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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사동, 내 평론가 삶과 청춘의 고향

김종근



인사동, 내 평론가 삶과 청춘의 고향


김종근 | 미술평론가, 전 홍익대 겸임교수

사람들에게는 모두 두 개의 고향이 있다. 하나는 자신이 태어난 영원한 육신의 고향이며, 또 하나는 자신을 성장 시킨 정신과 영혼의 고향이 아닐까 싶다. 나에 육신의 고향은 충청북도 괴산으로 아주 시골이다. 지방에서 미술대학을 나온 나에게 그래서 인사동의 화랑가 거리는 언제나 내게 그리움과 동경의 대상이기도 했었다. 물론 형님이 인사동에 목우회 단체의 사무국장을 맡고 있어서, 20대 초반부터 나는 종종 인사동을 들락거리면서 당시 내놓으라 하는 권옥연이나 변종하, 장리석, 황유엽 작가등 원로 작가들을 수없이 만날 수 있었다. 물론 인사동에 줄지어 있던 국제화랑이나 표화랑 선화랑 가나화랑 그리고 지하에 있던 금호미술관과 관훈미술관은 당시 내가 즐겨 들렀던 미술의 중심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와 화랑, 표구점 등의 미술품 관련 상점들이 이곳으로 집중되면서 화가들은 이곳에서 인사동은 현재와 비슷한 문화의 거리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골동품가게며, 작은 구멍가게 같은 화랑, 표구, 필방, 전통공예품, 전통찻집, 전통음식점 등이 집중되어 있는 인사동이었다. 그리고 우리가 드나들었던 식당은 늘 새밥을 해주면서 생태찌개로 화가들을 맞아주던 아직도 그 정취를 간직한 부산식당이었다. 

거기서 나는 80년대의 많은 화가들을 만났고 그들의 예술과 영혼을 함께 나눌 수 있었다. 그 젊은 작가들 가운데는 안창홍, 최민화나 이흥덕, 정복수 ,문영태,박불똥 그리고 장경호 같은 작가들이 함께 있었다. 그 가운데는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한 최경태나 정진윤 같은 작가도 있었다.

그 가운데 내가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작가 중 한사람이 강용대와 최경태 화가이다. 강 작가는 홍익대 미학과 대학원에 재학중인 나에게 언제나 선배 화가들을 소개 시켜주며, 미술평론 활동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줄기차게 장려했다. 장경호 작가도 부추키고 도와주었음을 빼놓을 수 없지만. 강용대 화가는 빼어난 미술이론과 지식으로 내게 많은 미술에 대한 영향을 그래서 더욱 켤코 잊을 수 없는 작가 중에 한사람이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그토록 그리려 했던 밤하늘에 별을 그리더니 독일 유학후 갑자기 하늘에 별이 되어 밤하늘에 쓸쓸히 홀로 빛나고 있다. 그는 작은 체구에 언제나 담배를 물며 청파동 집에까지 재워 주면서 작가들의 삶과 실체 등 많은 것을 내게 일러주었다. 그 중에 같은 또래의 약간 어린 작가가 있었는데 그가 최경태이다.

특히 최경태 작가는 곤궁한 삶 가운데도 당시 민중의 삶에 큰 관심을 갖고 거친 80년대의 사회 풍경과 현주소를 치열하게 담아낸 화가중 하나였다. 초기에는 현실 참여적이며 비판적인 작업을 했지만, 후에는 여고생 시리즈로 걸어두기 곤란한 포르노성 작품으로 미풍양속을 해치고 풍기 문란죄에 속하는 화풍으로 완전히 전향했다. 그리하여 보라 갤러리에서 하던 전시중에는 그림을 압수당하여 모두 불태우는 등 많은 우여곡절을 거쳤다. 다행히 나는 그의 포스터 그림을 전시가 열리자마자 사두어서 겨우 소각은 면했다. 한 때 나는 그의 이런 치열한 작업과 작가정신이 멋있어 당시 음성 읍내 작은 2층 화실에 그를 찾아갔다. 그는 희망사항이 서울근교에서 작업하기를 강렬히 희망했다. 그래서 나는 양평에 아틀리에를 조그마한 집을 사서 그가 입주해 그림을 그렸다. 나는 없는 돈에 집을 사서 그에게 몇 년간 작업실을 거의 무상으로 빌려주었다. 이후에도 골프 사업하는 친구의 도움과 음악 사업을 하는 극성팬의 백여 점을 컬렉션 하면서 드디어 강화도에 그만의 아틀리에를 지어 안타깝게 유명을 달리할 때 까지 머물렀다.

그래서 나는 1년에 두세번 방문하여 안부를 묻고 막걸리도 사주며, 누드 사진집도 주면서 약간의 그림을 사주기도 했다. 내가 여의치 않을 때에는 사업하는 컬렉션 친구를 꼬드껴 동행, 그림을 사두면 좋을꺼라고 약간 뻥을 치며 그림을 가져왔다. 언제나 크게 내색 하는 것을 싦어하던 최경태 화가를 위해 나는 서울전시와, 뉴욕개인 전시를 하면서 그와 더욱 가까워졌다. 그런 아프고 궁핍했던 내 청춘의 추억들이 모두 인사동에서 꾸며지고 시작되었다.

그 외에도 장애인 화가 손상기를 이야기 해야 겠다. 그가 지금은 비싼 그림값으로 인기작가가 되어 한국의 툴루즈 로트렉이라 불리었지만 80년대 그는 정말 초라하기 그지없는 외로운 작가였다. 마침 동덕미술관에서 열리던 개인전에서 손상기와 주고 받던 가슴 아픈 개인 삶의 이야기, 그리고 그 때 적어놓았던 인터뷰 내용들은 지금 읽어봐도 애틋하고 생생하고 가슴이 찡하다. 오래 이야기를 했지만 이야기가 안끝나 아현동 손잡이가 낮은 2층 화실까지 방문했던 추억이 눈에 아른거린다. 내가 학교를 졸업하고 압구정동 현대백화점 미술관에서 관장을 할 때는 화가들과 주로 수요일 점심은 인사동이었고 천상병 시인 사모님의 귀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고 업무가 끝났다. 그곳에서 조각가이자 전 국립현대미술관장이던 최만린 선생님, 산정 서세옥 화백을 만나 초밥집에서 그의 해박한 동양화론을 들은 것도 모두 인사동 카페였다. 특히 20호 정도 되는 내 초상화를 김흥수 화백께서 무료로 주면서 그림이란 이런거라고 일러주시던 곳도 낙원동 아구찜 집이고 , 설렁탕집을 들어가자 마자 40대 중반의 아줌마에게 “장모 나왔어” 하면서 도가니탕을 주문하던 60대의 권옥연 화백, 일찍 요절하여 한국화의 앞날을 어둡게 했던 소정 황창배 화백과의 인사동 밥집을 잊을 수 없다.

그러고보니 내 평론가의 삶은 그 모든 뿌리도 인사동이었고 화가들을 만난곳도 모두 인사동 바닥이었다. 그런 인사동이 이제는 중국제 기념 공예품에 탈색하고 변질되어서 너무나 안타깝고 속상하다. 그러나 어찌하랴 .다시 잘 재정비하여 인사동의 르네상스가 왔으면 좋겠지만 쉽지는 않을 것이다. 내 20대 시절의 꿈이 무르익던 곳 ,머리 희끗해져 들리는  인사동 사거리의 화랑들. 

여전히 내 고향은 인사동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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