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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위한 말걸기- 장영애의 여인과 장미

김종근

행복을 위한 말걸기- 장영애의 여인과 장미

김종근 (미술평론가)

“지속 가능하고, 사라지지 않는 행복이 super-happy라면, 그런 행복은 존재합니까? ”
“네 맞습니다. 행복한 감정 자체가 어떤 정점에 도달하는 것이라면 잠깐의 극도의 행복감은 존재하겠지만, 분명 super-happy는 아닐 것입니다. 
장영애는 이렇게 묻고 답한다. 그림을 그리는 명확한 이유를 알 수 있는 발언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림을 그리는 일은 사실 자신과 쉼 없이 대화하는 일이다. 
창작은 분명 이렇게 슈퍼로 행복해지기 위해 타인에게 말을 건네는 아름다운 그러나 힘든 행위이다. 
장영애의 그림 그리기는 자신의 행복을 찾아가는 최적의 방법이자, 최고의 선택인 것이다.
그녀의 말 걸기 작업은 벌거벗은 여인의 몸짓으로부터 시작한다.
고개를 갸우뚱하게 숙이고 팔을 고인 채 아주 길게 땅바닥까지 늘어뜨린 팔<sound of silence>, 그 여인의 몸 앞에 심어진 장미 <beside You>. 장미가 가득 심어진 꽃밭 아래 편안하게 누워있는 만삭의 여인 <warm ocommunication> , 
해바라기를 가득 안고 있는 벗은 여인<weight of silence>. 푸른 장미꽃을 든 여인, 입을 삐쭉 내밀고 장미꽃잎을 머리에 뿌려둔 여인<glance of women>. 이 모든 여인이 목을 길게 늘어뜨리며 한결같이 모두 장미를 들고 있다. 우리가 장미를 그냥 예사롭게 꽃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이유이다. 
그녀는 벗은 여인과 장미로부터 이야기를 풀어낸다. 그리고 여인은 모두 다 장미와 밀접하게 결합 되어 있다. 장미를 목에 두르든가, 머리에 올리든가 장미꽃을 입에 물든가.

예로부터 보편적으로 장미는 사랑과 로맨스의 상징으로 열정과 욕망 기쁨 아름다운 사랑으로 상징된다. 그러나 때로는 따뜻함, 사랑과 용서의 상징으로도 표상되며 관능적 사랑과 위험한 유혹으로 대표 된다.
어쨌든 이 장영애의 심하게 변형된 인간 형태에 놓인 늘어진 여인의 팔과 장미의 상관관계로서 메타포는 분명하다. 이것만으로 그녀의 그림은 충분히 여러 가지 이야기를 지닌 은유적 스토리가 작품 속에 숨겨 있다. 
알 수 없는 향기를 품어내는 야릇한 여인의 표정과 그 제스처가 장미와 지속적으로 결합하여 등장한다. 장미는 적어도 작가의 내면이나 욕망을 드러내는 확실한 주체 사이에 놓인 중간지점의 메타포이다. 
작가는 그 메타포를 자신의 어떤 프레임 속에서 해방시키는 표현의 도구로 끊임없이 활용한다.
그 해방의 욕구 속에 담겨있는 이것은 아마도 작업 노트에서 고백하듯이 삶에 대한 불안이다.
누구나 불안은 있다. 그 일상적인 현실이 주는 삶의 원초적인 불안인지 개인이 갖는 특별한 불안인지는 명료하진 않지만, 그 불안은 사랑에 대한 벗어날 수 없는 불안감으로 해석된다. 
” 남들과 같은 방식의 삶을 벗어나면 큰일이 날 것 같은 불안감이 나를 붙잡고 있었다. 나의 모습을 꺼내어 놓는 일“ 이 바로 장영애의 작업의 본질이자 속성이다. 
작가에게 작업을 전시하는 일은 이렇게 자신의 모습과 치부를 거침없이 깊은 몰입과 시간으로 쏟아내는 말 걸기이다.작가는 나의 결핍이 무엇이고, 그것으로 인한 나의 갈망과 욕망이 무엇인지 들여다보는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슈퍼 해피로의 과정이고, 첫 전시였다고 회상한다.
이러한 형식들은 애수 어린 사춘기의 서정적 사랑 같은 것을 담고 있지만, 관능과 우수를 강렬한 장미와 여인으로 옮겨 놓은 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여기서 장영애 작가의 독자적인 세계가 확립되고 있다. 작가는 미술작품에서의 가장 중요한 덕목을 내면에 눈을 마주치며 소통을 하는 것으로 간주한다.
그 안에 삶의 불안 고통 그리고 그것이 대상과 긴밀하게 소통하는 지점에서 행복을 찾고 있다.
또한 그녀는 그림을 통해서 진정한 소통을 꿈꾼다. 그리고 이 소통이 그녀를 행복하게 한다.
그러나 여전히 그녀의 소통은 목이 마르고 불완전하며 완벽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녀가 장미꽃을 안고 수 없이 소통을 시도하지만, 그것은 시지프스 바위처럼 또 다시 그녀에게로 되돌아온다. 그런데도 그녀는 super-happy를 위한 소통을 감행한다. 이것이 그녀의 그림 그리기이며 우리를 향한 말 걸기이다.
이번 작품 특징 중 강하게 나타나는 두 가지 수법이 그녀가 말하는 말 걸기의 고백이자 수사학이다. 하나는 화면에 등장하는 인물의 다양한 구성과 형태이다. 그러나 그 인물들의 묘사는 하나같이 독특하게 인물 가운데 구멍이 뚫려 있거나 얼룩이 드리워져 있다.
그뿐 아니라 형태도 심하게 왜곡되어 있다. 특히 목이 길게 늘어진 인물들에서 조차도 연인과 포옹에서도 결핍된 그로테스크한 감정이 노출된다.
마치 '나도 내 작품을 다 이해하는 건 아니다'라고 말한 영국의 화가 프랜시스 베이컨처럼 장영애도  
자유로운 해석의 여지와 여운을 슬며시 보여준다. 장영애는 인물이란 대상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녀가 가진 불안의 형상을 그리기 때문이다. 그것은 자기몰입으로 자신의 모습과 대면하면서 부딪치는 갈등으로서의 ‘결핍의 초상’인 것이다. 그 갈등의 순간에 작가는 대금을 분다고 했다.
그러면서 작가는 숨을 쉬고 느끼며 아파하고 사랑하는 살아있는 존재를 그려야 한다는 뭉크의 일기에 격하게 공감한다.
그러나 아주 분명하게 자신의 고뇌를 충실하게 소통하고자 하는 장영애의 그림은 이미 독특한 인물 표현과 장미의 모티브로 자신만의 독자적인 언어를 구축해 놓았다.
 ‘나’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자신을 돌아보길 바라는 마음으로 그림을 그렸다면 지금 그녀는 연못에 비친 자신을 보려고 애썼고, 그 초상이 현재 장미꽃 앞에 여러 가지 얼굴로 서성이고 포옹하고 궁금해하는 모습이다. 이것이 장영애가 보여주는 작은 거울이다.
장영애 회화의 가장 큰 매력과 특징은 그것이 무엇이든, 어떤 형태든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여주고자 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이 회화의 가장 큰 힘이며 소통을 원하는 예술가가 지닌 가장 이상적인 메시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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