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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들의 표정, 그 풍경의 파노라마 - 심수구

김종근



나무들의 표정, 그 풍경의 파노라마 - 심수구 (1949-2018)


김종근 | 미술평론가
심수구의 작업은 무엇보다 우리를 숨막히게 한다. 거대한 규모의 패널 위에 꼼꼼히 박혀진 나무들. 그들을 보는 것은 그래서 숨막힐 정도로 질식 할 것 같은 쾌감을 준다. 그런 이유로 그의 작품은 놀랍기도 하다. 
한결같이 그는 산등성이에 있는 크고 작은 싸리나무 혹은 갈대, 배나무 등을 길이 3cm로 자른다. 그리고는 그 조각들을 나무 패널 위에 하나하나 붙여 나간다.
그 무수한 수백, 수천 개의 나뭇조각들은 점점 하나의 거대한 풍경으로 되살아나, 마침내 나무들의 집합이 아니라 하나의 작품으로 변한다.  
그는 그것들을 오랫동안 <나무들의 이야기> 라고 불렀다. 왜 그는 나무들을 가지고 이렇게 만들게 되었는가. 그는 자신의 작업 이미지가  '시골 처마 밑에 쌓아둔 장작더미의 이미지'에서 강렬한 인상이 있었다고 했다. 겨울이 오기 전 집집마다 쌓아둔 장작더미에서 그는 어떤 어릴 적 추억을 발견한 것이다.  
그의 작업에 출발은 그러고 보면 시골에서 보았던 어린 시절의 추억들을 반추해보는 향수에서 시작한다.  
막상 그의 작업은 그렇게 사치스럽거나 한가로운 작품들은 아니다. 기본적으로  작품들은 절대적으로 많은 시간과 노동의 번잡스런 과정을 요구 한다. 우선 그는 울산의  변두리 작업실에서 싸리나무를 고르고, 자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고르게 자른 나무들은 바깥 야적장에서 말려 보따리에 넣어둔다. 
이후 그는 다시 나무들을 꺼내어 하나씩 판 위에 붙여 나간다. 어쩌면 심수구의 이러한 행위들은 하잘 것 없는 싸리나무를 화판 위에 붙이는 아주 단조롭고 무의미한 행위처럼 여겨지지만, 실제 그러한 작업과정은 엄청난 시간과 힘 , 인내를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을 지나 완성 된 작품들이 빚어내는 나무들의 하모니 그 정점에 심수구 작품에 본질이 발견되며 그것이 심수구 평면 회화의 진실이다.    

그가 쓰는 주요한 무기는 곧기와 부피를 가지고 있는 싸리나무이다. 그러나 작은 나무토막의 단면들은 작은 작품이라 하더라도 수십 킬로그램의 엄청난 물리적인 무게를 갖는다.
그는 이 풍경을 직접 지휘 연출하면서도 빈번히 이러한 대상들을 나무토막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물질 덩어리로 보려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가 화면에서 말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결코 무겁거나 거창하지 않은 평범한 삶의 이야기를  말하겠다는 의지를 반영한다.  “우리가 선선한 가을날 시골길을 걸어가듯 그렇게 편안하고 친근하게, 때로는 뜻하지 않은 즐거움으로 함께 하고 싶을 뿐이다.”라고 여유 있는 작업의 속내를 드러내고 있다.  
그러나 그것이 심수구의 완전한 진실은 아니다. 그는 보잘 것 없는 나무들을 끌어 모아 우리들에게 그가 기억하며 인상 깊어 했던 ' 장작더미'와 그것들이 모아지거나 쌓아져 빚어내는 하나의 스펙타클한 아름다움을 극대화하는 것이다.  
그 극대화의 지점에 심수구가 의도하고 추구하는  곧 '적(積)과 직(織)'을 향한 시각적 만찬이 놓여있다. .
우리는 종종 그 만찬의 메뉴보다는 먼저 그 식탁의 크기와 규모에 압도당한다. 어떤 평론가는 그가 크기에 강박관념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적하기도 한다.  

