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고


컬럼


  • 트위터
  • 인스타그램1604
  • 유튜브20240110

연재컬럼

인쇄 스크랩 URL 트위터 페이스북 목록

김명식/집은 인간이다. 집을 위한 기도

김종근

집은 인간이다. 집을 위한 기도
- 고데기에서 용인까지ㅡ 

김명식 작가의 고향은 서울이다. 1949년 서울시 강동구 고덕동에 <고데기>는 구역상으로는 서울이었지만 당시로써 너무나 변두리였고, 작가의 어린 시절에는 심지어 전기도 안 들어오는 곳에서 태어났다. 
그러니 당연히 그가 살던 어린 시절의 언덕배기에 집을 그는 결코 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예술가는 결국 자기가 태어난 그 고향의 흔적과 환경을 벗어나기란 쉬운 일이 아님을 다시금 알게 된다.
화분으로 작업을 하는 쟝 피에로 레이노가 원예과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그렇고, 세계적인 조각가 세자르가 궁핍했던 학창시절 자동차 폐차장에서 아르바이트했던 경험이 그가 자동차를 가지고 작업을 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김명식의 작품을 화풍에 따라 시대별로 정리하면 고데기, 뉴욕, 그리고 일본 , 용인시대로 나뉜다. 
먼저 70년대 고덕동의 옛 이름인 고데기 시리즈(1980-1990)이다. 
작가는 ‘고데기’ 연작을 통해 코흘리개 시절 고덕동의 척박했던 정경을 자연이라는 테마 속에서 정겹고 따뜻하게 화폭에서 부활시켰다.
여전히 당시의 <홈타운 >이란 작품은 다소 거칠지만, 풍경 안에 집의 모습들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어 그에게 고향 혹은 집에 대한 추억이 이토록 애틋했음을 말해주는 증거가 된다.

뉴욕, 이스트 싸이드의 사람스러운 풍경들-집
작가는 이렇게 고덕동의 70년대 풍경을 그린 ‘고데기’ 시리즈로 10여 년간 작품 활동을 하던 중 스스로 “ 매너리즘에 빠졌다”라며 뉴욕행을 감행했다. 
2004년 작가는 미국 롱아일랜드 연구교수로 체류하면서 뉴욕커들의 집과 사람들을 모티브로 얻어 (작가는 이것을 영감이라고 했다) ‘이스트 사이트 스토리’ 연작을 발표하였다.
일견 이러한 작가의 뉴욕행은 그 성취에 많은 궁금증을 주었지만, 그의 집에 대한 철학은 흔들리지 않았고 일관적이었다.
당시 화풍은 이전의 서정적인 풍경에서 훨씬 단아하고 정제된 형식으로 변모했고, 색채도 더욱 원색적인 붉은색과 주홍색으로 본격적인 김명식 스타일의 형태를 가지면서 그는 대중들의 인기와 주목을 받았다.
당시 작품을 하게 된 결정적 배경을 작가는 “뉴욕에서 머물던 어느 날, 전철을 타고 작업실을 가는 중 창밖으로 비친 집들이 사람의 얼굴로 보이는 거예요. 지붕은 머리, 창은 눈, 대문은 입으로 내게 다가오는 거예요.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러 인종이 모여 사는 곳이잖아요. 집과 인종을 오버랩 시켜 흰색은 백인, 검은색은 흑인, 노란색은 동양인으로 은유” 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여기서 작가는 일관되게 다양한 인종을 <집>과 비유하는 독창적인 그리움에 메타포를 <집>으로 비유하는 세련된 작품들을 보여 주었다. 
작가는 희고, 검고, 노란 인종마다, 집마다, 얼굴마다 다양한 인종들의 삶의 애환과 스토리를 희망으로 전환하는 메시지를 화폭 속에 담아내고자 고뇌했고 뉴욕에 거주하는 동안 5회의 개인전을 여는 등 열성적으로 활동했다. 
동시에 그의 결정적인 모티브와 색채의 변화는 당시 그를 붙잡고 있던 유년 시절 ‘고데기 시리즈’에서 좀 더 단순하면서 절제된 형태로 승화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화면 전체를 빼곡히 채우는 기존의 구성이나 시형식에서 벗어나 그 안에 사람들의 스토리, 삶의 애환을 <집>에 빗대어 풀어내는 기법에 강렬하고 원색적인 색채로 옷을 덧 입혔다.
이것으로 언제나 해가 떠오르는 동쪽, 이스트 싸이드의 희망 스토리는 불씨가 되살아났다.
중요한 것은 그 불씨가 바로 그가 궁핍해 하던 70년대 변두리 시절 부대껴온 유년 시절 <고데기>의 <집>이라는 사실이다.
이렇게 뉴욕에 드나들면서 그는 본격적 변화를 겁내지 않고 과감하게 혁신적인 색상의 변혁을 얻을 수 있었다. 그것은 단순미와 원색적인 색채의 하모니로 완성되었고 과거의 중성적이며 거칠게 마무리한 기법의 풍경도 이후에는 더 집약적으로 단순화하여 빛을 발했다.

