지런한 화가이다.전시를 열 때마다 번거로워 하지 않고 손수 도록 앞에 드로잉을 그려주는 친절함과 배려, 삼십 여년을 매일 9시경에 잠들어 새벽 2~3시면 일어나서 구상하고 스케치하고 작업을 하는 그것이 이왈종의 참모습이다. 제주 사람보다 제주를 더 사랑하는, 그리고 제주의 어린 아이들을 사랑하는 ‘이왈종의 그림교실’은 그의 또 다른 제주사랑의 인간성을 증명하고 있다. 물론 해마다 작품을 팔아 적지 않은 금액을 유니세프와 다문화 가정을 위해 돕는 것도 쉬지 않고 있다. 그렇게 바쁜 유명화가가 20여년 가까이 무료로 금쪽같은 시간을 내어 아이들을 가르친다. 


5개월 과정으로 . 새로 접수하는 날이면 아이들을 가진 학부모들이 밤새워 줄을 설 정도로 그의 영재교실은 단연 최고의 인기를 끌고 있다. 무료로 재료도 다 제공한다. 그것은 아이들을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신을 위한 것이라고도 했다. 어른들에게 하나님을 그리라고 하면 머뭇거리지만 아이들은 주저하지 않고 그린다는 것이다. 어린이들에게서 신선함과 참신한 마음을 배운다고 했다. 나는 언젠가 서귀포 그가 살던 거리, 이중섭 거리 옆에 이왈종 거리가 만들어 질 것이라고 에피소드처럼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온전하게 예술을 영혼을 제주에 바친 예술가가 드물기 때문이다. 그는 입버릇처럼 말한다. “안주하면 죽는다.”, “인기는 아침이슬과 같다”고. 그는 그 정신을 제주 서귀포에서 펼쳐 놓는다.


  

3. 이왈종에게 예술이란 그리고 중도란?

나는 물었다. 그에게 예술은 무엇이냐고. 그는 주저하지 않고 <반야심경>이라 했다. 형태가 있는 것은 없는 것으로, 가고 없는 것은 있는 것으로. 예술의 기본이 이것이라는 것이다. 성경, 불경을 모두 읽어 보았지만 아무래도 그의 인생을 바꾸어 놓은 것은 반야심경 뿐이라는 것이다. 


“나는 특별히 종교에 힘주는 것을 싫어하지만, 모든 것은 존재하기 위해 카리스마가 필요한 법이지요. 난 특별히 사람이 목에 힘주는 것도 싫어요. 그림도 철학이 앞서는 그림은 그림이 아니지요. 철학은 작가가 만들어 가는 것이에요. '관념'을 깨뜨리는 것이 중요한데 윤리나 규범은 환경에 의해 정해지는 것이지 어떠한 법칙이 있는 것이 아니거든요. <일체 유심조 심해무법> 이라고 마음의 작용에 따라 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생각해요. 선과 악도 절대적이거나 원칙적이지 않은 것처럼 그림도 마찬가지지요. 접시에 술을 따라도 술잔이고 재떨이에 술을 따라도 술잔인 것이거든요.' 이렇게 그는 그림에는 특별한 형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무법주의자이다. 그래서 1993년, 서울에서 부조전을 할 때 많은 사람들이 비난을 했다. 그는 자기가 그림을 그리는 것은 오로지 먹고 살기 위해서라고 지나치게 겸손하게 말한다. 또한 스스로 예술성도 모른다고 한다. 이처럼 그는 모든 것에서 자유롭고 싶어 한다. 붓으로 그려야만 작업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처음 제주도 내려왔을 때 서울 생각 안 하려고 붓을 다 꺾어 버린 채 손으로만 작업한 적도 있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일정한 기간을 두고 그림을 꾸준히 바꾸어 나간다. 작품이란 건 작가의 역량이 제일 중요하고 그 다음은 얼마만큼 내면의 세계로 성실하게 파헤쳐 들어가는지가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그는 중도의 세계를 추구한다. 중도란 무엇인가?


