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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 코르뷔제의 충격적 형태, <롱샹 성당>

김종근

르 코르뷔제의 충격적 형태, <롱샹 성당>

오직 자연만이 인간에게 영감을 준다. 자연만이 진실이다. – 르 꼬르뷔제(1887~ 1965.)

“돌, 나무, 콘크리트의 재료를 이용하여 집들과 궁전들을 만든다. 이것은 건설이다. 천재성이 작동하고 있다. 그러나 당신이 나를 감동시키면 나에게 좋은 것을 해준 것이다. 나는 행복하고, '아름답다'고 말한다. 이것이 건축이다.' 
(건축을 향하여, 1923)-르 코르뷔제

'건축은 빛 안에서 덩어리들이 함께 펼치는 훌륭하고 위대하며 올바른 연극이다.“

'공간과 빛과 질서. 이것들은 빵이나 잘 곳만큼이나 인간에게 필요한 것이다.'
'주택은 살기 위한 기계이다.' 
(건축을 향하여, 1923)


'오늘날 깨어져 버린 사회적 안정을 해결할 열쇠는 건물의 문제에 있다. 건축이냐 혁명이냐.'
(건축을 향하여, 1923)

'현대의 삶에는 집과 도시의 새로운 평면이 필요하고, 이를 기다리고 있다.' 
(건축을 향하여, 1923)

''양식들'은 거짓말이다.' 
(건축을 향하여, 1923)

'건축이냐 또는 혁명이냐. 혁명은 피할 수 있다.'
(건축을 향하여, 1923)


챈스토론은 (Chensteron)은 말했다. ”예술은 인간의 서명이라고, 그러나 그 모든 위대한 예술가들의 서명인 작품속에는 신을 향한 숭고한 종교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르네상스 시대 예술가들의 가장 중요한 후원자는 교회였다. 그리하여 당대의 뛰어난  최고의 미술가들은 교회를 위해서 봉사했고, 자신들의 최고의 걸작들을 종교의 계율과 세계 속에서 탄생시켰다.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미켈란젤로가 그들이었다. 
그러나 신을 향한 사역의 일은 언제나 아름답다. 이제 우리는 무신론자를 자처한 한 건축가가 만든 성당에 주목 해야 한다, 그 이름은 롱샹 성당(노트르담 뒤오).
이 성당은 스위스와 독일의 국경 근처 프랑스 벨포르에서 북서로 약 30km, 롱샹은 작은 마을의 언덕에 세워진 순례를 위한 하나의 교회에 불과 했다.  

