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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부신 돌담의 아름다움에서 입체조각까지 –이필언의 예술 60년

김종근




눈부신 돌담의 아름다움에서 입체조각까지 –이필언의 예술 60년


김종근 | 미술평론가

1941년 경남 언양에서 태어난 이필언 (본명 이채언) 화백은 한국 구상미술의 흐름에서 지나칠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작가이다. 60여 년 동안 회화와 조각을 병행하며 그만의 독특하고 부조적인 회화작품을 선보이고 있는 화가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1976년 목우회 공모전의 최고상, 그리고 1977년과 1978년 연이어 프랑스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전통적인 구상회화의 공모전인 르 살롱에서 은상과 금상을 휩쓸면서 주목을 받았다. 그는 이어서 1980년에는 대한민국 국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면서 또다시 화제를 모았고 이렇게 화려한 경력을 가진 화가로 출발하여 동시에 조각을 병행한 보기 드문 작가가 이필언 화백이다. 이런 데뷔부터 눈부시게 활동하면서 조명을 받은 작가의 세계를 규정한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그럼에도 이필언의 회화적 흐름과 작품세계를 분류한다면 대략 크게 초기 구상회화로 빛을 발하며 주목을 받을 때인 돌담의 시기를 전기로 (1976년에서-1985년)까지, 그리고 입체조각과 회화를 겸한 조형 융합의 시대를 후기 (1986년 – 2000년) 그리고 2000년 이후 현재로 나눌 수 있을 것 같다.

먼저 이필언 작가의 70년대 초기 회화적 주제는 바닷가의 해녀 풍경이나 고궁의 인물들을 비교적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구상 작가로 활동했다. 그러다 1976년에는 돌담을 평면적으로 또 원근법적으로 묘사하면서, 1979년에는 드디어 돌담에 비친 고목과 그 가지들을 서정적으로 표현하여 르 살롱전에서 금상을 받은 것이다. 이후부터 그는 고집스럽게 향토적이고 향수 어린 돌담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 왔다. 실제 돌담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초가집이나 기와집 등에서 종종 발견되는 그런 풍경이다. 그래서 그 돌담 자체가 아주 특별하지는 않지만, 이미 그 담에는 오랜 세월을 지키고 담아온 담이 지닌 그 의미가 있다. 자체적으로 담은 안과 밖의 경계를 구분하기도 하지만, 또 외부에서 안을 보호하고 지켜주는 상징성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모든 역사와 풍파 속에 낡고 허물어진 과거의 그 모습 그대로를 간직하고 있는 것이 돌담의 매력이다.

그렇다면 이필언 작가가 왜 그토록 흔한 돌담에 빠져 있었는가를 밝힌 하나의 고백이 있다. “ 돌담은 예스러운 운치와 친숙한 낭만, 목가적 풍광을 자아냅니다. 투박한 형상은 선조들의 기질과 자취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민중들이 고단한 삶과 굴곡진 세월 속에서 춤과 노래로 삶의 시름을 잊고자 했던 정겨운 모습들을 대변합니다. 말 그대로 살아있는 역사서인 것입니다“ 1980년대를 전후한 이러한 계기로 그의 화풍은 기본적으로 돌담을 모티브로 하지만, 단순한 돌담의 표현이 아니라 한국적인 이미지와 문양을 넣거나 인물, 일하는 농부들의 실루엣을 구상적이고 반추 상적으로 변형하는 다양성으로 나아갔다. 이 배경에는 돌담이라는 단조로운 소재를 다양한 이미지와 결합시키며 우리의 한국적인 정서를 돌담을 통하여 드러내고자 하는 강렬한 작가의 의지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었다. 작가는 돌담이야말로 가장 한국적인 미의식이 소박하게 담긴 은밀한 모티브임을 명확하게 인지한 것으로 판단된다. 그래서 담에 비친 소나무나 사람의 그림자, 동물의 그림자를 때로는 구상적인, 때로는 추상적 형식으로 형상화 시키기 시작했다.