 그가 생각하는 중도(中道)란 어느 한곳에 집착을 보이지 않고, 욕심에서 떠나 있으며 어느 쪽에도 치우치지 않는 평상심의 세계를 지칭한다. 거기에는 불협화음도 없고 사사로운 모든 인간의 물욕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수도자의 마음과 같은 자세이다. 아우구스티누스와 헤겔은 예술을 종교와 같다고 했다. 이처럼 이왈종에게 있어 예술은 고통스러운 대상이 분명 아니다. 삶의 번뇌스러운 욕심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모든 것을 비우려는 사람, 수행자의 길을 가는 심정으로 작업을 하는 것이다. 공자 또한 논어에서 최고의 명사(名士)는 『속세로부터 떠나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것이 다름 아닌 중도의 세계이다. 인간이 살아가면서 갖게 되는 사랑과 증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분노와 평정의 그 총체적인 삶을 아우르는 길 그 길이 중용의 삶이자, 함께 하는 삶인 것이다. 그는 '중도는 평등을 추구하는 나의 정신적인 상태에서 비롯한다.'고 했다. 중도는 다름 아닌 모든 것을 있는 대로 보고 동등한 가치를 부여하는 평등이라는 것이다. 자연과 더불어 사는 평등, 만족하면서 편안한 마음을 가지며 애증에 치우치지 않는 평상심이 그것이다, 심지어 자신의 집에 「중도관」이란 이름을 붙일 정도로, 그가 평생 붙들고 고민하는 화두가 곧 중도 인 것이다.


4. 그는 그림을 어떻게 바꿨나?

분명 과거 그의 그림은 약간 촌스러웠다. 1970년대 이왈종의 화풍은 탈춤이나 농부 또는 병신춤 등을 주제로 한 전통적인 것과 무속적인 주제에 깊은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점차 발묵법이 중심이 되는 진경산수(實景山水)의 화풍 양식으로 옮겨갔다.  1980년을 전후하여 화단에서 주목받은 그의 작품들은 동양화의 전통적인 필법이나 발묵, 화면의 구성 등에서 전형적인 산수화나 문인화적인 특성을 보여주었다.다만 이 시기에 흥미있는 것은 이미 발묵 작업에서 뛰어난 기량을 보인 작품의 배경이 관목 숲의 중심이 되는 배경이 제주도였다는 사실이다. 그가 후에 이렇게 제주도에 정착하게 되는 이유에는 이렇게 예사롭지 않은 숙명적인 인연이 있었는지 모른다. 후에 그가 자신의 세계를 비교적 명료하게 양식화 시키는 1980년대 초 <생활 속에서>라는 일련의 연작들에서 삼각형의 화면 구성으로 그 만의 독창적인 구도를 선보이고 있다. <생활 속에서> 시리즈의 작품들은 산 하나를 수묵과 채색으로 중심에 그려놓고, 그 안에 마을을, 다시 그 안에 작은 산을 묘사하는 독특한 구성을 보여준다. 물론 그러한 시형식(視形式)이 그의 회화에 전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지만 그는 <생활 속에서> 부터 <어락의 세계>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주제를 취하면서 표현기법에 있어서는 파격적이라고 할 만큼 자유분방한 다양성을 보여준다.특히 1988년 수묵과 아크릴 컬러로 완성된 <생활 속에서> 작품은 그의 타고난 거침없는 자유스러움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특히 이 작품에서 3층집 한가운데 층에서 벌거벗고 있는 여인의 모습이나 정사장면과 함께 등장하게 되는 풍경,  때로는 사람보다 더 큰 물고기들이 노니는 이왈종 스타일의 테마를 가진 시리즈 작품이 20여년이 지난 지금에도 표현기법만 다를 뿐 일관되게 나타나고 있는 세계관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이것이 그가 그림속에서 주장하는 내용이며 강한 예술적 이념인 중도이기 때문이다. 그의 회화적 흐름의 변천에 있어 빠뜨릴 수 없는 부분이 또 하나 있는데 바로 이왈종작가의 삽화이다.1990년대 초반인 1993-1994년에 들어 그의 작품에 일대 변혁의 기법이 나타나는데바로  부조형태의 회화작업이 그것이다. 이런 의외의 기술이 어디에서 연유한 것인지는 명확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조선일보에 이영희의 《노래하는 역사》에 그린 삽화가 계기가 된 것으로 여겨진다. 이때 선보인 삽화는 표현의 깊이나 기법 양식 등에서 기존 삽화의 대중적인 이미지를 벗어나 회화에 버금가는 괄목할 만한 작업을 발표함으로써 미술계에서 이왈종의 존재를 다시 알리는 계기가 되었고 삽화는 신문이 나올 때 마다 화제가 되었다. 그가 시도한 이 기법은 흐름상으로는 전통적인 형식을 버리고 진부한 실경과 기법의 단조로움에서 벗어나게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이 방법은 자유로운 부조형태에 채색을 끌어들여 의도하는 이미지를 효과적으로 표식, 입체화 하는 등 그의 표현방법에 있어 커다란 전환을 가져왔다. 특별히 소재를 묘사하는 패턴이나 화면 분할법 등은 후에 그의 작품에 훨씬 세련되고 안정된 화풍을 정립하는데 기초가 되었다. 무엇보다 이왈종은 외형적인 무늬의 화려함을 지니고 있지 않다. 그는 흔하게 얼굴을 드러내지도 않고 자신을 알아달라고 세상의 번잡스러운 잡사(雜事)에 끼어들지도 않으며 은둔해 있는 작가 이상으로 불리길 원치 않고 있다. 한지에 먹을 써야 하고, 이런 저런 입장을 고려해야 할 터인데 그의 회화는 일체의 형식에서 철저하게 떠나 있다. 그의 미술형식에서의 초월은 내용과 기법, 양식적인 부분에서도 하나도 다르지 않다.