그러나 바로 이 건물이 세기의 건축가 르 꼬르뷔제의 20세기 가장 빼어난 종교 건축물의 대표적 상징물이다. 샤를르 에두아르 잔레 그리(프랑스어:Charles-Édouard Jeanneret-Gris) 또는 르 코르뷔지에 (Le Corbusier, 1887년 ~ 1965년)는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작가이며 현대 건축에 가장 큰 공헌을 한 인물이다.
30대에 프랑스 시민권을 얻어 현대 디자인의 이론적 연구의 선구자이며 밀집 도시의 거주자들의 생활환경을 개선하는 데에 그의 인생을 바쳤다. 50여 년 동안 중앙유럽은 물론 인도, 러시아,미국등에 건물을 만든 동시에 도시 계획가이자, 화가, 조각가, 가구 디자이너였다.현대건축의 아버지, 르꼬르뷔제가 말년에 그의 혼을 불어 넣어 완성한 건축물. 건물 전체를 휘감는 압도적인 아우라와 기하학적인 형태, 자연광만을 이용한 성당 내부의 신성한 분위기를 만나게 되면 이 건축물이 왜 20세기 최고 건축물중 하나인지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그가 만든 역사적인 작품인 롱샹 성당은 작은 언덕에 파격적으로 자리한 이 성당은 무엇보다 배를 뒤집어 놓은듯 한 형태에 그 놀라움을 준다. 그가 결정적으로 영감을 얻은 것은 게의 껍질과 비행기 날개의 지붕 구조물이 원천이었다. 물론 이 아이디어는 1946년 뉴욕부근의 롱아일랜드 해안에서 발견된 게의 껍질에서 비롯 되었다.   
르 코르뷔제는 '빛! 나는 티볼리에서 고대로마 동굴의 그와 같은 무언가를 착상하게 되었다“ 고 회상 했다. 그는 이 때 이미 롱샹 언덕의 성당을 꿈꿔 왔는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1930년 롱샹을 위한 최초의 스케치가 이루어지고 그로부터 20년 후 성당은 완성 되었다.
휘돌 듯 올라가는 지붕의 형상과 독창성은 르 꼬르뷔제의 명성처럼 많은 찬사와 감동을 불러 일으켰다.  
물론 정작 그가 여기에서 보여주고자 했던 강력한 상징은 헌정사에서도 말했듯이 노아의 방주의 이미지이다. 그것은 바로 구원을 의미하는 상징적 형태의 메시지인 것이다.  
'롱샹에서는 미사를 하는 외에 아무런 제약도 없었다. 완벽하게 자유라고 해도 좋은 건축이다.'  이렇게 자유로운 성당은 성모마리아에 대한 예배와 1년에 두 번 1만 2000명이 이 언덕에 올라 기도를 올리는 순례자들을 위한 교회가 되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우리들의 예상을 뒤엎는 긴장감과 구성은 성당 내부로 이어진다. 성당의 내부 성모상들은 하얀 벽으로 이루어진 분리된 벽면에 중심에 위치하고 있다. 인간영혼을 구원하는 성모상이 이렇게 자리하는데에는 이 성당의 특이한 점 때문이다.
모든 빛의 사용에 있어 전기조명 없이 자연채광에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금욕적인 태도로 어우러진 조형성과 내부의 충만한 성스러움은 그 공간을 아우르는 찬란한 빛의 수용으로 신비함과 바로크적인 아름다움의 가치로 더욱 우리들을 숙연하게 하고 성스러움을 빛나게 하고 있다. 스미스(P.F. Smith.1979)는 이 롱샹의 성당을 고도의 복합성과 모호함으로 '20세기 최상의 매너리즘 건축' 이라고 칭하기도 했다. 이미 내부의 설치나 공간의 분할에 있어 새로운 모델을 제시한 「롱샹 성당」은 몇 개의 덩어리들로 구성된 풍부한 양감을 갖는 조각들로 통일된 분위기가 아름다운 공간과 형태를 지배하고 있다.  
남쪽의 불규칙한 크기와 형태의 창문에 만들어진 스테인드 글라스의 환상적인 빛은 성당의 공간을 신비스럽게 연출하고 있다.  시멘트를 부어 만든 독서대와 쇠를 두드려 붙인 난간등 그 모든 것들이 너무나 자연스러우면서 조형성이 순례자들의 발길을 붙들고 있다.  
두꺼운 벽에 불규칙적으로 뚫린 색 유리창을 통해 들어오는 오색찬연한 빛, 그 안에 설치된 성 미술품도 독창적인 예술가들의 작품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특이 했다.

