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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조각의 운명을 바꾼 발딧치니 세자르 (1)

김종근


김종근의 위대한 예술가의 명언
‘현대조각의 운명을 바꾼  발딧치니 세자르( César Baldaccini,1921 ~ 1998) 1부’ 

김종근 미술평론가

‘ 조각이란 고기 잡는 일과 같다, 내가 고기를 잡을 때 나는 모른다. 고기가 잘 물릴지, 그러나 나는 언제나 가장 큰 물고기가 물릴 것이라고 희망한다. 조각가는 건드리는 것에 민감해지게 된다. 조각이란 이와같이, 재료( Matière)에 관해 즉흥적으로, 나는 마티에르를 건드린다..... 가장 큰 고기가 물릴 것을 기대하면서 ‘ 


아름다운 여자를 좋아했던 세자르
1998년 12월 6일 , 프랑스의 유명한 일간지 그리고 방송들은 한 예술가의 죽음을 머릿기사로 올렸다
그들은 대부분 이렇게 시작 되었다. “세자르 죽다” “프랑스가 낳은 세계적인 조각가, 등등 그리고 연이어 금세기의 가장 유명한 한 조각가의 삶과 예술, 그 생애를 재조명하기 시작 했다.
TV에서는 살아 생전의 인터뷰 기사들이 연이어 방영되었고 그는 전부터 암에 시달린 것으로 알려져 그의 죽음은 많은 문화예술계 사람들을 슬픔에 빠뜨렸다.
내가 만난 그는 아주 키가 작고 마음씨 좋은 할아버지였다, 우리에게는 엄지손가락으로 더 유명한 그를 작년 6월 초 파리의 <쥐드 폼 미술관>에서 오픈닝 있기 전 중국계 동양화가 자우끼와 함께 만났었다.
그는 그 특유의 소박한 잠바 옷차림으로 나에게 한국인 친구라며 친절하게 도록에 내 이름을 쓰고 그 아래에 Amitié ‘우정’ César 라고 싸인을 한 후 네게 건네주었다. (아마도 그때 그는 1996년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전시 했던 모습을 회상하는 듯했다)
표정은 밝았지만, 그때 그는 매우 긴장하고 있었다. 그가 그토록 기다렸던 회고전이었기 때문이었을까 76살이라는 나이 탓이었을까. 다소 피로하면서 지친 듯한 모습이 가득했다.
그는 오래전부터 그의 작업 30년이라는 회고전을 그랑팔레에서 가질 수 있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보수공사로 인해 그의 그랑팔레 전시에 대한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대신 누보레알리즘의 뛰어난 이론가이기도 했던 다니엘 아바디가 관장으로 있는 쥐드 폼 미술관에서 성황리에 열렸다. (1997년 6월 10 - 10월 19일)
그러나 그의 이런 대대적인 회고전은 프랑스가 낳은 최고라는 조각가의 회고전으로서 큰 관심과 성공을 거두었지만, 그는 ‘ 전시 작품선정에서 부터 디스플레이, 설치에서까지 자신의 의사가 반영되지 않아 매우 힘들었다.’ 고 후에 평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밝혔다.
언젠가 피에르 레스타니는 평론가로서 한때 누보레알리스트의 멤버의 막역한 친구로서 세자르를 두고 사석에서 이렇게 투덜거렸다.
옛날에는 세자르가 우리 집에 와서 매일 만나곤 그랬는데 이제는 그들이 세계적으로 유명해지니까 너무 바빠 내가 그를 만나기가 너무 힘들다고 불만을 털어놓았다.
그러던 세자르가 이제는 아주 세상을 떠나 더욱 레스타니의 원망과 볼멘소리를 들을는지도 모른다, 아니 이제 그를 영원히 다시 볼 수 없게 되었다고 말이다 
그는 무엇이든 다 그리고 열심히 끊임없이 뒤돌아보지 않고 작업에 생애를 바쳤던 사람이다, 그런 세자르도 여느 뛰어난 예술가들이 흔히 그랬듯이 아름다운 미인들을 좋아했고 가까이했다.
또한, 그는 파리 사교계의 빠지지 않는 중요한 한사람이었고, 그래서 그를 이야기할 때마다 그가 가까이했던 미녀들의 모습이 늘 함께 따라 다녔다.
프랑스 영화의 상징으로 최고의 프랑스 영화인에게 수여하는 그의 이름을 딴 ‘세자르 상 ’ 트로피로 알려진 수상자였던 바넷사 파라디스 , 그리고 영화배우 브룩 실즈를 위해 특별히 제작한 압축 작품- 보석 등, 에바 에르지고바 그리고 한때 그의 학생이었던 그러나 동반자로 열렬하게 사랑했던 25살의 스테파니아와의 스캔들도 세자르의 여성 편력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고 있다        