그는 한지 위에 그림을 그리며 가끔 먹을 사용한다. 그러나 화면 어디에서도 한국화라는 사실을 강조하지도 않고, 의식하지도 않는다. 그는 보편적으로 작가들이 관심을 갖는 중요한 기초적인 기법인 농담도, 발묵도 구사하지 않는다.화면의 여백을 고려하지도 않는다. 일체의 화도(畵道)나 전형에서 그의 작품은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면서도 그의 회화가 회화로서 충실하게 가치를 지닐 수 있는 것은 일정한 형식을 떠나도 그림이 되는 법을 그가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1995년을 전후한 장지에 아크릴 작업을 보면, 화면 정중앙에 등장하는 하루방이나 물고기 등 다양한 이 형상들은 후에 그의 평면작업에 빈번하게 나타나는 가장 중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또한 색채의 사용에 있어서도 원색적인 색채를 대담하게 화면 속에 끌어들임으로써 그의 회화에 <생활 속에서-중도>라는 강렬한 채색의 시대를 열어 보였다.


5. 그는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중도로 바라본다. 

때로 그는 「중도」를 초현실적으로 담아낸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것이다. 그것은 물고기와 말, 동식물과 같은 자연물들이 사람과 한 화면 속에 공존케 하는 것이다. 그의 그림들에는 서귀포 바닷가, 수영을 즐기는 사람, 붉은 해가 솟는 일출봉, 정갈하게 피어있는 수선화 등 화폭에는 사람 사는 냄새가 배어있다. 모든 작품에 꽃, 새, 물고기, 배, 집, 말, 초가, 돌담 등 오브제를 통해 제주사람들의 삶의 이야기를 보여준다.그리고 꽃, 돌하르방, 배, 새, 노루, 물고기, 자동차, 텔레비전, 전화기 등 생활 속의 물건들이 특유의 상상력으로 결합되어 있다. 그의 회화는 무엇보다 재미있고 흥미로우며 아름답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아주 소박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주체도 객체도 없고, 크고 작은 분별도 없는 절대 자유의 세계의 철학. 작품의 표현에도 상하 좌우의 개념도 뛰어 넘는다. 마치 무형식을 바탕으로 하면서 무질서를 원칙으로 생활 속의 사물들을 화면 위에 늘어 놓는다. 인간의 입장에서는 인간만이 삼라만상의 중심이 되고, 동물 또는 미물의 입장에서는 또 그들 자신이 삼라만상의 근본이며 중심이 된다. 따라서 존재의 유무라든가 상대적 개념은 한낱 인간 중심의 사고에서 비롯된 것임을 알 수 있다. 