그러나 90년대 들어 작가는 혼합재료를 사용하며, 바탕의 돌담에 다양한 문양을 넣어 전통적인 소재를 혼합시키는 그만의 특징을 보여주었다. 어떤 작품에는 돌담을 배경으로 사실적인 꽃들을, 새의 모습이나 제기 차는 모습, 다양한 농촌의 풍경들을 실루엣으로 마치 벽화처럼 담아내면서 돌담을 배경으로 다양한 <담> 시리즈를 제작했다. 90년대를 전후한 이필언 회화작품의 특징은 그러한 한국적인 농악의 풍경이 직접적으로 흡사 벽화처럼 새기듯 표현하는 것에 집중되었다. 그 그림자의 종류도 다양하게 어른이 아이와 노는 모습을 비롯하여 돌담을 배경으로 다양한 색조로 전면에 등장한다. 그러나 2000년대는 좀 더 본격적이고 풍부한 벽에 그림자를 시도하며 재료에서도 변화와 확장을 가져온다. 특히 재료를 닥나무 한지 위에 사용하면서 여러가지 담 형태의 무늬에 변화를 실험하면서 이미지를 한글과 전통적인 문양들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는 다소 파격적 표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표적인 최신작 <산골> 스타일을 보면, 캔버스 위에 닥죽을 붙여 기본적으로 입체감을 주면서 부조와 한글로 조형미를 완성한 후 아크릴 물감으로 색을 올려 완결 짓는 형식이다. 이러한 초기의 화폭 배경에는 돌담을 단순하게 한국적 정서의 표현이라는 주제를 넘어 돌담에 투영된 우리의 정겨운 정서를 전통적인 소재에 그치지 않고 현대적이고 한국적인 감각으로 드러내고 싶어 했다. 

2010년 이후와 최근에 이르러서는 다소 복고적인 단순한 표현 경향도 보이지만, 이전보다 좀 더 풍부한 풍경들이 돌담에 율동감 있게 등장한다. 다변적인 그림자의 색채는 물론 구성도 전적인 돌담 모습에서 벗어나 화면을 분할하는 구성상의 특이점도 보여준다. 물론 이 시기의 작품들도 전체적으로 매우 흥미롭다. 하지만 특히 붓을 든 <자화상>은 그의 회화세계를 축약한 듯 색채와 표현, 감정에서 단연 그 걸출함과 우수성이 인상적이고 돋보이는 초상화이다. 여기서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은, 1980년 국전 대상을 수상한 다음 프랑스로 떠나 몽파르나스에 아카데미 그랑쇼미에르에 수학하면서 조형적 변화의 계기를 조각에서 찾다가 회화와 조각의 조형적 만남을 발견하면서 그가 조각의 관심에 더 새롭게 눈을 뜨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그리하여 그는 부조적 회화와 조각에 자신을 얻었고, 1985년부터는 수십 개의 조각으로 조형물을 제작하는 입체작가로서도 열정을 보이며 실제 많은 작품을 하면서 눈길을 끌었다. 그가 이 조각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는 더욱더 한국적인 정서를 중시하였고 특히 대리석의 흰색을 접하면서 민족의 색처럼 작품에서 흰색도 많이 등장하면서 더욱 흰색에 매료되어 단순한 절제된 색감을 표현하게 되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그의 조각 작품 속에는 전반적으로 부드럽고 수려한 인체의 곡선은 다듬어진 인체 표현의 절정을 보이는가 하면, 독창적인 표면 처리는 유화작품처럼 투박한 듯 섬세하고 거친 듯 부드러우며 강렬하고 감각적인 입체가 조각가로서도 전혀 부족함이 없을 정도로 인상적이다. 