타고난 예술가로서의 세자르의 어린 시절  
원래 그의 가족은 이탈리아의 토스카느 지방 출신으로 1887년 프랑스의 마르세이유로 이민을 왔다.
그는 1921년 1월 1일 프랑스 남부의 대표적인 항구도시인 마르세이유에서 아버지 오메르 발딧치니와 어머니 레리아 마그나니와의 사이에서 아르망딘과 쌍둥이 남매로 태어났다. (그래서 1995년 그의 미술관이 마르세이유에 세워졌다 )
그는 이민자들이 모여 사는 벨드 메 지역에서 태어나, 아버지는 포도주 도매상을 경영했고, 그의 주변은 특별히 예술적인 환경은 아니었지만, 그의 재능은 일찍부터 눈에 뜨인 것으로 소문이 자자 했다. 
12살 때 그는 그의 삼촌을 모델로 한 첫 번째 조각작품을 남기기도 했고, 14살 되던 해 그는 조각가 미켈란젤로의 이름을 들었다, 그가 바로 토스카느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큰아버지는 15명의 아들과 하나의 딸이 있었는데, 그의 삼촌 중에 예술가가 하나 있는데 그의 이름도 세자르였다.
14살이라는 어린 나이 때부터 그가 만든 눈사람들은 이미 주위의 주목을 받기 시작했고, 그의 탁월한 소질을 보고 미술학교에 보낼 것을 권유하여 어머니는 그를 마르세이유 미술학교에 보냈다. 
그는 매일 저녁 미친 듯이 작품제작에 열중했고, 그것이 그에게는 유일한 낙이었다고 회상했다. 이런 그의 열정은 마르세이유 미술학교에서 1936-37년 뎃상 1등상 , 판화1등상, 건축1등상 등을 모두 휩쓸어 장차 대성할 예술가로서 화제를 뿌렸다.
일찍부터 천부적인 예술가로 타고났다고 불린 그는 1943년경 가르갈로라는 Gargalo 조각가의 철 작업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1946년 그는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를 위해 그의 부인을 두고 파리에 혼자 올라왔고 그녀와는 13년 후 이혼을 했다.
그가 머물던 물랭 베르(푸른 풍차) 거리의 집에서 그는 같은 건물에 살고 있던 유명한 조각가 알베르 쟈코메티와 교류하게 되었다.
파리의 에꼴 데 보자르에서도 세자르는 아주 독창적이고 야수 같은 그러면서도 완벽하여 교수가 손을 볼 필요가 없을 정도로 벌써 놀라운 재능을 보였다고 그의 동료 미쉘 기뇨는 증언하고 있다.

‘조각은 낚시질’ 이다    
1954년 그의 초창기 작업은 그가 이탈리아에서 잠시 체류하면서 강렬하게 인상을 받았던 폼페이 유적의 인상을 묘사한 ‘폼페이의 앉아있는 나부’ (1954 )를 비롯한 ”의자에 앉아있는 사람“ , ”토르소“ ,”인체“ 등을 주요 모티브로 거칠게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했다.
이때의 작업들은 대부분 고철이나 쇳조각 등 부품들을 모아 용접한 것으로 이미 한 관점에서는 고전적인 조각의 개념과 방법을 상당히 벗어나 보여주고 있다 
이런 그의 작품재료의 원천은 그가 한 인터뷰에서 ‘ 매주 월요일 벼룩시장에 가서 고물이나 못 쓰는 부품을 가져다가 쇠를 붙이거나 용접을 했다.’라고 술회한 것처럼 벼룩시장이었다 
그가 주워온 못 쓰는 쇳덩이들은 모두 곤충이나 동물, 전갈이나 모기, 쥐, 새, 닭, 고양이 등으로 다시 새롭게 태어났다.
이 상당수 작품의 구성 기법은 물론 기본적으로 그가 해오던 용접과 땜질로 구상성 즉 형상성을 많이 의식한 것들이었다.
그의 이런 작품제작 기술법은 1954년경부터 빌따뇌즈 공장에서 철근이나 고철 조각들을 용접 땜질하는 기술들을 익힌 것에서 비롯하였다. 이때 터득한 기술과 환경들은 후에 그의 작품제작에 두 방향을 가름짓는 결정적인 계기를 가져다주었다.
하나는 그가 브론즈나 대리석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조각가로서의 물질과 재료에 관한 관심을 고물상의 폐품이나 고철 등으로 대체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스스로 ”재료의 협잡꾼“이라 불렀다.
또 하나는 가난하고 무일푼이었던 그에게 이런 쇠 부스러기나 쇳조각, 고철들의 용접은 당시 ‘떠내는 조각’에서 ‘붙이는 조각’이라는 더없이 훌륭한 현대조각의 한 영역을 벗어나게 했다.
이것은 바로 새로운 재료와 기술을 통한 조각의 새로운 미학을 추구하는 작가로 그가 부상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 해주었다. 
그는 조각을 늘 고기 잡는 일에 비유했다 , ”내가 볼 때 조각이란 고기 잡는 일과 같다, 내가 고기를 잡을 때 나는 모른다. 고기가 잘 물릴지, 그러나 나는 언제나 가장 큰 물고기가 물릴 것이라고 희망한다. 조각가는 건드리는 것에 민감해지게 된다. 조각이란 이처럼, 재료( Matière)에 관해 즉흥적으로, 나는 마티에르를 건드린다..... 가장 큰 고기가 물릴 것을 기대하면서“ 
조각이라는 것이 무엇이가에 관해 그가 명료하게 대변한 낚시꾼의 비유는 작가가 어떻게 창작에 이르게 되는가의 과정을 명징성 있게 보여준다. 이는 그가 어떤 재료를 만났을 때, 그는 그것이 걸어와 무슨 모양이든 떠올라 만들어져야지 조각이 된다는 것이다.
그가 조각가를 고기 잡는 일에 비유했듯이 그는 1955년 처음으로 살롱 드 메에 그가 잡은 ‘물고기’를 출품해 주목을 받았다.
이 작품은 물고기의 한 단면을 각종 쇳조각으로 용접해 붙인 작품으로 고기의 리얼리티한 단면 모습을 인상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의 작품제작에 적지 않게 영향을 끼친 사람은 무엇보다 피카소였다. 그는 언제나 피카소가 말한 ‘해라 무엇이든 해라 문제는 무엇이든 해야 한다.’라는 좌우명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런 그를 1956년 그는 미술사가이면서 컬렉터였던 더글라스 쿠퍼의 집에서 피카소를 만났다. 피카소는 그의 조각을 보면서 사고 싶어 할 정도로 그의 작품을 인정했고 좋아했다. (두 예술가가 상의를 벗고 있는 사진을 참조)
세자르도 피카소를 아주 존경했고, 그는 피카소를 위한 작품을 두 번씩이나 제작했고, 또 피카소는 그를 위해 전시 서문을 써주기도 했다. 피카소는 이미 그때 그의 작품에 대해 훌륭한 작가로서의 가능성을 예견했다.
그는 무일푼의 청년에다, 드세기로 이름난 항구도시 마르세이유 시골뜨기는 비로소 국제적으로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그의 나이 35살. 베니스 비엔날레에 프랑스 대표로 베르나르 뷔페와 함께 출품했는데, 실로 이것은 세계무대를 향한 그의 첫 번째 무대가 되었고 그의 이름이 세계에 알려지는 전환점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그때까지도 파리의 늙은 에꼴 데 보자르의 학생 신분이었다.