6. 그는 왜 하필 꽃과 골프인가?

그의 화집을 들여다 보노라면 새벽바다. 물안개에 웅크리고 있는 서귀포 어디쯤에 골프채를 옆에 끼고 필드에서 바다를 흘겨보는 화가의 모습이 선명하게 떠오른다. 정방폭포 근처 청명한 햇살과 몰아치는 가파른 파도소리를 그림속의 애인처럼 옆에 끼고 중도의 세계를 산책하는 그는 언제나처럼 골프를 하고 싶어 골프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고 했다. 대중들은 그런 그의 골프 그림과 꽃그림을 사랑한다. 왜냐고? 작가는 골프에서 인생을 보았고 사람들은 그의 골프에서 인생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꽃들이 앞 다투어 피는 제주에서, 제주가 너무 좋아 스스로를 동백꽃 화가로 불리길 희망했던 그는 이제 동백 꽃 주인에서 골프화가로 중도의 세계를 넓혔다. 그는 종종 골프가 인생 같다고 했다. 인생이 어느 한 순간도 방심 하지 않고 긴장하며 살아야 하듯이, 의외의 복병을 만나 고난의 역경에 빠지듯이, 공이 벙커에 빠질 수 있듯이 인생과 골프는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골프도 예술처럼 준비하고 혼을 담아야 한다고 했다. 스릴을 강하게 느낄 수 있는 벙커에서 그는 인생의 모든 지혜를 배운다. 그렇다, 골프는 사랑하고 미워하는 애증의 게임이라고 한다. 그림도 골프와 똑 같은 운명을 가지고 태어난 아름다운 인생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태어난 골프그림에 인생을 바라보는 그의 원칙을 잃지 않으려는 세계관이 아름답게 화폭 속으로 들어와 중도와 노닐고 있다. 마치 피카소가 투우를 통하여 인생을 발견한 것처럼 말이다. 골프도 그렇듯 예술도 한 순간도 무심할 수 없는 연속 드라마의 코스이다. 수없이 선택과 결정의 순간들이 닥쳐오기 때문이다. 


골프에서는 이기고 지는 승부보다 페어플레이를 하는 것이 더욱 값진 일이다.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이왈종의 그림은 이렇게 인생을 골프를 통해서 흥미롭게 형상화 한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OB를 내고, 벙커에 빠뜨리고, 스리퍼팅을 하고 싶어 하는 골퍼가 없듯이 그런 화가도 없다. 그림과 같이 인생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일관성이다. 다소 난코스에 직면해 있다 하더라도, 악성 벙커에 빠져 있다하더라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고 절대로 실수하지 않는다는 마음가짐과 자세는 바로 예술가들의 세계와 하나도 다르지 않다. 이왈종이 오로지 제주에서 그의 예술과 치열하게 싸우는 이유가 그것일것이다. 난코스에, 악성 벙커에 있다 하더라도 결코 흐트러지지 않고 절대 평상심을 잃지 않는 사람, 자신이 날려버린 형편없는 샷을 금방 잊고 다음 샷을 준비하는 사람. 그 아픈 기억을 오랜 시간이 지나서까지도 잊지 못하는 사람은 훌륭한 그림을 그릴 수 없다. 