마침내 그의 회화는 1940-50년대 뉴욕의 색면회화처럼 집과 평면을 색채로 구성화 하면서 뉴욕 화단에 호의적인 평가를 얻었다.
그의 뉴욕전은 마치 샤갈처럼 뉴욕 화단에 '색채화가'로 이름을 서서히 알리기 시작했고, 이러한 바탕에는 경쾌한 색채와 정제된 붓 터치가 가장 크게 기여했다.
그리고 그의 내면에는 실제로 인종의 차별과 다름을 색채의 하모니로 조화시키는 희망과 염원을 밀도 있게 담고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1991년에서 2009년까지 김명식 작가의 작업은 풍요로운 색채와 작은 집의 배열이나 형태, 배치 이런 것들이 가장 풍부하게 형성된 시기였다.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연작들이 그의 기억 속 <집>이라는 그리움을 추상표현주의에 접목하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러나 작가는 이 스토리에 만족하지 않고 일본을 여행하고 체류하면서 또 다른 변신을 거듭했다.
작가는 2010년 2월 일본 규슈산업대학 교환교수로 건너가 일본 문화와 풍경을 체험한 보고전 형식의 전시에서 단아한 미감을 특징적으로 선보였다.
북쪽 홋카이도부터 남쪽 규슈까지 그가 여행하며 만났던 이색적인 일본의 풍경은 현장 스케치성격이 강했지만, 일본의 <집>에 관한 기억과 표현을 오래 가슴에 담아두는 소중한 계기가 되었다.
그 성과는 그가 거친 도쿄와 오사카, 고베, 후쿠오카, 삿포로, 시코쿠 등에서 초대전을 가지는 등 한국 작가로는 드물게 일본 내에서 작품 발표를 지속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그에게 이 일본에서의 활동과 여행은 작가로서 두가지 큰 의미가 있다. 
하나는 한국과는 또 다른 일본의 가지런한 주택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며 서정적인 풍경화와 단아한 주택의 모습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고 또 하나는 김명식 작가가 이 연구 파견을 계기로 해마다 빠지지 않고 개인전을 하는 중요한 작가로 대우 받았다는 점이다.
최근에 그의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초승달과 집이 있는 풍경 등도 김명식 작가의 서정성과 낭만주의적 시적 정취의 격조가 유감없이 발휘 된 것도 모두가 이 일본에서의 인연 때문이다. 
그는 정말 부지런하게도 1년 동안의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여행의 흔적과 자취를 매우 차분하고 현장감 있게 발표했다. 
김명식 작가의 가장 매력적이고 시적인 초승달이 있는 <집> 풍경의 작품은 거의 20여 년이라는 매우 오랜 역사를 헤아린다. 
1980년도 중반 이미 김명식 작가의 작품을 ‘집으로 표현한 얼굴’, 혹은 ‘얼굴을 집으로 표현’한 것으로 불리는 것은 결코 이상한 것이 아니며 그만큼 김명식 작가의 집에 관한 표현과 철학은 순결하리 만큼 일관되다.
작품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 또한 그러한 철학 속에서 부대끼며 살아가는 수많은 인종들의 삶의 모습은 작가의 결정적 철학의 배경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이스트 사이드’는 말 그대로 뉴욕의 동쪽이다. 그곳에서 작품의 소재를 얻었기 때문이며 또한 “해가 떠오르는 동쪽은 새로운 날의 시작이며 꿈과 희망을 상징한다. 작품의 궁극적인 목적은 동서 화합과 평화”라고 작가는 말한다.
우리는 이 시기 이후에 아주 중요하게 그의 작품에 등장하는 색채를 주목해야 한다. 
그 이전과의 작품과는 달리 특별하게 초록색과 붉은색이 두드러진 점에 주목 해보자. 
여가서 나는 그의 그림이 마티스의 색채 사용법의 그림과 얼핏 닮았음을 본다.  
정말로 많은 사람은 앙리 마티스의 그림에 열광하지만 사실 어떻게 마티스가 이런 그림을 그리게 되었는지는 잘 모른다. 그것은 스승 구스타프 모로의 명언을 그가 충실하게 따랐기 때문이다.
법률을 공부하던 마티스는 1891년 아카데미 쥴리앙을 거쳐 에콜 데 보자르에 들어가 구스타브 모로(Gustave Moreau)의 지도를 받으면서 마티스의 그림과 취향에 감탄하며 마티스가 앞으로 그림을 단순화 시켜 나갈 것을 예견했다. 
그와 동시에 “모로는 마티스에게 눈으로 본 색채를 그리지 말고 마음속으로 본 즉 상상력의 색채로 그림을 그리라고 조언했다. 바로 이것이 마티스가 붉은 실내가 있는 풍경에, 푸른색 얼굴, 푸른 누드를 그릴 수 있었고 위대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최고의 비법이었다.
김명식 작가는 마티스처럼 풍경을 눈으로 보지않고 마음으로 보아 이제 모든 색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 자유로움이 이제는 용인 집에서 꽃피고 있다.
동쪽의 햇살 가득한 용인집에서의 기도 , 이에 관한 작가의 발언을 인용 해보자.
“자연 속에 들어와 살면서 제일 먼저 보인 것이 초록이었다. 주변이 온통 그린인데 어울리는 있는 것이 뭘까 하다가 보색인 빨강색이 눈에 들어왔다. 빨강색은 정렬과 젊음 또 재화 등을 상징하기 때문에 좋아한다. 무엇보다 항상 건강을 상징하여 즐겨 쓰고 있다.” 이렇게 보면 김명식 작가가 매우 마티스적 임은 분명하다.