파문을 불러일으킨 자동차의 압축 
그로부터 3년 후 이미 피카소가 ‘아주 중요한’ 전시라고 썼던 1959년 끌로드 베르나르 전시는 그에게  큰 성공과 명예를 가져다주었다. 
이 시기의 그는 이런 동물작업 외에도 인물들을 주제로 한 작업도 적지 않게 만들었다. 피카소에게의 헌정, 니꼴라 드 스텔 , 미쉘 따피에의 초상 , 풀밭 위의 식사 등이 대표작인 그의 인물들이다.
이 작품들은 그 신선함으로 관심을 끌고 있었다. 당시 1950년대의 회화는 쟝 포뜨리에가 ‘인질’ 등의 작품을 제작함으로 전후의 앵포르멜이 시작되고, 쟝 뒤뷔페는 두터운 질감의 작품을 제작하던 때였다. 그러나 아직도 ‘조각은 물질에 관한 관심을 버리고 여전히 전통적인 방법으로 작업’을 하는 시기였다. ( Andreas Franzke ) 
미술계에서 그의 파문은 1960년 살롱 드 메 (Salon de Mai) 에서 일어났다. 세자르는 처음으로 폐차장에 있는 세대의 고물 자동차를 눌러 만든 세 개의 압축 조각을 출품하여 커다란 찬사와 야유 등 논란을 불러일으켰다.
그냥 자동차를 눌러 만들어 놓은 이 작품을 보고 사람들은 ‘조각에 대한 침해 ’ 또는 ‘광고를 위한 행위’ 등등으로 그의 작품은 시비와 논쟁을 일으켰다. 
그것은 마치 마르셀 뒤샹이 변기를 하나의 <레디메이드>로 인식하고 전시장에 놓는 혁명가처럼 자동차를 하나의 오브제로써 압축시켜서 갖다 놓은 것에 사실 불과했다.
그러나 이 작업 이후 그는 모든 사물, 종이 상자건 깡통이건 모든 오브제들을 누르는 ‘압축의 시대’를 열어놓았다. 
그의 작업에 의미는 실제 작업에 참여하는 것보다는 작업의 현장에 ‘있었다’( assistait ) 는 의미도 중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실로 큰 모험이었다. 그는 그가 쌓아왔던 작업의 방향에서 일탈하여 ‘압축’이라는 새로운 형태와 모험으로 돌아섬으로써 50년대~60년대 초기 ‘용접’과 ‘압축’ 의 시대라는 독자적인 세계를 이룩 그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작업으로 평가받을 수 있었다. 
그의 이러한 오브제에 대한 용기와 모험은 무엇보다 세자르의 뒤늦은 누보레알리즘 그룹 참여의 영향으로 분석된다.

 - 2부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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