이왈종은 그러한 인생의 삶과 진리를 골프를 통하여 화폭 위에 펼쳐 놓는다.  골프의 황제라 불리는 타이거 우즈가 그랬던가! '나는 한 번도, 지금도 치밀하게 계산되지 않은 샷은 날려본 적이 없다.' 고. 이왈종은 그 자신이 좋아하는 골프처럼 그의 그림에서 모든 인생을 그려낸다. 그런 면에서 가장 완벽하게 그는 예술가적 삶을 골프처럼 살아온 화가인 것이다. 그래서 그에게 골프는 자신의 예술세계를 추스르는, 일상의 평상심을 다스리는 생활 속의 중도, 바로 정신을 담금질하는 시간이다. 그의 장지 그림은 원색을 대담하게 화면 속으로 끌어 들이면서 골프의 구체적인 상황들이 코스별 이야기 구도에 따라 볼거리로 펼쳐진다. 골프를 다루면서도 실제 그 안에는 꽃, 돌하르방, 배, 새, 노루, 말, 물고기, 자동차, 텔레비전, 등이 산과 하늘 바다로 풀풀 날라 다니고 모든 것이 어울려 조화를 이룬다. 또한 그가 그리는 무수한 꽃은 그가 행복하기 위한 것이다. 꽃을 보면 행복하고 그는 사람들에게 그 꽃으로 행복해지고 행복을 주고 싶다고 했다. 



7. 작가는 말한다. 외로워야 한다고  

그는 언제나 입버릇처럼 “작가는 외로워야 한다”고 말한다. 외로움은 작가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며. 그에게 있어 외로움은 작업 속으로 끌어들이는 힘이라고 했다.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일이 어찌 외롭지 않고서 가능한 일인가?“ 라고 반문하며 스스로 고립시켜 승부를 걸고 싶었다고 주장한다. 그는 제주에서 살아있는 모든 생물과 함께 하는 이웃들을 중도라는 이름으로 그의 화폭에 불러 세웠다. 그렇게 호출해서 불러들인 등장인물들이 동행하는 동백나무· 매화 .개· 새· 물고기· 자동차가 모두가 제주에서의 그의 동료들이다. 그는 중도를 '선과 악, 사랑과 증오, 분노와 절망 등 온갖 갈등에서 벗어나 평상심을 되찾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명료하게 정의한다. 그는 그 평상심의 가슴 가운데서 `중도'를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고, 원근법을 무시하고 초월적으로 담아내는 민화의 형식을 찾아낸 것이다 . 그 세계에는 바닷가에서 수영을 즐기는 사람, 붉은 해가 떠오르는 일출봉, 크고 거대하게 산처럼 피어있는 수선화 등이 화폭 전면에 사람 냄새가 해풍과 함께 코를 찌른다. 그의 전시에는 많은 작품에서 꽃, 새, 물고기, 배, 집, 말, 초가, 돌담 등 그곳 제주 친구들의 모습들로 전시장을 채워진다. 통통배를 타고 고기를 낚는 모습, 2층집에서 춤추는 여인, 낮 뜨거운 정사를 나누는 장면들이 작품의 기조를 이루고 있다. 색채도 밝아지고 바탕의 색채도 달라졌다. 예전의 원색적인 작품들에서 한결 부드러워지고 화면을 벽화처럼 희뿌연 분위기로 채색하는 세련미는 제주도의 사계절의 정취와 풍광을 미치게 담아내고 있다. 제주도로 내려간 지 24년. 그는 서귀포 한적한 바닷가에서 새벽공기를 호흡하며 이 엄청난 대작들을 완성했다. 그리하여 더 깊은 수선화의 화가, 동백꽃 화가, 골프 화가로 그는 제주를 물들일 것이다. 조선백자를 닮은 서귀포 그의 미술관에는 자연의 빛과 바람이 15미터의 3층 찻잔처럼 둥근 모양 속에, 다비드 머큘로(Davide Macullo)등이 만든 그의 미술관에 그의 모든 외로움이 아름다운 향기를 뿜어내고 있다. 아주 오래도록. 이왈종이 여전히 우리들에게 최고의 매력을 지닌 작가로 사랑받는 진정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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