회화와는 다른 별개의 작업인 조각 작업을 이처럼 뛰어난 표현력과 공간 감각으로 훌륭한 사실적 입체작품을 제작한 작가 또한 흔치 않다.
그의 조각은 대부분이 인체였지만, 부드러운 인체의 선과 볼륨으로 우아하며 원숙한 표현의 강인함을 보면 이필언 조각의 매력이 그림 못지않은 매력을 발견하게 된다. 작가 또한 자신이 미술에 대한 기본적인 정의를 다시 생각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고 할 저도로 그는 조각과 회화를 병행함으로써 돌담이라는 평면적 구도의 회화 작업을 통해 얻을 수 없는 입체적 작품에서의 충족감을 얻을 수 있어 예술가로서 더할 수 없는 즐거움이 되었다고 술회했다. 그의 예술 활동도 눈여겨 볼만하다. 2004년 씨올회를 창립, 10여 년간 회장직을 수행하며 경복궁·덕수궁·사찰 등 전국 유적지를 찾아 ‘담’ 그림을 그린 것도 그 돌담 속에 우리 고유의 정신과 철학을 보았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라 ” ‘담’이 단순한 경계를 넘어 사색과 풍류의 멋을 지니며 또한 ‘담’에 드리워진 그림자는 시간에 따라 모양을 달리하는 형이상학적 존재이며, 우리 고유의 것을 회화로 담아내는 도구”로 인식하였기에 구상과 반추상을 넘나들며 접목했으리라 생각되는 것이다.

아니 그것보다 이필언 화백은 이미 어릴 때부터 그림이 좋아 굶어 죽더라도 예술의 길을 택하리라고 했던 만큼 그는 자신의 예술에 모든 것을 걸고 평생 작가로 살아왔다. 그러던 중 10년 전 위암 수술로 인해 큰 고비 맞기도 했지만, 예술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불태우며 다시 붓을 잡아 조각이 융합된 부조적인 회화에 정진하면서 이 모든 작품세계를 완성했다. 무엇보다 이필언 작가는 누드와 인물 자연 풍경 등 전통적인 자연주의적인 사실풍이 있지만, 평생 그의 작품의 모든 평가와 세계는 돌담이다. 담벼락에 비친 나무나 인물의 그림자, 그 한국 특유의 은은한 운치와 정겨움은 서정성의 극치라고 아니 할 수 없다.  그가 얼마나 ‘담(牆)’에 대한 애착이 있었는가 하는 또 하나의 고백이 있다.
 ” 담이 좋아 담을 찾았습니다. 외로울 때나 정다울 때 슬플 때도 혹은 혼자서 둘이서 바람 많은 역사로……. 구석구석 돌덩이 하나 흙 한 줌에도 서려 있는 선조들의 입김이요. 부분으로 빨려들면 추상적이요 멀리 보면 사실이라 면면히 이어온 아 바로 이것이다. 우린 것이로구나 있는 듯 없고 없는 듯 있어 은은히 풍기는 고운 색채 선은 약한 듯 강하고 면은 좁은 듯 무한한 공간이 있구나. 푸른 하늘을 먹고 맑은 공기를 마셔 고이고 이 화폭에 이 혼을 담아 훨훨 구름에 싣고 멀리멀리 저쪽에 자랑하고 싶건만, 아 자꾸만 달아나는구나 마음만 앞서고 재능은 뒷걸음치니 ......어찌 그리도 내 모습 나와 같으냐.“ 1980년 5월 그가 한국을 떠나 파리로 가면서 남긴 도불전에 그의 예술에 모든 영혼이 그대로 담겨있다.

어쩌면 오늘에 이필언 화백이 이렇게 구상화단에 중요한 작가로 평가받는 것 중에 반은 <돌담> 덕분이고, 반은 그가 “가장 한국적인 것이 가장 세계적이다.”란 뚜렷한 철학으로 한국미의 본질을 끊임없이 추구한 덕분일 것이다. 전통의 아름다운 돌담에 모던한 감각으로 기법과 양식을 초월한 자유로운 세계를 열어 새로운 이미지를 창조해낸 작가 이필언 화백이 바로 그 예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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