이외에도 십자고상, 십사처, 유리화 등 성서를 주제로 한 장식이 콘크리트로 만든 형태의 내부 공간은 자연 광선과 만남으로 마치 이 성당이 예술작품으로서 가능한 인간과 신의 만남을 보여주는 최고의 공간으로 믿게한다. 
그래서 이 성당은 어지러운 “ 장식이 없는 순수함, 공간을 비우는 현상이 성스러움을 표현하는 좋은 예”가 된다. 안정되고 균형잡힌 조형적인 효과와 정신의 집중, 명상을 위한 그릇을 만들었다는 평가는 결코 과찬이 될 수없다. 
그 빛들은 예배실을 신성한 장소로 바꿔 놓으며 정면이 없이 모든 방향에서 시각적인 조화가 풍부하게 이룬 참다운 성 예술품이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르 코르뷔지에가 벽면을 흰색으로 처리하고 자연의 빛에 대해 특별한 관심을 쏟음으로써 결백과 '순결한' 마리아의 전통적인 상징을 표출시키고 있음을 주목해야 한다.  
이 성당은  '화려하면서도 괴팍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성당은 중심과 통로의 성공적이고 창조적인 종합을 이룩한 것으로서 성 소피아 성당과 비견될 수 있는 작품이라고 사람들은 말한다. 
무엇보다 성당 내부의 자연과 조화된 조형성과 빛의 효과적인 수용에 의한 신비함은 이 건축의 가장 큰 아름다움으로 지목된다.  
전체적으로 여러 장소에 다양한 색상과 유형을 부여 하고 있는데, 작은 채플들에서 이러한 그의 기술을 엿 볼 수 있다. 르 코르뷔지에가 화가로서의 경험을 살려내고 있는 것이다.  

롱샹 성당은 고딕 성당이나 피어쩐하일리겐 성당처럼 '종합예술작품'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것은 조형 문제에 그치지 않고 침묵의 장(場), 기도의 장(場), 평화의 장(場)으로부터 우러나오는 기쁨의 장(場)을 한 무신론자가 신을 향해 헌정하고 바친 마지막 창조인 것이다. 
마리아상을 외부성당의 초점에 고정시키려는 자세도 그래서 더욱 주목 할 만하다.  
롱샹의 교회를 봉헌한 부산손 대주교가 표시한 감사에 대해 르코르뷔제는 눈물을 흘릴 만큼 감격하지 않았던가. 이처럼 50년이 지난 오늘날 세계 건축에 롱샹성당에 대한 인기와 화제는 여전히 그치지 않고 있다. 그것은 움직임과, 휘어진 힘을 감춘 형태, 생동과 파격에 치우친 질서 때문이다.  

르 코르뷔지에는 궁극적으로 '깊은 몰아와 명상을 담과 있는 커다란 배'를 만들어 내는 것에 목표를 두었다고 한다. 결국 롱샹성당은 르꼬르 뷔제 건축의 최고 걸작으로 조형적인 파격과 혁명으로 전 세계에 충격을 준 세기의 종교적인 예술작품이다.
1965년 8월 27일 르 코르뷔제는 의사의 지시를 무시하고 지중해로 수영하러 갔다가 익사했다. 그의 나이 77세로 심장 발작을 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의 장례식은 1965년 9월 1일 루브르궁 마당에서 치러졌다.
르 코르뷔제의 사망은 문화와 정치에 큰 충격을 주었다. 전 세계적인 경의가 이어졌고, 화가 살바도르 달리와 같은 그의 예술계의 적들도 그의 중요성을 인정했다. 그리고 미국의 대통령 린든 존슨은 '그의 영향은 전 세계적이고 그의 작품들은 우리 역사상 매우 적은 예술가들만이 갖고 있는 영원한 특성들을 갖고 만들어졌다.'고 말했다. 소련은'현대 건축은 가장 위대한 거장을 잃었다.'라고 덧붙였다. 

남프랑스의 로크브륀카프마르탱의 그의 묘지에는 매년 관광객들이 찾는다.
미국을 대표하는 로버트 벤츄리(Robert Venturi), 케빈 로쉬(Kevin Roche), 프랭크 게리(Frank O. Gehry)와 함께 백색건축가로 알려진 리차드 마이어(1934-)는 대학 재학시설부터 흠모했던 르코르뷔제를 만나 사무실에서 일할 것을 부탁하면서 '내가 르코르뷔지에의 작품을 모르고 애정이 없었다면 나의 건축물을 만들지 못했을 것입니다. 나는 그가 공간을 창조하는 방식에서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라고 고백하고 있을 정도로 영향은 절대적이었다.‘위대한 천재는 스스로 만들어간다’


김종근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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