김명식 작가는 언제나 인류가 서로 조화롭게 어우러져 평화롭고 행복한 나라를 꿈꾸는 희망의 메시지를 그림 속에 담길 희망했다. 그 희망을 위해 지금도 변함없이 용인의 숲속 아틀리에서 그는 기도한다.
“나무들은 봄에는 꽃을 주고 가을에는 과실을 선사한다. 이들을 보면서 작업의 쉼과 동시에 새로운 에너지를 얻는 그런 공간이다. 그래서 나는 이곳을 사랑한다.” 
김명식의 용인 집은 동쪽의 햇살을 받게 지어져 온종일 햇살이 머문다. 이제 자유롭게 벗어나 자유분방한 붓 길을 화폭에서 창조하고 있다. 
'피부색이 다르더라도 부대끼면서 화합을 이뤄가야 하잖아요. 크기가 엇비슷한 집처럼 사람들이 평등하게, 평화롭게 살기를 바랍니다. “이렇게 조용하데 기도하는 화가의 기도가 아름답고 숭고하다.
그것은 ”뉴욕에 머물던 어느 추운 겨울날, 소호의 화랑가 커피숍에서 백인이 지나가고 뒤를 이어 흑인, 동양인 그리고 히스패닉 등 여러 인종이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면서……. 어느 날 전철 창문을 통해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집들이 얼마 전 커피숍에서 보던 사람들의 얼굴과 겹쳐져 보인 것이다.“ 작가는 그 집들을 미친 듯이 그리기 시작했고, 그렇게 해서 태어난 것이 ‘이스트 사이드 스토리’이다. 
즉 ‘인간’과 ‘집’이라는 두 개의 대상을 일체화시켜 태어난 것이 김명식 회화의 본질이며 진실이다. 그 집을 향한 작가의 간절한 그리움과 열망, 집을 향한 끊임없는 기도, 작가는 언제나 그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
원초적인 예술가의 기도가 그래서 그의 작품에 울려 퍼질 때 아프도록 눈물겹고 ,용인시대의 그림은 넘치는 슬픔처럼 아름답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하단 정보

FAMILY SITE

03015 서울 종로구 홍지문1길 4 (홍지동44) 김달진미술연구소 T +82.2.730.6214 F +82.2.730.9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