나 또한 이 점을 말하고 싶다. 모든 표현하고자 하는 대상은 그에 합당한 크기가 있다는 점이다. 
큰 것은 크게 작은 것은 작게 만들어내야 한다는 것이다.    
어쨌든 보통 그의 작품들은 100호 크기를 10여개 정도 합치는 규모이다. 그래서 “산 그림자 같은”  전시작품은 가로 28.5m, 세로 11.3m의  실제 크기로 착각할 만큼의 크기를 지니며 “언덕에서” 같은 작품도 7m를 넘나든다. 
그들은 작은 나무토막으로 채워진 여러 판을 모아 전시장 벽면을 꾸민다.  이 순간 순간이 그의 삶의 과정을 전시장이라는 장소로 옮겨 많은 사람들에게 그가 생각하는 나무의 이야기를 들려주겠다는 것으로 해석된다 .
그러나 한편 여기에 심수구의 또 다른 어법이 있다. 수없이 나무를 붙여나가면서도 그는 이러한 실체를 본질적으로 또는 조형적인 측면보다는 물질 그 자체로 이해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사고가 반듯이 절대적인 것만은 아니다 . 그는 가끔 돌 같은 오브제를 살짝 끼워 넣거나 뱀을 놓아둔다던가 , 다양한 물감을 칠하면서 그는 어떤 화면을 상상하거나 꿈을 꾼다. 
그는 작가란 그들이 본 인상을 전달 해 주는 이미지의 전달자라는 생각을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의외로 우리들의 기존적인 시각을 전복시키는 장치들이 숨어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보고 있는 심수구의 나무 이야기이다. 그가 처음부터 그런 나무를 그린 것은 아니었다. 초기 그의 작업은 전형적인 모더니스트 작가들에게서 보여지는 그런 작업들이었다. 1970년대의 기하학적 추상작업이나 일종의 콜라주 작품들은 그러한 양식들을 잘 보여준다. 
그러다 그가 <나무이야기>로의 관심을 보이기 시작한 것은 90년 중 후반의 나무작업에서 본격적으로 드러난다.  물론 지금 같은 나무 형태로 완벽한 성격을 지닌 메시지를 주기 시작한 것은 90년대 후반에 집중적으로 나타난다.    
이 때는 그에게 아주 중요한 시기이다. 평면작업에 열중했던 그가 하나의 대상을 오브제로 파악하려는 시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그 징후가 본격적으로 등장하게 된 것은 1993년의 목호화랑의 개인전이 그 계기가 된다.  
그의 작업을 70년대 초부터 고려한다면  <춤> 작업을 정리하고  , 평면에 오브제들을 끌어들이는 평면에서 입체로의 시대를 맞게 되는 것이다. 우리로서 아주 특이한 것은 그는 어려서부터 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즉 무대 위에서 표출되는 움직임으로 파생되는 그 무한한 공간감, 나를 매료시키기에 충분했고 가끔은 그들을 경외시 하기까지 했다는 점이다. 결국 캔버스 위에서 다양한 색과 오브제로 표현되는 작품들은 입체 그 이상의 세계로 확장되었다. 조형과 그것으로 인한 개념들로 고민에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을 느낀다.
그렇게 새로운 관점으로 다시 시작된 것이 최근의 ‘나무’이야기 이후의 대형작업들이다.  


결정적으로 그는 1997년의 작품 “나무 이야기”에서 그는 패널 위에 철사로 공간을 분할하여 한지를 붙이는 작업을 기점으로 나무의 이미지를 본격적으로 등장시킨다.   
우리는 여기서 이미 현재의 작업들에서 보여지는 나무의 출현과 향방을 가정 할 수 있다.
다소 전면적인 회화라기 보다는 기하학적 구성과 함께 나타나고 있지만 그들은 나뭇가지와 불가분의 관계들을 맺고 있다.    
심수구의 작업에서 이러한 나뭇가지의 등장이 그가 작업하고 있는 것과의 상관관계가 그다지 논리적이거나 합리적이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오히려 캔버스 공간의 분할과 나무와의 결합이 자연스러운 만남이라고 여겨질 뿐이다.  
이러한 일련의 결합된 형식들은 가나전시회를 계기로 2000년 초반 들어 보다 적극적으로 시도되어 새로운 설치 회화로의 가능성을 크게 열어 놓고 있으면서 그의 작업은 호평을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가 이런 나무의 작품으로 돌아와 전면적으로 확대해오는 스타일은 점진적으로 화면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온다. 그 변화는 다름 아닌 이전의 보다 공간이나 조형적인 요소에도 관심을 보이면서 마치 평면성을 일탈이라도 의도하듯이 입체성에 서정적인 감성을 이입시키는 노력들이 보인다는 것이다.   
이제 작은 나무로 채워진 평면에 돌 몇 개가 오브제로서 등장한다. 뿐만 아니라 중요한 것은 그의 무수한 이 나무들의 집적이 부피와 형태에 그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나무 위에 가지런히 놓인 뱀의 모습을 한 <산책길에서> ,<하늘같은 구름에서> 등은 이제 이 나무들의 집적이 숲이 되고,  자연이 되고 , 물가에 모래밭, 갈라진 논둑 흙속에 박힌 돌등 그 모든 풍경으로 한편의 파노라마처럼 되살아난다 . 그는 이제 나무라는 대상으로 메시지와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드러내는데  확신을 보이고 있다. 
그의 나무 이야기는 무엇일까?  그는 이것을 “ 수많은 나무들이 어떤 관계로 짜여지면서 파생하는 돌발적인 사건들을 하나의 사태로 다큐멘트화 하는 과정” 으로 이해한다. 
그러한 돌발적인 사건이나 사태를 엄청난 나뭇가지의 집합처럼 , 그것들은 그의 삶의 다큐멘트가 들려주는 함성으로 받아들인다. 나뭇가지 하나하나의 특유한 몸짓들이 단순한 조형적 수단을 넘어 무한한 공간 속에 이것이 미술이다라는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는 여기서 현대미술의 의외성의 충격을 말한다.  수많은 붉은 악마들의 모습에서 내 작업과 공통성을 느낄 수 있다고도 했다. 
반복과 차이, 똑같은 나무를 수없이 반복해서 붙이는 것은 내가 숨을 계속 쉬는 것이나 계속 걸어다니는 행위처럼, 어찌 보면 하잘 것 없는 일상과 같은 것이라고 이해한다.   

지난 월드컵 시기의 붉은 악마들의 개인적인 반복행위, 그것은 거대한 함성과 엄청난 표면효과를 만든 결과라는 사실을 주목한다. 그의 작품에 무수한 나무들의 침묵과 함성은 이런 상황과 밀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의 뿌리는 입체로< 형상화> 된다. 
그리고 이것은 최근 설치작업에서나 현대미술에서 특징적으로 그리고 유행처럼 번지는 <집합성> 등이 언제나 중요한 요소가 되고 있다. 세자르나 아르망, 레이노의 작업들은 이러한 특성을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작가들이기도 하다 .명확하게 그의 작품 속에 보이는 집적이라는 엄청난 나무의 조각들이 펼쳐내는 힘과 놀라운 짜임새의 멋은 심수구 작품이 가지고 있는 가장 볼만한 하모니의 이벤트임은 틀림없다 .
물론 하잘것없는 나무토막들이 이처럼 하나의 파노라마의 미적 대상이 될 수 있다는 사실에 그 자신도 놀라워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엄밀하게 그것은 '무리'가 가져다주는 설치와 미술적 아름다움이지 나무는 아니다 . 그의 삶은 때로는 패널 위에서 크고 작은 자연을 담아내는 풍경이 되기도 하고 , 모래밭등 에서 그것들은 사진처럼 닮은 이미지가 되어 되살아난다. 
 나무의 단면들이 빚어내는 거대한 추상적 이미지의 입체적 리얼리티가 여기에도 있다. 그리고 나무토막들이 이렇게 황홀하고 멋진 풍경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그와 우리는 확인한다.   
이것은 그가 오랫동안 집적(쌓음)이 보여주는 질서에 목표를 두고 그 세계를 끝임 없이 반복 전개 해온 눈물겨운 결과이기도 하다. 

그가 어떻게 입체의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가 ? 이점에 있어 그의 작가적 시각은 매우 분명하고 단호하다.  그의 출발은 시작부터 입체의 표현을 위한 변화라는 입장이 그것이다. 
이제 그의 입체는 평면의 캔버스 위에서 명암과 원근법, 그리고 풍경으로 새로운 파노라마적인 시각성을 확보하고 있다. 
지금까지 평면에서 입체의 표현을 넘어 개념상으로 형태상으로나 설치와 같이 입체작업을 본격적으로 준비하고 있다.그것을 그는 입체는 마지막 화두라고 정의하고 있다. 
아마도 우리는 거대한 파노라마의 입체적인 나무 이야기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그에게 행복한 일이다. 걸어가듯이 숨을 쉬듯이 나무토막을 하나씩 붙여가면서 과정 중에 일어나는 사건과, 일어날 지도 모를 돌발적 우연을 즐기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그의 작업을 더 충분히 완성하지 못하고 6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것이 너무나 안타깝고 애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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